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009년1월11일, 열왕기상 17:10-16(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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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계신 복스러운 지체들을 축복합시다.
당신의 성결함과 거룩이, 하나님 안에서 당신의 능력과 힘입니다.
지금 거룩한 곳에서 신을 벗은 당신,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방정식으로 새해를 이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재미있는 퀴즈를 보고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 문제입니다.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가서 변기에 앉았습니다.
소변과 대변 중 어떤 것이 먼저 나올까요 ?"
한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정답일까요 ?
그렇습니다. 정답은 '급한 것부터 나온다'입니다.
여러분은 샤워하실 때의 순서가 어떻습니까 ?
저는 양치질, 머리 샴푸, 몸 샴푸, 면도, 얼굴 세수의 順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순서로 하게 되었고
저도 모르게 이 순서가 저의 고정된 순서가 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삶을 살아감에 있어 여러 부분(일, 공부, 식사, 운동 等等)에
나름대로의 순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 순서를 바꾸면 큰 일 나는 줄 압니다.
그래서 좀처럼, 그 순서를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오늘 본문에는 평소 생각하던 순서를 과감히 바꿔
큰 기적을 체험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도 바꿔야 할 순서가 있지 않는가 생각해보고
그것을 과감히 바꿔 우리들 역시 기적을 이루는 한 해를 살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 선지자와 한 여인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사르밧이라는 마을로 가서 한 과부를 만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빌붙어 살라고 하십니다.
사르밧이 어떤 곳입니까 ?
그곳은 두로와 시돈의 중간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 이스라엘의 왕후가 되어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던 이세벨의 父親이 다스리는 이방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을 떠나 이방인의 땅으로 가서
이방여인의 집에 빌붙어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명령이었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수 없어서
사르밧에 가서 과부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과부를 만나고 보니 그녀의 형편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무엇을 얻어먹을 상황은 더더구나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시작합니다.
본문10절,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器に少 水を持って來て, わたしに飮ませてください")
여인의 입장에서 볼 때, 가뭄이 지속되어 모든 우물이 마른 시점에,
난 데 없이 와서 물을 달라는 것은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근동지역에서는 나그네에게 食水를 대접하는 것은
매우 신성한 일로 여겨졌기에 이 여인은 아끼고 아끼던 물을 가지로 갑니다.
그런데, 물을 가지러 가는 여인을 불러 세워,
엘리야는 설상가상으로 또 한 가지의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본문11절,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 오라"
("パンも一切れ, 手に持って來てください")
이 황당한 말을 들었을 때 과부는 엘리야를 한참 쳐다보았겠지요 ?
이에 여인은 엘리야에게 자신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본문12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쉬운 성경에는 이 부분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나에게는 빵이 없습니다.
항아리에 밀가루가 조금 있고 기름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이 곳에서 땔감을 주워 집에 가져가서 나와 내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을 음식을 준비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즉, 최후의 만찬을 할 것 밖에 없다는 참 슬픈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들었으면 엘리야는 바로 자기 요청을 취소해야지요 ?
그런데도 엘리야는 뻔뻔하게 다시 요청합니다.
본문13절,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쉬운 성경에는 이 부분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집으로 가서 당신이 말한 대로 음식을 준비하시오.
그러나 먼저 조그마한 빵을 만들어서 나에게 가져오시오.
그리고 나서 당신과 당신 아들이 먹을 것을 준비하시오"
결국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했고,
그 결과 그녀 집의 밀가루통과 기름통은 가뭄이 끝나는 약3년 동안,
늘 넉넉히 채워져 있었다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굉장히 유명한 말씀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 이 본문의 내용을 알지 못하시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아주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자 합니다.
그것은 순서를 바꿔 기적을 체험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서론에서, 사람들은 삶을 살아감에 있어 여러 부분(일, 공부, 식사, 운동 等等)에
나름대로의 순서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 !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순서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엘리야가 생각한 순서입니다.
