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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日説教原稿

2023 2024년9월1일, 사도행전 11:19-26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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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者 박성철
コメント 0件 照会 534回 日時 24-09-07 20:27

本文

  지난 주일 말씀을 기억하며, 옆에 계신 분과 함께 이렇게 고백합시다.

  성도님 !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는] 사람이 됩시다.

  이웃과 성도들, 가족과 친족들을, ‘사랑의 눈과 손’으로 어루만집시다.

  이웃과 성도들, 가족과 친족들을, ‘사랑의 마음’으로도 어루만집시다.

  이웃과 성도들, 가족과 친족들을, ‘간절한 기도’로도 어루만집시다.


  청소년들을 위해 사역하는 어느 목회자의 고백에 의하면,
  청소년 수련회를 하면, 기도 시간에 대성통곡하며 우는 아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아직은 어린 나이에, 무슨 그렇게 대성통곡하며 기도할 일이 있는가

  하고 상담해 보면, 많은 경우가 부모와의 관계 때문이라고 합니다.

  통곡하며 기도한 청소년들의 대답을 일부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전혀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에게 아무런 기쁨도 주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에게 무거운 짐일 뿐입니다."

 "나 같은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합니다."


  여러분 ! 자녀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

  또한, 자녀를 기뻐하지 않는 부모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

  또한, 자녀를 짐이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

  자녀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부모에게 너무나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 왜 정작 많은 청소년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까요 ?!

  그 대표적인 이유는 이것이라고 합니다.

  그들 대부분이 부모로부터 야단만 맞으며 자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존감(自尊感)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참고> 자존감(自尊感) -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마음.

 (自分自身を価値ある者だと感じる感覚。

  自分自身を好きだと感じること、自分を大切に思える気持ちのこと。)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3∼40년 전만 해도, 부모들이 자녀를 격려하거나

  사랑한다는 말은 별로 하지 않고, 꾸짖고 야단치는 것은 많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의 부모들 생각으로는,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므로, 좀처럼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뭔가 잘못을 하면, 가차 없이 꾸짖으니까,

  아이들 마음속에 자존감은 무너지고,

  도리어 좌절감과 부모에 대한 상처만 쌓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이러한 부모의 행동은, 우리의 자녀들이

  훌륭한 인물로 자라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고 합니다.

  칭찬과 격려, 꾸짖음과 벌(罰)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지나친 꾸짖음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녀에 대한 무관심(無關心)입니다.

  아동 심리의 전문가들에 의하면, 부모나 교사, 그리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 행동이 점점 과격해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일으켜야 비로소 주목(注目)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이것은 비단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 교회는 수천 명이 모여 예배하는 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것을 강조하는 교회여서, 예배자들의 복장이나

  예배드리는 자세에, 마음을 많이 쓰는 교회였습니다.

  어느 날, 한 신사가 반바지에 야구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위 성도들이, 복장은 둘째 치고 모자라도 벗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중년 신사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다음 주일에는 더 심한 모습을 하고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예배 후에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모여들어,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예배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음부터는 모자라도 벗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자 그 중년 신사가 목사님과 장로님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렇게 여러분들과 대화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사실 저는 3년 전부터 이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누구도 제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난 주일에서야 몇 사람들이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것도 순전히 이 모자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우리의 평소 습관은, 어떤 문제에는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칭찬과 격려에는 매우 인색합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 교회는 어떠한가요 ?!


  한국의 어느 교회에 30대의 젊은 나이에 장로가 된 분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분은 교회를 향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는 장로가 된 후, 장로의 사명 중 하나가, 교회 안에서

  교인답지 못한 사람을 찾아내어 징계(懲戒)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한국 교회에서는 방언 논쟁이 한창이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라고 가르쳤답니다.

  당시 일부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장로님은 방언 기도하는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서, 새벽 기도회가

  끝나고 불이 꺼지면, 교인들 곁에 살금살금 다가갔다고 합니다.

  또한, 방언 기도하는 어떤 성도가, 새벽기도 한 시간 전에 나와서

  기도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 장로님도 한 시간 일찍 교회에 가,

  기도하는 성도의 기도를 엿들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 장로님처럼 하는 것이,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겠습니까 ?!

