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018年10월7일, 디모데후서 4:9-11(유익한 성도가 됩시다)-한경수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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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게 됩니다.
그러나 감옥이 그의 복음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도 편지로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노사도로서 회고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여섯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 데마, 그레스게, 디도, 누가, 마가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바울과 함께했던 복음의 동역자 입니다.
바울의 성공적인 사역의 배후에는 이들 외에도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많은사람들의 희생과 봉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가 바울을 바울되게 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들과 함께 일함으로써 비로소 기독교사에서 최대의 드라마를 연출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은 하나님과 일대일의 외로운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며 복음을 듣고, 내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로 시인합니다.
나의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살기로 선포합니다.
주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은 개인적인 결단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를 개인으로 있지 않고, 주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하나의 공동체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믿고 구원을 받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마자 주님의 지체가 됩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나면 다른 형제와 가족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후로 영원히 혼자가 아닙니다.
거룩한 공동체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으로 거듭나자마자 나는 예수님의 지체로서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좋아도 싫어도 이러한 신앙적 공동체인 본향교회에서
형제들과 함께 자신의 믿음을 성숙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교회를 떠나서도 안 되고, 떠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지체”가 되어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헌신하며 서로 하나님의 나라와 본향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동역자입니다.
예수안에 살면 반드시 두 세력의 도움을 받습니다.
먼저 분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탄입니다.
나를 도와 괜한 일에도 오해하여 섭섭하고 화나게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 를 흔들고 나누게 합니다.
사탄은 정직과 용기를 가장하여 나를 분열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속지 마세요.
마귀는 나를 이용하고 조정하여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자입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나를 끝까지 돕는 보혜사 성령님도 계십니다.
성령은 핍박을 받아도, 손해를 봐도, 억울하고 괘씸해도, 하나가 되라고 합니다.
내가 말씀에 순종하려는 척만 해도 일들을 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도는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과 함께 일했던 동역자들이
바울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얼마나 유익한 인물들이었는가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1. 떠나는 자들입니다.
1) 데마입니다.
A.D.30-70년경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강림 후
예루살렘에서 태동한 초대교회가 로마제국 전역으로 확장되던 때입니다.
데마는 이 시기에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지역을 중심으로 전도 활동을 하고 있던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데살로니가에서 였을 것으로 추정).
그는 회심 후 곧바로 바울의 사역에 동참하는 열정과 헌신을 보입니다.
3차에 걸친 전도 여행 후(A.D.57년경)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됩니다.
벨릭스와 베스도, 그리고 아그립바 앞에서 2년간의 재판을 마치고
가이사에게 심문을 받기 위해 로마로 호송되어 투옥됩니다.
바울의 1차 로마투옥(A.D.61-63년경) 때에 데마는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골 4:14;몬 1:24).
그러나 A.D.66-67년경인 바울의 2차 로마 투옥시기에 데마는
바울을 버리고 세상을 더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돌아갑니다.
시작은 좋았으나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고 바울을 떠났습니다.
왜 떠났을까요?
로마에서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더욱 강력해집니다.
믿고 따르던 바울도 곧 죽게 됩니다.
데마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떠나던가 남아서 함께 죽던가 입니다.
성도님이라면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그는 현실을 잘 보았습니다.
자신의 장래와 형편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안전한 고향으로 가야지요.
누가 도마의 이런 결단을 비난할 수 있습니까?
바울을 섭섭하게 했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데마를 욕하라는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실패를 보고 끝까지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하려고 힘쓰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지 마십시오.
보더라도 사랑까지는 하지 마세요.
주님만 바라 보십시오.
2) 그레스게와 디도입니다.
그레스게와 디도는 바울과 함께했던 동역자입니다.
바울을 가까이서 도우며 어려운 선교사역을 감당해 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힘든 시기에 떠납니다.
그레스게는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파송한 70인 전도단의 일원입니다.
그는 스페인의 남부 갈리아로 보냄을 받아 바울의 복음사역을 이어 갔습니다.
후에 칼케톤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디도는 달마디아(유고슬라비아)로 보내집니다.
디도는 능력이 있고, 담력이 뛰어나고, 성별된 자였습니다.
그는 다투기를 좋아하는 고린도인, 거짓말을 잘하는 그레데인, 싸우기를 잘하는
달마디아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사역을 잘 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왜 이들의 이름을 기록했을까요?
기록을 보면 이들은 데마처럼 도망을 한 것이 아니고 일하러 갔습니다.
바울에게는 바울의 일이 있듯이 이들에게도 감당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들은 잘못하고 틀린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의 우선순위에 대하여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지금껏 곁에 있다가 꼭 지금 떠나야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일을 핑계하며 당면한 교회의 일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맡았으면 끝까지 충성하는 일꾼이 되십시오.(고전 4:2)
필요로 부르시면 언제든지 즉시 순종하는 성도가 되십시오.(의사와 호출기)
2. 유익한자들입니다.
디모데, 누가, 마가입니다.
이들 외에도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지막 사역의 현장에 꼭 필요한 세 사람입니다.
1) 디모데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담당하고 있던 디모데는 바울에게 믿음의 아들로 분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가장 외롭고 힘들 때 누가 보고 싶을까요?
제일 좋아하는 사람 가장 편한 사람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부릅니다.
박성철목사님이 힘들고 어려울 때 생각나는 성도가 되십시오.
목사님이 먼저 찾는 성도가 되십시오.
