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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日説教原稿

2022 2022년6월12일, 요한복음 8:2-11(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을 멸시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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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者 박성철
コメント 0件 照会 6,566回 日時 22-06-18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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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일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한 귀한 지체들과 이렇게 고백합시다.


  성도님 ! 성령님은 우리의 믿음과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분이며,

  우리 중심에 반드시 모셔야 할, 참으로 소중한 분입니다.

  우리 속에 성령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은, 모두에게 똑같은 모습으로 임하지는 않습니다.

  성도님 !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복종하는 것이, 성령 충만할 수 있는 길입니다.


  매주 토요일, 朝日新聞에 연재(連載)되는 「悩みのるつぼ」라는,

  사람들의 고민을 듣고 답해주는 코너(corner, コーナー)가 있습니다.

  이 코너에 지난 4월 9일 실렸던 글(상담 내용)을 소개합니다.


  相談内容(상담 내용):

  60代女性です。60대 여성입니다.

  昨年、退職を機に毎週近所のキリスト教会の主日禮拝に通うようになりました。 

  지난해 퇴직을 계기로, 매 주일 가까운 교회에 나가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牧師のお話は新鮮で、新しい聖書の解釈に目を開かれる思いです。

  목사님의 말씀이 신선해서, 새로운 성경 해석에 눈을 뜬 느낌입니다.


  先週の禮拝中に、隣席の、多分60~70代の男性がグラビア雑誌から切り抜いたような

  扇情的な女性の写真を見ていることに気づきました。

  그런데, 지난주 예배 중에, 건너편에 앉은 60~70대 남성이, 잡지에서 오려낸 듯한

  선정적인 여성의 사진을 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私はそれに耐えられず、禮拝の終わった後にできるだけ声を潜めてその男性に、その行為は

  非常に不愉快です、そういったものを教会に持ってこないでくださいと言いました。

  저는 그 사람이 한 행동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예배가 끝난 후, 작은 소리로 그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행위는 매우 불쾌합니다. 그런 것은 교회에 가져오지 마세요 !"

  男性はハッとして、すみません、もうしませんとこちらの目を見て言いました。

  男性はこれ以上話をしたくないというふうに席を立ちました。

  남성은 깜짝 놀라며, "죄송합니다.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급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冷静になって考えると、教会に来る人がみな聖人君子などではないとわかっていますし、

  見て見ぬふりなど大人の対応もできた、その男性は一種の心の病を抱えているかもしれず、

  直接話すのは良くなかった、とも思います。

  사실, 이제 와 냉정히 생각하면,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성인군자 같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고, 또한, 그것을 못 본 척할 수도 있었습니다.

  教会へ行くのをやめるという残念な選択はしたくありません。

  이 일로, 교회 가는 것을 그만두는, 그런 선택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また、自分は正しいと思い上がっているのではないか、

  いったい何に対して怒っているのか、など思いが胸中を駆け巡ります。

  그 남자는 틀렸고 나는 옳다는 우쭐한 마음이었던 것은 아닌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화를 냈던 것인지, 제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러 가지로, 사람들의 등급(等級)을 매깁니다.

  예를 들면, 학생들은 학업성적, 운동능력, 성실도 등에 따라,

  학교와 선생님들로부터 보이지 않게 등급 매김을 당합니다.

  또 어른들은 직장, 직위, 재물, 권력, 집, 경영하는 사업의 크기 등으로,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등급이 매겨지는 것을 느끼며 삽니다.

  물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차별하기 위해 등급을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등급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은혜]와는 반대되는 [경쟁, 등급, 비판] 등이 강조되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참 많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자주 예수님을 대적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붙들려 있었습니다.

  여러분 ! 이들은 왜 이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까요 ?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 싶었습니다.

  당시 그들의 율법지침서였던 산헤드린7:4절에는,

  유부남과 유부녀가 간통하면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약혼한 여인이 타인과 간통을 해도, 즉시 돌로 쳐서 죽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여인을 끌어온 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물었습니다.

  본문5절.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モーセは律法の中で、こういう女を石打ちにするよう私たちに命じています。

  あなたは何と言われますか。)


  그렇다면 여러분 ! 왜 이 질문이 예수님께 함정이 됩니까 ?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만약 예수님께서,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을 경우.


  이럴 경우,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전하셨던,

  복음의 핵심인 ‘용서’와 ‘사랑’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이것 봐 ! 저 예수도 별수가 없잖아 !” “사랑은 무슨 사랑이야 ?!”