  아니요. 예수님은 결코 이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재판관으로 세움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4:11-12.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兄弟たち、互いに悪口を言い合ってはいけません。自分の兄弟について悪口を言ったり、

      さばいたりする者は、律法について悪口を言い、律法をさばいているのです。

      もしあなたが律法をさばくなら、律法を行う者ではなく、さばく者です。)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律法を定め、さばきを行う方はただひとりで、救うことも滅ぼすことも

      できる方です。隣人をさばくあなたは、いったい何者ですか。)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가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자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 본향교회가 판단하고 정죄하는 교회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칭찬하고 격려하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협력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를 계기로, 바리새인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을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그 결과, 사도들을 제외한 신자들은,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사도행전8:1.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その日、エルサレムの教会に対する激しい迫害が起こり、

  使徒たち以外はみな、ユダヤとサマリアの諸地方に散らされた。)


  그런데, 흩어진 신자 중에서는, 사마리아에 머물지 않고, 유대 땅을 벗어나

  베니게와 안디옥에 이르러 복음을 전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만 전도했습니다.

  헬라어가 익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19절.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さて、ステパノのことから起こった迫害により散らされた人々は、

  フェニキア、キプロス、アンティオキアまで進んで行ったが、

  ユダヤ人以外の人には、だれにもみことばを語らなかった。)


  이에 하나님께서는,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 신자들을

  안디옥으로 보내셔서,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본문20절. 그(信者)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ところが、彼らの中にキプロス人とクレネ人が何人かいて、アンティオキアに来ると、

  ギリシア語を話す人たちにも語りかけ、主イエスの福音を宣べ伝えた。)


  그러자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본문21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そして、主の御手が彼らとともにあったので、大勢の人が信じて主に立ち返った。)


  이 기쁨고 놀라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은,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을 가르치고 인도할 목회자로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본문22절.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この知らせがエルサレムにある教会の耳に入ったので、

  彼らはバルナバをアンティオキアに遣わした。)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교합니다.

  본문23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バルナバはそこに到着し、神の恵みを見て喜んだ。そして、

  心を堅く保っていつも主にとどまっているようにと、皆を励ました。)


  그렇습니다.

  바나바가 전한 메시지는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라

 (心を堅く保っていつも主にとどまってください。)]였습니다.

  이 말씀의 헬라어는 [프로데세이 테스 카르디아스 쿠리오 프로스메네인]로서,

  [흔들림 없이 주와 함께하라, 주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바나바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1년간 안디옥 신자들을 권면했습니다.


  그러자 여러분 ! 안디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

  예, 안디옥교회 신자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본문26절.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弟子たちは、アンティオキアで初めて、キリスト者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


  자 ! 그렇다면, 여러분 !

  바나바는 안디옥교회 신자들에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이라고 가르쳤을까요 ?!


  분명, 예수님처럼 [격려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복음21: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ヨハネの子シモン。あなたは、この人たちが愛する以上に、わたしを愛していますか。)


  여러분 ! 묻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여전히 사랑하는 줄 알고

  물으신 것입니까, 아니면 모르고 물으신 것입니까 ?!

  물론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여전히 사랑하는 줄 알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요한복음21:15.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私があなたを愛していることは、あなたがご存じです。)


  그렇다면, 여러분 !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시면서, 왜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까 ?!

  물론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고 격려하기 위함이십니다.


  안디옥교회의 바나바에게는 사실 본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

  예 ! 요셉입니다. 바나바의 본래 이름은 요셉입니다.

  사도행전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キプロス生まれのレビ人で、使徒たちにバルナバ

 (訳すと、慰めの子)と呼ばれていたヨセフも、)

  이 말씀에서 [위로]의 원문 헬라어는 [파라클레세오스]인데,

  그 원형은 [파라클레토스 (성령)]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레위족 출신인 요셉은,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상처 많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를 보고,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가]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

  그렇습니다.

  예수님처럼, 바나바처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초대 교회 신자들을 심하게 박해한 사울(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돌이킨 후, 신자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으나,

  사울이 저질렀던 악행을 기억하는 신자들이, 사울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울을 격려하고, 회복시킨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사도행전9:26-27.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エルサレムに着いて、サウロは弟子たちの仲間に入ろうと試みたが、

      みな、彼が弟子であるとは信じず、彼を恐れていた。)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しかし、バルナバはサウロを引き受けて、使徒たちのところに連れて行き、

      彼がダマスコへ行く途中で主を見た様子や、主が彼に語られたこと、また

      彼がダマスコでイエスの名によって大胆に語った様子を彼らに説明した。)


  그뿐만이 아닙니다.