본문13절에 보면, '먼저'와 '후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엘리야의 말 가운데 나오는 말씀인데, 엘리야가 생각한 순서는
여인이 우선 선지자가 먹을 떡을 만들고, 후에 여인과 아들의 떡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둘째, 사르밧 과부가 생각하는 순서입니다.
그녀의 순서는 굶주린 자기 아들을 가장 먼저 먹이고 그 다음에 자기가 먹고,
그리고 혹 남으면 마지막이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느 것이 더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순서입니까 ?
그렇지요. 사르밧 과부의 순서가 훨씬 더 상식적입니다.
당연하지요.
왜요 ?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 모두 본래부터 선지자의 것이 아닌
사르밧 과부의 것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상식적으로 어른보다는 어린이가 먼저 먹어야지요.
같이 어른일 경우에는 당연히 연약한 여인이 먼저지요.
그런데 지금 엘리야 선지자는 그 순서를 뒤집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지금 엘리야가 이런 황당한 요구를 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뜻입니까 ?
아니면 하나님의 뜻입니까 ?
그렇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자기 생각으로 이런 제안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셨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과부의 입장에서는 엘리야가 뻔뻔하고
몰염치한 못된 선지자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 사르밧 여인에게 과감하게 순서를 바꿀 것을
선지자를 통해 촉구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할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기적을 자신의 것을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여인에게 순서를 바꿀 것을 말하면서,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라"(恐れてはならない)하며 용기를 줍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무엇인가 큰 두려움이 이 여인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그 마지막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사랑하는 아들 앞에 다가온 죽음이 두렵습니다.
바로 그 두려움이 순서를 바꾸기 가장 어려운 걸림돌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여인의 두려움은 우리들의 두려움과 일치합니다.
따라서 이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르밧 여인은 선지자의 요구가 아무리 황당하고, 또 비상식적이고,
또 두렵고, 또 이기적인 것으로 보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각한 순서를 버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순서대로 삶의 방향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본문15절을 보십시오.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やもめは行って, エリヤの言葉どおりにした.)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저는 지난주일 말씀을 통해,
우리 하나님은 영적 전쟁의 승리를 행운(lucky)에 맡기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한 승리는 우리의 가진 것에 있지 않고, 聖潔과 거룩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2009년도를 승리하며 살아갈 방법들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아무리 힘들어도 믿음의 자리, 사명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2>아무리 손해 봐도 나누며 베풀며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3>아무리 바빠도 예배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4>아무리 바빠도 거룩한 곳에 나아 와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5>내가 속한 곳에서 신을 벗어, 내가 선 곳을 거룩한 곳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이것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의 삶을 포기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의 사업장과 세상의 삶을 팽개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본문13절에서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恐れてはならない. 歸って, あなたの言ったとおりにしなさい.)
그렇습니다. 누구의 말대로 하라는 것입니까 ?
엘리야의 말입니까 ? 아니지요. 여인의 말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즉, 여인 자신과 아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대신 먼저 선지자의 것을 준비한 다음에 하라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렇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우리에게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먼저 좇는 인생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마태복음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것을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어느 교회를 다닐 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어느 교회든 다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별 차이는 없습니다만
그 중에도 자기와 맞는 교회가 있습니다.
해서 어렵게 교회를 선택해서 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합니다.
한 달 두 달을 다니고, 1년 2년을 다니면서 그 교회는 자기 삶과 불가분의 관계가 됩니다.
그 결과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게 자기 삶에도 타격을 줍니다.
교회가 분쟁에 휘말리고 어려움이 생길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성도들이 받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부흥하고 성령 충만하면 그 복 또한 성도들에게 모두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직접 허락하신 공동체는 가정과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가정처럼 만들고 거기서 행복을 누려야만
인생의 참된 기쁨을 맛 볼 수 있게 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교회생활을 통해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세상의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주시는 기쁨은 참으로 큽니다.