  또한, 당시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던 유대인에게는,

  사형을 선고하고나 집행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로 치라는 말은, 곧 로마 정권과의 충돌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씀했다면,

  그들은 분명 예수님을 로마 정부에 고발했을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금지된 판결을 했다고요.


  둘째, 만약 예수님께서, 여인을 돌로 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경우.


  이 경우, 그들은 예수님을, 모세 율법의 권위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사람이라고

  매도(罵倒)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더구나 당시에, 모세의 율법에 대항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여인의 죄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음모(陰謀)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여러분 !

  악한 음모를 꾸민 그들은, 은혜가 아닌 非(비) 은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무서운 세계였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사람, 천국 갈 수 있는 사람의 기준을 정해 놓고,

  자신들을 그 기준을 맞추려고 나름대로 힘을 기울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며,

  또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성전에 나아가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구제도 했습니다.

  그리고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겉으로는 간음하지도 않았고,

  이웃의 것을 탐하지도 않았으며, 거짓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악한 것은, 이런 율법의 행위를 바탕으로,

  자기들보다 낮고,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또 차별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한 기준으로 사람들의 등급을 매겼습니다.

  그리고는 그 기준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가차 없이 비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을 멸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소설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이러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개와 고양이를 한 우리(檻, ケージ)에 두었더니 서로 적응하며 잘 살았습니다.

  다음은 새와 돼지와 염소를 역시 한 우리에 두었더니 잘 살았습니다.

  이번에는 침례교인, 장로교인, 오순절 교인, 성결교 교인을 한 방에 두었더니

  서로 죽이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거룩한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등급을 매기고, 내 편 네 편하며,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할 지체들을, 여러 갈래로 나누고 흩어 버립니다.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쪽에는 온갖 배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다른 지체의 편에게는 작은 실수에도 날카로운 칼을 들이댑니다.

  분명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바라고 소망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非 은혜 세계에 푹 빠져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말씀을 이용해서 연약한 사람들을

  집요하고 잔악하게 괴롭히는 몹시 나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얇디얇은 신앙 지식은 오히려 흉기가 됩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자칫하다가는 놀랍도록 잔혹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럴 수 있습니다.


  소설 ‘노인과 바다’로 널리 알려진 [헤밍웨이]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헤밍웨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우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특히 어머니 그레이스 홀은 철저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헤밍웨이는 어려서부터, 지나치리만큼 엄한 신앙교육을 강조한 어머니와

  항상 마음의 간격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헤밍웨이의 신앙생활은 온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어머니 그레이스 홀은, 헤밍웨이를 격려하기보다는,

  아프고 고통스러운 자극(刺戟)을 가했습니다.

  어느 해, 어머니가 헤밍웨이에게 생일 선물을 보냈는데,

  그 속에는 헤밍웨이의 아버지가 자살한 총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토록 세상에 치우친 삶을 살 바에는, 차라리 목숨을 끊으라는 의미였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헤밍웨이는 더더욱 어머니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말년, 기쁨과 평안함이 없는 삶을 살다가, 결국 사냥총을

  자기 입에 넣고 방아쇠를 당겨,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비극적인 죽음이었습니다.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약한 자 앞에 철저히 잔인했습니다.

  이들은, 간음(姦淫)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인에 대해, 예수님께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본문7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しかし、彼らが問い続けた。)

  아마도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겠지요. “저 여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

 “당장 돌로 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 “즉시 돌로 치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닙니까 ?!”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요구는, 한가운데 팽개쳐 있는 그 여인에게는,

  날카로운 칼날이었고, 커다란 두려움이었습니다.


  한동안 침묵하셨던 예수님께서, 드디어 한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문7절.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あなたがたの中で罪のない者が、まずこの人に石を投げなさい。)


  참으로 엄청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한마디의 말씀은, 자기들의 지은 죄와는 상관없이,

  눈앞에 나타난 여인의 죄로 말미암아, 감상적인 의(義)에 빠졌던 무리에게,

  강력한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인을 고소하던 악한 자들을,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게 하였습니다.


  결국, 어른들은 물론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무서운 기세로 한 여인을 향해 돌을 들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님의 엄한 말씀 앞에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곳에는 예수님과 그 여인만이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엄했지만 따뜻한 음성으로 여인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본문11절 나도 너를 정죄(定罪)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わたしもあなたにさばきを下さない。行きなさい。

  これからは、決して罪を犯してはなりません。)


  그렇습니다. 여러분 !