  바나바는 그 후, 다소에 머물던 사울(바울)을 안디옥에 데리고 와,

  바울과 협력하여 안디옥교회 신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본문25-26절.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バルナバはサウロを捜しにタルソに行き、)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彼を見つけて、アンティオキアに連れて来た。

      彼らは、まる一年の間教会に集い、大勢の人たちを教えた。)


  그 결과,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안디옥교회 신자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바나바의 격려가 없었다면, 바울이 복음 전도자로

  쓰임 받기까지는, 좀 더 시일이 걸렸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도, 그리고 우리 본향교회도, 한 지체 한 지체를 칭찬하고 격려하여,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세우는 바나바와 같은 우리가 됩시다.


  인천의 한 중학교의 도덕 선생님인 김상복 교사의 글을 소개합니다.

  나는 중학교 도덕 교사다.

  [칭찬일기]는 내가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내주는 숙제다.

  매일 부모님께 한 가지씩 칭찬을 해드리고,

  그 상황과 부모님의 반응을 적어오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이렇게 아이가 먼저 부모님을 칭찬해 드리면, 결국은 부모님이

  자기 아이를 칭찬하게 될 것이라는, 내 나름대로 속셈이 있는 숙제였다.


  몇 년 전, 아이들에게 설문조사를 해보니,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부모님에게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아이들은 하나같이 "참 잘했다"라는 칭찬의 말이나

 "너를 믿는다"라는 신뢰의 말이라고 했다.

  나는 아이들의 말을 들으며,

  언젠가 아내와 함께 참여했던 부부관계 회복 프로그램에서,

  하루에 한 번씩 부부가 서로를 칭찬하라는 숙제를 하면서,

  전보다 훨씬 더 서로를 잘 이해하고,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을 생각했다.


  가족이 가까워지고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면,

  제아무리 밖에서 힘든 일을 겪어도 살아갈 힘이 생긴다.

  나는 그때 일을 떠올리며,

  아이들에게도 칭찬하는 것을 숙제로 내주기로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적어낸 칭찬일기를 보면서,

  ‘내가 무엇을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닐까 ?’ 하는 걱정이 생겼다.

  예상보다 많은 부모님들이, 아이들 칭찬에 인색했고, 정작 당신들이 받은 칭찬에

  익숙하지 않아서, 오히려 아이들 마음에 상처가 될 만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찬의 힘은 서서히 나타났다. 영미(가명)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맞벌이하는 부모님과 동생이 둘 있는 평범한 가정이었는데,

  중학생 영미 역시 ‘칭찬일기’(숙제)를 쓰기 시작하면서,

  부모님의 반응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매일 도시락을 싸주시니 고마워요. 건강하세요 !’라는 딸아이의 칭찬에,

  엄마는 "넌 엄마가 겨우 도시락 싸주는 사람으로 보이니 ?!"라고 하는 등,

  매일 이어지는 영미의 칭찬은 늘 "실없는 소리 하지 마 !"라는 식이거나,

 "공부나 해 !"라는 답으로 되돌려 주었다.

  아니면, 용돈이 필요해서 아양 떠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 부모님이 너무 밉다고 털어놓는 영미의 칭찬일기는, 두 달째까지도 계속됐다.


  그런데 영미의 칭찬일기가 계속되면서,

  영미의 부모님에게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영미의 칭찬에 웃음을 보이기도 했고,

  가끔은 영미의 칭찬하는 모습을 칭찬하기도 했다.

  두 달 동안의 칭찬일기 숙제가 끝나고, 영미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칭찬일기를 쓰면서부터, 엄마한테 혼나도 대들지 않게 됐어요.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도 알게 됐고, 내가 부족한 부분도 알게 되었어요.

  내년에 제 후배들도 ‘칭찬일기’ 숙제를 했으면 좋겠어요."


  올해 다른 중학교로 전근을 와서, 이제는 영미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 학교에서도 칭찬일기 숙제를 내주었고, 그 과정을 보면서,

  처음에는 부모님에게 실망하고 마음 아파하다가도, 결국에는

  가족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어나는 아이들을 많이 본다.

  집안에 힘든 일이 있는데도,

  아이들에게 웃음을 보이려는 엄마에게 한 학생이 말했다.

 "엄마, 힘들 땐 울어도 괜찮아요.

  엄마는 지금 충분히 우리를 위해 노력하고 계시잖아요."

  그 아이의 엄마는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도 웃으셨다고 한다.

  철부지요, 어린애 같던 딸이 어느새 친구가 되어,

  엄마를 이해해주고 무거운 짐을 나눠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이 가정의 행복을 허물지 못할 것이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비방과 판단은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칭찬과 격려야말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매일 해야 할 일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칭찬과 격려를 통해,

  가족과 이웃과 성도들을 어루만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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