갑자기 웬 교회얘기냐 하실 텐데,
지금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순서를 바꿔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공부하는 지체들에게 지금 학교생활과 교회생활의 순서를 한 번 바꿔보라고
주문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즉 학교생활을 교회생활 하듯이, 교회생활을 학교생활 하듯이 해 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냐 하는 겁니다.
학교 시험기간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무리 놀고 싶어도 전날은 죽어라 공부하지요 ?
또한 강의가 있으면 미리 책을 보고 갑니다. 즉 예습을 합니다.
그냥 들어 갔다간 시간 내내 그냥 앉아 있다 오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그 학교생활을 한 번 교회생활처럼 하듯이 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시험 보는 날인데도 별 준비 없이 터덜터덜 갑니다.
강의시간에 교과서도 노트도 준비하지 않고 빈손으로 그리고 별 기대 없이
수업에 들어갑니다.
더구나 툭하면 강의에 빠집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학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
학기가 끝날 때쯤 학교로부터 귀국하라는 통고를 받을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생활을 학교생활 하듯이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
매일 얼마간이라도 예습과 복습을 합니다. 즉 말씀 읽고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主日 전날이 되면 그야말로 죽어라 준비합니다.
기도를 외우고, 찬양을 부르고, 성경을 읽습니다. 다른 지체에게 전화도 합니다.
헌금도 얼마를 어떻게 드릴까, 안내를 어떻게 설까 미리 준비합니다.
그 主日날 그 성도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
여러분에게 이런 예를 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들이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바로 우리들의 일과 신앙생활의 순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유명한 교부(敎父)인 키프리안은
"'교회는 구원의 방주다'라고 말하면서도
교회를 어머니로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노아 홍수의 때에 방주에 들어가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오늘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교회생활입니다.
교회생활을 통해 행복과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결코 그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우선 기쁨을 얻고, 그것을 신앙생활로 가져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감히 순서를 바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르밧 과부처럼 순서를 바꾸면 죽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감히 우선순위를 바꾸는 그곳에 기적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이 시간 함께 하신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의 일상생활과 믿음생활의 관계는 지금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
만약 순서를 매기라면 무엇이 앞입니까 ?
만약 일상생활이 믿음생활 앞에 있다면
여러분은 사르밧 과부가 가지고 있는 그 두려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순서를 확실히 해 놓지 않는 한,
우리는 평생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해결해야 될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와 나중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두려움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살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먼저와 나중을 바꾼다 해서 우리들에게 별로 잃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새벽기도에 참석하면 당연히 몸이 피곤해집니다.
물론 말씀 읽고 묵상하는 시간만큼 인터넷에 못 들어갑니다.
김치 담그러 교회 다녀왔다가 친구와의 약속시간이 놓쳐 버릴 수 있습니다.
힘껏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면 식탁이 부실해지고, 용돈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명을 맡았으면 신경 쓰이고 그 준비 때문에 주말 리듬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확실히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시지요 ?
일찍 일어나는 게 피곤하긴 하지만 잠을 더 잔다고 그만큼 건강해지지도 않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게 삶을 대폭 풍요롭게 하지는 않습니다.
교회 때문에 이런 저런 시간 뺏기고, 물질에 손해 보는 것은
그게 아니라도 결국은 다 이리저리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주말에 교회 모임이 없다고 쳐도,
그 시간에 우리가 괄목할 만큼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우리들이 정해 놓은 먼저와 나중의 순서가 뒤바뀌어도
우리들은 잃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죽을 것 같아도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고, 약속된 앞날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여러분 ! 결단하십시오. 과감히 순서를 바꾸십시오.
신앙생활을 앞에, 일반생활을 뒤로 두십시오. 교회중심으로 살아 보십시오.
물론 두 가지 모두 열심히 해야합니다.
그러나 두 열심을 과감하게 바꿔 놓으십시오.