  예수님은, 비판과 등급, 그리고 자기 의(義)가 가득한 非 은혜의 세상에서,

 [따뜻한 은혜의 세계]로 그녀를 인도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품어서 용서해주시고,

  그 사람을 다시는 죄짓지 않게 하셨습니다.


  본향성도여러분 !

  분명, 이 여인은 결혼 제도 및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습니다.

  분명, 죄인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악성 바이러스입니다.

  이 정도 되었으면 교회에서조차 배척당할 수 있습니다.

  용서받을 어떤 자격도 없습니다.

  죄의 형벌로부터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우리 예수님은 이 여인의 두려움을 아셨습니다.

  이 여인의 절규와 신음과 공포와 절망을 아시고 들으셨습니다.

  비록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하게 그 여인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죄는 지적하셨지만, 그 죄를 지은 여인은 용서하셨습니다.

  여러분 ! 이것이 은혜입니다. 자격이 없는 자가 받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 어떻게 이런 용서가 가능합니까 ?


  그것은, 저와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율법대로 정죄(定罪)하면, 영원히 멸망 받을 무거운 죄인입니다.

  그러나 죄인 된 우리를, 예수님께서 품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본향교회에는, 즉, 우리의 모임에는 이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세계는, 비판과 정죄의 세계가 아니라, 은혜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분입니까 ?

  무조건, 어떤 죄라도, 그 죄를 간단하게 용서하실 수 있는 분입니까 ?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에는, 더욱 깊은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대신해서 돌에 맞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대신해서, 온갖 고통을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피 한 방울 남김없이, 우리의 죄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창에 찔리신 것은, 우리들의 허물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온몸이 상하신 것은, 우리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 옆구리의 창 자국과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우리의 악함 때문입니다.

  예수님 머리의 가시면류관과 얼굴의 피는, 우리의 교만함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용서는, 값싼 동정(同情)이 아니라, 값비싼 은혜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하나님께 대신 용서를 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최고의 비밀]이며, [사랑]이며, [용서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무너뜨리는 분이 아니라, 완전하게 세우신 분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흘린 은혜의 핏방울이 우리에게 뚝뚝 떨어질 때, 우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 은혜를 받아야, 우리가 참으로 변합니다.

  세상 다른 것으로는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뼛속까지 죄에 물든 [골수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용서받을, 그 어떤 방법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에게 낙망할 수밖에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

  십자가에서 뚝뚝 떨어지는 보혈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용서의 은혜가 우리에게 내려온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어떻습니까 ?

  이 은혜를 느끼며 삽니까 ?

  이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


  그렇다면 여러분 !

  왜 저 사람 때문에 안 된다고 합니까 ?

  왜 그 사람 때문에 교회가, 가정이, 사업이, 나라가 안 된다고 말합니까 ?

  왜 남의 탓을 합니까 ?

  왜 다른 사람의 탓을 합니까 ?

  내가 먼저 녹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부터 녹이려고 합니까 ?

  내가 변하면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직장이 변하고, 세상이 변합니다.

  남부터 변화시키려 하면, 이 모든 것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 본향교회를, 은혜가 철철 넘쳐흐르는 그런 교회가 되게 합시다.

  신앙과 물질과 배움과 외모와 열심 등으로, 서로 간에 등급을 매기지 맙시다.

  우리가 예수님도 아닌데 감히 판단하지 맙시다.

  하나님도 아니면서, 함부로 비판하지 맙시다.

  포용해주고, 칭찬해주고, 감싸주고, 격려해주고, 안아주고,

  바로 살도록 사랑으로 본을 보여주는, 그런 교회(우리)가 되게 합시다.


  우리 본향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때, 또한, 우리가 그런 은혜의 성도가 될 때,

  하나님은, 상처로 고통 하는 이 땅의 수많은 이들을, 우리 교회로 보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본향교회에서, 비로소 그들의 영혼은 살아나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이 시간,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로마서2:1-4.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ですから、すべて他人をさばく者よ、あなたに弁解の余地はありません。

     あなたは他人をさばくことで、自分自身にさばきを下しています。

     さばくあなたが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からです。)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そのようなことを行う者たちの上に、真理に基づいて神のさばきが下ることを、

     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そのようなことを行う者たちをさばきながら、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者よ、

     あなたは神のさばきを免れるとでも思っているのですか。)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それとも、神のいつくしみ深さがあなたを悔い改めに導くことも知らないで、

     その豊かないつくしみと忍耐と寛容を軽んじているのですか。)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을 멸시하지 맙시다.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교만하고 악한 우리가, 절대로 되지 맙시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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