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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日説教原稿

2025 2025년11월30일, 이사야 40:1-2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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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者 박성철
コメント 0件 照会 53回 日時 25-12-06 19:14

本文

  인간 관계에 있어서 말, 즉 언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러다 보니,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고,

  또한,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격언(格言)도 있습니다.

  마음을 담아 건넨 한 마디의 말이, 듣는 이에게 생수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가, 듣는 이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 번 생각하고 한 마디를 하라’는 교훈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유용한 말이, 갑자기 무용지물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머리 속에 담겨 있는 모든 단어들이,

  하나도 쓸모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특히, 누군가를 위로할 때가 그렇습니다.

  큰 슬픔을 당한 사람을 위로해야 할 상황에 있다고 가정해 보시지요.

  호상(好喪)이라고 할 장례식장에서도, 마땅한 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물며, 예기치 않은 사고 때문에, 너무도 이른 나이에 생명을 잃은 경우,

  그 가족들 앞에 설 때면, 정말 '유구무언(有口無言)'입니다.

  그래도 뭔가 말해야 하겠기에 한 마디 던지면, 그 말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이건 아닌데 !'라는 느낌이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실제로, 이런저런 아픔을 겪었던 분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가장 아팠던 것은, 갑자기 당한 그 어려움보다도,

  사람들이 다가와 위로한다고 던진 말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사람들은,

  소위 믿음이 좋다고 하는 신앙인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고의 원인과 결과를 환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남의 아픔을, 확신을 가지고 진단하며 평가합니다.

  약 15년 전, 東日本大震災가 일어났을 때도, 일부 교회에서,

 '회개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나름대로 진단하고, 평가하고, 조언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위로가 아니라, 더 큰 아픔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어느 목회자가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당신에게 이 상황이 얼마나 슬플지 나도 압니다. 그래도 지금은

  무너질 때가 아닙니다. 남은 아이들을 생각해서 더욱 강해져야 합니다.]


 [자 ! 이제 그만 울어. 이제까지 네가 누린 것은 거짓으로 위장(僞裝)된

  축복이었어. 너는 아직 젊어, 다시 한번 결혼하면 되잖아 !]


 [그래도 너는 나보다는 나아, 우리 엄마는 더 젊었을 때 돌아가셨어 !

  차라리 잘됐어,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셔서 빨리 데려가셨나봐 !]


  그렇습니다. 상처가 되는 말이나 섣부른 조언의 말을 할 바에는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 말 안해도 상처가 됩니다.

  섣부른 위로의 말을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힘든 사람을 위로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오늘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본문1절.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慰めよ、慰めよ、わたしの民を。あなたがたの神は仰せられる。)


  그렇습니다. 여러분 !

  우리 가운데,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성경학자인 윌리엄 버클레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 중에 하나는 [위로의 의무 (慰労の義務)]이다."


  먼저,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약 70년 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유다 백성을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한국 전쟁(1950. 6. 25)이 일어난 지, 올해로 75년입니다.

  당시, 북한 땅에 살다가 남쪽으로 피난온 분들이,

  가장 간절히 소망했던 일은 무엇이었겠습니까 ?!

  네 ! 고향 땅에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 10년, 20년, 30년 ... 70년이 지났습니다.

  이쯤되면, 대부분의 실향민(失鄕民)은 고향 돌아가는 꿈을 포기합니다.

  아마도 그분들의 마음은, 체념, 절망, 좌절 등과 같은 말을 모두 합쳐도,

  절대로 다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유다 백성도 그랬습니다.

  자그마치 70년동안이나 외국 땅에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낙심했고, 절망했으며, 좌절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들을, 위로하고, 또 위로하라고 말씀합니다.


  더구나 여러분 ! 하나님은 포로민을 위로할 근거도 말씀해 주십니다.