그래야 이 위기 속에서 기적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당신의 성결함과 거룩이, 하나님 안에서 당신의 능력과 힘입니다.
지금 거룩한 곳에서 신을 벗은 당신,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방정식으로 새해를 이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재미있는 퀴즈를 보고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 문제입니다.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가서 변기에 앉았습니다.
소변과 대변 중 어떤 것이 먼저 나올까요 ?"
한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정답일까요 ?
그렇습니다. 정답은 '급한 것부터 나온다'입니다.
여러분은 샤워하실 때의 순서가 어떻습니까 ?
저는 양치질, 머리 샴푸, 몸 샴푸, 면도, 얼굴 세수의 順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순서로 하게 되었고
저도 모르게 이 순서가 저의 고정된 순서가 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삶을 살아감에 있어 여러 부분(일, 공부, 식사, 운동 等等)에
나름대로의 순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 순서를 바꾸면 큰 일 나는 줄 압니다.
그래서 좀처럼, 그 순서를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오늘 본문에는 평소 생각하던 순서를 과감히 바꿔
큰 기적을 체험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도 바꿔야 할 순서가 있지 않는가 생각해보고
그것을 과감히 바꿔 우리들 역시 기적을 이루는 한 해를 살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 선지자와 한 여인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사르밧이라는 마을로 가서 한 과부를 만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빌붙어 살라고 하십니다.
사르밧이 어떤 곳입니까 ?
그곳은 두로와 시돈의 중간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 이스라엘의 왕후가 되어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던 이세벨의 父親이 다스리는 이방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을 떠나 이방인의 땅으로 가서
이방여인의 집에 빌붙어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명령이었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수 없어서
사르밧에 가서 과부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과부를 만나고 보니 그녀의 형편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무엇을 얻어먹을 상황은 더더구나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시작합니다.
본문10절,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器に少 水を持って來て, わたしに飮ませてください")
여인의 입장에서 볼 때, 가뭄이 지속되어 모든 우물이 마른 시점에,
난 데 없이 와서 물을 달라는 것은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근동지역에서는 나그네에게 食水를 대접하는 것은
매우 신성한 일로 여겨졌기에 이 여인은 아끼고 아끼던 물을 가지로 갑니다.
그런데, 물을 가지러 가는 여인을 불러 세워,
엘리야는 설상가상으로 또 한 가지의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본문11절,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 오라"
("パンも一切れ, 手に持って來てください")
이 황당한 말을 들었을 때 과부는 엘리야를 한참 쳐다보았겠지요 ?
이에 여인은 엘리야에게 자신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본문12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쉬운 성경에는 이 부분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나에게는 빵이 없습니다.
항아리에 밀가루가 조금 있고 기름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이 곳에서 땔감을 주워 집에 가져가서 나와 내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을 음식을 준비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즉, 최후의 만찬을 할 것 밖에 없다는 참 슬픈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들었으면 엘리야는 바로 자기 요청을 취소해야지요 ?
그런데도 엘리야는 뻔뻔하게 다시 요청합니다.
본문13절,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쉬운 성경에는 이 부분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집으로 가서 당신이 말한 대로 음식을 준비하시오.
그러나 먼저 조그마한 빵을 만들어서 나에게 가져오시오.
그리고 나서 당신과 당신 아들이 먹을 것을 준비하시오"
결국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했고,
그 결과 그녀 집의 밀가루통과 기름통은 가뭄이 끝나는 약3년 동안,
늘 넉넉히 채워져 있었다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굉장히 유명한 말씀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 이 본문의 내용을 알지 못하시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아주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자 합니다.
그것은 순서를 바꿔 기적을 체험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서론에서, 사람들은 삶을 살아감에 있어 여러 부분(일, 공부, 식사, 운동 等等)에
나름대로의 순서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 !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순서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엘리야가 생각한 순서입니다.