디모데는 그런 자입니다.(쓰임받는 자의 특징)
2) 누가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의 누가는 바울의 주치의요, 대필자요, 친구였습니다.
지성적인 누가지만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누가는 마게도냐의 빌립보 출신이었을 것입니다.
행 16:10에 의하면, 누가는 드로아 지방에서 처음으로 바울의 전도여행에 참여합니다.
그때부터 바울을 따르면서 그를 돕고 바울의 옥중 생활의 마지막까지 바울의 곁에서 함께했습니다.
여러 질병을 앓고 있었던 바울의 곁에 권위있는 의사가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얼마나 커다란 도움이 되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 누가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바울은 바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가는 스스로 바울의 필요가 되어줌으로 바울이 힘있게 사역을 감당하도록 했습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자원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자기를 드러내며 주장하지 않은 누가와 같이 여러분이 본향교회의 누가가 되십시오.
박성철목사님에게 믿음직한 오른팔이 되십시오.
3) 마가입니다.
마가는 본래 고향이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회는 주로 이 마가의 집에서 모입니다.
골로새서 4장 10절을 보면, 마가와 바나바는 생질관계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보면 마가의 집안은 비교적 유력한 가정으로 추측됩니다.
마가의 집은 기도회를 위해서 제공할 만큼 넓은 장소입니다.
그의 친척 바나바가 밭을 팔아 교회에 바칠 정도라면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마가는 “신앙 좋은 부잣집 아들” 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신앙생활에서 열심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타성적이고 습관적입니다.
그럼에도 마가는 예수님의 활동과 십자가의 수난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마가는 사도들 가운데서 두 사람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13절을 보면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베드로는 마가를 가리켜서 “내 아들 마가”라고 합니다.
마가는 신앙적으로 베드로의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에게 믿음의 아버지는 베드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도 믿음의 아들로 불리는 디모데, 디도, 오네시모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마가도 바나바와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에 따라나섭니다.
전도 여행 중에 마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전도팀을 무단으로 이탈하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제2차 전도여행을 가려고 준비하던 중 바나바가 마가의 동행을 요청합니다.
결국 이 문제로 바나바와 바울은 심하게 다투고 서로가 갈라서게 됩니다.
마가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바울과 다른 길을 갔습니다.
바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바나바, 바울이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끝까지 배려해 주었던 바나바.
그런 바나바와 바울의 관계였지만 마가 때문에 결국 갈라섰습니다.
이런 일로 바울과 마가의 관계는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마가를 가리켜 “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중간의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그동안 마가가 변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의 실수로 바울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마가였습니다.
그런 마가가 바울의 동역자, 사역에 유익하고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지금 바울로부터 청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변화에 기대를 걸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간혹 범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의 일에 유익한 존재로 쓰임을 받게 될 놀라운 가능성을 기대해야 합니다.
보통은 미리 포기합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
그런데 이 말은 달리 생각하면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과거를 보고 현재를 판단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안된다!”고 딱 자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기독교적 신앙은 미래를 보고 현재를 분별합니다.
과거의 버릇과 떡잎이 어떠했든
지금 하나님께 붙들림을 받아서 쓰임 받는 오늘을 중요하게 봅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도전해야 합니다.
변화를 거부하거나 멈추면 안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때를 바라보면서 자기의 사역에 유익한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디모데에게 부탁을 합니다.
이렇게 변화된 마가가 있기에 바울은
마지막까지 로마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흔히 실수합니다.
지난날들은 허물로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오늘 임직하시는 분들도 마가와 같이 새롭게 부르심을 받았으니
필요에 합당하게 쓰임받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바울과 함께 일했던 동역자들을 보면서 꼭 기억하고 싶은 성경 구절을 소개합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을 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교회안에 여러가지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이 온전해지게 하십니다.
또한 각자에게 합당한 봉사의 일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든든하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다양한 각 지체들은
사랑 안에서 서로 연합하여 주님의 인격을 닮은 데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몸에 분쟁이 일어나 보십시오.
손과 발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눈과 입의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망합니다.
우리 온 몸이 효과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온 몸의 일체감이 절대적으로 요청됩니다.
서로 다른 기관들이 합력할 때 우리 몸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가장 적은 부분까지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협동을 통해서 온전하게 전파됩니다.
협동이 무너질 때 교회는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21절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디모데 같은 성도 / 당장에 맡은 일이 있지만 위험이 따르는 부르심에도 즉시 달려오는 성도.
누가 같은 성도 / 지식이 많으나 사역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하고 끝까지 함께 하는 성도.
마가 같은 성도 / 한때 실수했으나 다시 회개하여 돌아와 사명을 감당하여 바울에게 꼭 필요한 자가 된 성도.
데마 같은 성도 / 한때 열심히 주를 섬겼으나 세상을 사랑하여 도망 가버린 성도.
그레스게와 디도 같은 성도 / 자기의 일을 중심으로 사는 성도
이들이 바울을 바울 되게 했습니다.
본향교회의 담임목사를 귀한종으로 쓰임받게 하는 것은 이런 성도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교회 공동체의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한 한 몸의 지체로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복음의 사역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각양의 은사를 통해 직분을 맡겨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서 사역을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이 사랑했던 동역자들, 바울과 함께했던 동역자들과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와 사랑의 형제 관계를 만들어 갑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의 몸된 교회가 든든하게 성장하고,
저와 여러분의 신앙도 은혜와 기쁨 가운데서 더욱 성숙해 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