  바로 본문2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본문2절.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その苦役は終わり、その咎は償われている、と。そのすべての罪に

  代えて、二倍のものを主の手から受けている、と。)


  지난 70년 간, 너희가 받을 벌을, 충분히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70년의 포로 생활이 참으로 힘겨운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있던 모든 채무가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에게는, 회복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포로민들이 위로 받을 이유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40:10-11.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見よ。神である主は力をもって来られ、その御腕で統べ治める。

      見よ。その報いは主とともにあり、その報酬は主の御前にある。)

  11.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主は羊飼いのように、その群れを飼い、御腕に子羊を引き寄せ、

      懐に抱き、乳を飲ませる羊を優しく導びく。)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70년 동안 외국 땅에서 고통했던 그들에게,

  이것보다 위로가 되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습니까 ?!


  그런데 여러분 !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위로는 그저 '말'이 아니라, '진실'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위로의 말들이,

  왜 위로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상처가 됩니까 ?!

  그것은 그 말이 진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한,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에게 이 상황이 얼마나 슬플지 나도 압니다."라는 말이,

  당사자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 이유는,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그가 지금 느끼는 슬픔의 깊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무너질 때가 아닙니다."라는 말이,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힘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 말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너질 때는 무너져야 합니다.


 "자 ! 이제 그만 울어 !"라고 말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한, "이제까지 네가 누린 것은, 거짓으로 위장(僞裝)된 축복이었어 !"

  라는 말은, 어쩌면 가장 진실에 가까운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가 그 진실을 깨달을 때까지는, 상처만 될 뿐입니다.


 "그래도 너는 나보다는 나아, 우리 엄마는 더 젊었을 때 돌아가셨어 !"라고

  말하는 사람은, 슬픔이라는 것이, 타인과 비교해서, 누구의 것이 더하다

  혹은 덜하다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위로는 좋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을 알고 그 진실을 바탕으로 위로할 때, 참된 위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로를 하고자 한다면,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진실을 안다고 하여,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진실을, 말로서 잘 담아내야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이,

  그 진실에 눈 뜰 수 있도록, 지혜롭고 따뜻하게 말해야 합니다.


  자 ! 그렇다면, 여러분 ! 우리는 진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

  어떤 상황에서 진실을 보려면,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만, 작은 사건의 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전체를 본다, 혹은 큰 그림을 본다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보는 것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보지 못하면,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도록 권하고 계십니다.


  본문6절에서,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본문6절. 외치라 (叫べ。)

  그랬더니 예언자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본문6절.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何と叫びましょうか。)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본문6-8절.

  6.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人はみな草のよう。その栄えはみな野の花のようだ。)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主の息吹がその上に吹くと、草はしおれ、花は散る。

     まことに民は草だ。)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草はしおれ、花は散る。しかし、私たちの神のことばは永遠に立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때로 인간이 위대하게 보이고, 영원할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풀과 같고, 인간의 영화도 풀의 꽃과 같습니다.

  금방 시들고 맙니다. 참되고 영원한 것은 우리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바뀌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더구나, 세상 모든 만민은, 우리 주님께서 다스리십니다.

  요한복음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あなたは子に、すべての人を支配する権威を下さい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

  下さったすべての人に、子が永遠のいのちを与えるためです。)


  이 가장 귀한 진실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작가로 유명한 싯처(Gerald Sittser)는 몇 년 전,

  가족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취한 운전사가 중앙선을 넘어온 바람에,

  그 자리에서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4살 난 딸을 한꺼번에 잃어버립니다.

  싯처는 그 교통사고로 몸과 마음을 다친, 남은 세 자녀를 돌보는데

  온 힘을 기울였지만, 세 가족을 잃은 슬픔과 고통은

  좀처럼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우울증에 늪에 빠져 오래도록 허우적댔습니다.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싯처였지만,

  그는 이 사고를 도저히 신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알고 있었던 모든 성경 지식과 신앙적인 경험은,

  큰 상처를 받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친구나 성도나 이웃들이 그에게 던지는 위로의 말은,

  그의 상처에 소금을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몇 번이고 물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믿고 의지하고 사랑했던 하나님 !

  하나님은 내 가족 셋이 죽은 그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도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


  그렇게 울부짖던 어느 날 밤, 싯처는 침대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도 환상을 본 것인지, 꿈을 꾼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는 사고가 났던 곳 근처 벌판에, 살아남은 세 아이와 함께 서 있었습니다.