본문13절에 보면, '먼저'와 '후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엘리야의 말 가운데 나오는 말씀인데, 엘리야가 생각한 순서는
여인이 우선 선지자가 먹을 떡을 만들고, 후에 여인과 아들의 떡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둘째, 사르밧 과부가 생각하는 순서입니다.
그녀의 순서는 굶주린 자기 아들을 가장 먼저 먹이고 그 다음에 자기가 먹고,
그리고 혹 남으면 마지막이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느 것이 더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순서입니까 ?
그렇지요. 사르밧 과부의 순서가 훨씬 더 상식적입니다.
당연하지요.
왜요 ?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 모두 본래부터 선지자의 것이 아닌
사르밧 과부의 것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상식적으로 어른보다는 어린이가 먼저 먹어야지요.
같이 어른일 경우에는 당연히 연약한 여인이 먼저지요.
그런데 지금 엘리야 선지자는 그 순서를 뒤집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지금 엘리야가 이런 황당한 요구를 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뜻입니까 ?
아니면 하나님의 뜻입니까 ?
그렇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자기 생각으로 이런 제안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셨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과부의 입장에서는 엘리야가 뻔뻔하고
몰염치한 못된 선지자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 사르밧 여인에게 과감하게 순서를 바꿀 것을
선지자를 통해 촉구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할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기적을 자신의 것을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여인에게 순서를 바꿀 것을 말하면서,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라"(恐れてはならない)하며 용기를 줍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무엇인가 큰 두려움이 이 여인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그 마지막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사랑하는 아들 앞에 다가온 죽음이 두렵습니다.
바로 그 두려움이 순서를 바꾸기 가장 어려운 걸림돌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여인의 두려움은 우리들의 두려움과 일치합니다.
따라서 이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르밧 여인은 선지자의 요구가 아무리 황당하고, 또 비상식적이고,
또 두렵고, 또 이기적인 것으로 보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각한 순서를 버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순서대로 삶의 방향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본문15절을 보십시오.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やもめは行って, エリヤの言葉どおりにした.)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저는 지난주일 말씀을 통해,
우리 하나님은 영적 전쟁의 승리를 행운(lucky)에 맡기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한 승리는 우리의 가진 것에 있지 않고, 聖潔과 거룩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2009년도를 승리하며 살아갈 방법들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아무리 힘들어도 믿음의 자리, 사명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2>아무리 손해 봐도 나누며 베풀며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3>아무리 바빠도 예배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4>아무리 바빠도 거룩한 곳에 나아 와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5>내가 속한 곳에서 신을 벗어, 내가 선 곳을 거룩한 곳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이것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의 삶을 포기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의 사업장과 세상의 삶을 팽개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본문13절에서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恐れてはならない. 歸って, あなたの言ったとおりにしなさい.)
그렇습니다. 누구의 말대로 하라는 것입니까 ?
엘리야의 말입니까 ? 아니지요. 여인의 말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즉, 여인 자신과 아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대신 먼저 선지자의 것을 준비한 다음에 하라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렇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우리에게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먼저 좇는 인생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마태복음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것을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어느 교회를 다닐 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어느 교회든 다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별 차이는 없습니다만
그 중에도 자기와 맞는 교회가 있습니다.
해서 어렵게 교회를 선택해서 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합니다.
한 달 두 달을 다니고, 1년 2년을 다니면서 그 교회는 자기 삶과 불가분의 관계가 됩니다.
그 결과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게 자기 삶에도 타격을 줍니다.
교회가 분쟁에 휘말리고 어려움이 생길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성도들이 받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부흥하고 성령 충만하면 그 복 또한 성도들에게 모두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직접 허락하신 공동체는 가정과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가정처럼 만들고 거기서 행복을 누려야만
인생의 참된 기쁨을 맛 볼 수 있게 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교회생활을 통해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세상의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주시는 기쁨은 참으로 큽니다.