  네 사람은 모퉁이에서 커브를 도는 미니밴(그들이 탄 승용차)을 보았고,

  이윽고 맞은편에서 거대한 트럭이 나타나 중앙선을 넘어

  미니밴을 향해 돌진하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그는 몇 년 전 그 날처럼, 참혹한 사고와 죽음을 또다시 목격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싯처 박사는 신비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가 쓴 책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다])


「갑자기 아름답고 찬란한 빛이 사고 현장을 감쌌다.

  그 빛은 주위를 밝게 비추었다. 그 빛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이 부서진 사고 현장의 아주 세세한 부분들까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빛 때문에, 우리는 그곳에 계신 하나님도 보았다.

  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때,

  그 사고가 일어난 그곳에 계셨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그곳에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남은 우리를 위로하시려, 그곳에 계셨다.

  그분은 사고에서 살아남은 우리를, 새로운 삶의 길로 보내시려고, 그곳에 계셨다.」


  싯처 박사의 고백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나는 이 환상(꿈)을 경험하고 나서도, '왜 사고가 일어났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또 그 사고가 나에게 유익했다는 확신도 얻지 못했다.

  사고로 인한 나의 슬픔을 씻어내지도 못했고, 행복을 얻지도 못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하나님의 주권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내 앞에 있던 절벽은, 여전히 나를 압도하며 높이 서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곳을 바라보며, 안전감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가득차기도 한다.」


  싯처 박사가 그 날 경험한 것은, 성령께서 베푸신 은혜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성령의 감화 안에서 그는 '큰 그림'을 보았고 '보지 못했던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그 비극의 밤에 일어난 일의 전부를 보았습니다.

  그가 그토록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던 하나님은,

  그곳에 계셨고, 그분의 방식대로 선한 목자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싯처는 그 진실을 보았을 때, 어느 정도의 위로를 받았고 평안도 얻었습니다.


  그가 쓴 책을 통해 그는,

 "알고 보니, 나의 하나님이 나의 아픔 가운데 함께 계셨다."라고

  고백했고, 독자들은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의 하나님도 나의 아픔 가운데 함께 계시는 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지금 여러분은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

  혹시 감당할 수 없는 아픔과 고난과 역경 가운데 있습니까 ?!

  그렇다면 여러분 ! 성령 하나님의 감화와 감동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슬픔과 고난과 역경 가운데, 임마누엘('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통해, "나의 하나님이 진실로 여기 계시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이며,

  그 힘으로 지금 당하고 있는 슬픔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체험을 통해, 낙심에 빠진 이웃들에게,

  기쁜 소식, 아름다운 위로의 말을 전해 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몇 해 전, [슬픔과 아픔을 당한 성도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찬송은 어떤 곡일까] 라고 설문조사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가장 많은 성도들이 이 곡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 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잃은 것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 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자 ! 그렇다면, 여러분 !

  진실을 깨달은 우리는, 슬픈 자들을 어떤 말로서 위로해야 할까요 ?!

  저는 위로의 자리를 향할 때마다, 꼭 이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합니다.


  이사야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神である主は、私に弟子の舌を与え、

  疲れた者をことばで励ますことを教え<て下さる。>)


  그렇습니다. 여러분 !

  아무리 잘 위로하고 싶어도, 또 진실을 알고 있다 해도, 그 모든 것을

  가장 합당한 말로 표현하여, 상대를 위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의 자리를 향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 학자들의 혀를 저에게 주셔서, 저로 하여금,

  곤고한 성도, 슬픈 성도, 낙심한 성도를 어떻게 위로할지, 가르쳐 주세요 !"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입술을 주장해 주실 것입니다.


  끝으로 여러분 !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로마서12:15.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泣いている者たちとともに泣きなさい。)


  이번 한 주간,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위로하고 또 위로합시다. (慰めて、また慰めましょう。)

  우는 자들과 함께 웁시다. (泣く者たちと一緒に泣きましょう。)

  하나님의 완전한 위로가 그들과 우리에게 풍성히 임할 것입니다.


  자비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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