갑자기 웬 교회얘기냐 하실 텐데,
지금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순서를 바꿔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공부하는 지체들에게 지금 학교생활과 교회생활의 순서를 한 번 바꿔보라고
주문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즉 학교생활을 교회생활 하듯이, 교회생활을 학교생활 하듯이 해 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냐 하는 겁니다.
학교 시험기간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무리 놀고 싶어도 전날은 죽어라 공부하지요 ?
또한 강의가 있으면 미리 책을 보고 갑니다. 즉 예습을 합니다.
그냥 들어 갔다간 시간 내내 그냥 앉아 있다 오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그 학교생활을 한 번 교회생활처럼 하듯이 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시험 보는 날인데도 별 준비 없이 터덜터덜 갑니다.
강의시간에 교과서도 노트도 준비하지 않고 빈손으로 그리고 별 기대 없이
수업에 들어갑니다.
더구나 툭하면 강의에 빠집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학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
학기가 끝날 때쯤 학교로부터 귀국하라는 통고를 받을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생활을 학교생활 하듯이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
매일 얼마간이라도 예습과 복습을 합니다. 즉 말씀 읽고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主日 전날이 되면 그야말로 죽어라 준비합니다.
기도를 외우고, 찬양을 부르고, 성경을 읽습니다. 다른 지체에게 전화도 합니다.
헌금도 얼마를 어떻게 드릴까, 안내를 어떻게 설까 미리 준비합니다.
그 主日날 그 성도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
여러분에게 이런 예를 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들이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바로 우리들의 일과 신앙생활의 순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유명한 교부(敎父)인 키프리안은
"'교회는 구원의 방주다'라고 말하면서도
교회를 어머니로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노아 홍수의 때에 방주에 들어가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오늘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교회생활입니다.
교회생활을 통해 행복과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결코 그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우선 기쁨을 얻고, 그것을 신앙생활로 가져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감히 순서를 바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르밧 과부처럼 순서를 바꾸면 죽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감히 우선순위를 바꾸는 그곳에 기적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이 시간 함께 하신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의 일상생활과 믿음생활의 관계는 지금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
만약 순서를 매기라면 무엇이 앞입니까 ?
만약 일상생활이 믿음생활 앞에 있다면
여러분은 사르밧 과부가 가지고 있는 그 두려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순서를 확실히 해 놓지 않는 한,
우리는 평생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해결해야 될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와 나중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두려움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살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먼저와 나중을 바꾼다 해서 우리들에게 별로 잃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새벽기도에 참석하면 당연히 몸이 피곤해집니다.
물론 말씀 읽고 묵상하는 시간만큼 인터넷에 못 들어갑니다.
김치 담그러 교회 다녀왔다가 친구와의 약속시간이 놓쳐 버릴 수 있습니다.
힘껏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면 식탁이 부실해지고, 용돈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명을 맡았으면 신경 쓰이고 그 준비 때문에 주말 리듬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확실히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시지요 ?
일찍 일어나는 게 피곤하긴 하지만 잠을 더 잔다고 그만큼 건강해지지도 않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게 삶을 대폭 풍요롭게 하지는 않습니다.
교회 때문에 이런 저런 시간 뺏기고, 물질에 손해 보는 것은
그게 아니라도 결국은 다 이리저리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주말에 교회 모임이 없다고 쳐도,
그 시간에 우리가 괄목할 만큼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우리들이 정해 놓은 먼저와 나중의 순서가 뒤바뀌어도
우리들은 잃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죽을 것 같아도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고, 약속된 앞날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여러분 ! 결단하십시오. 과감히 순서를 바꾸십시오.
신앙생활을 앞에, 일반생활을 뒤로 두십시오. 교회중심으로 살아 보십시오.
물론 두 가지 모두 열심히 해야합니다.
그러나 두 열심을 과감하게 바꿔 놓으십시오.
그래야 이 위기 속에서 기적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