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009년4월5일, 마가복음1:35-37(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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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계신 복스러운 지체들에게 이렇게 고백합시다.
십자가는 내가 당할 고통과 수치를 主께서 대신 당한 은혜의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범죄 중에 가장 악한 범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살인, 강도, 사기, 마약, ......
1991년1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에서 놀던 9살의 남자 어린이가
유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어린이를 유괴한 범인은 아이를 잃어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엄청난 돈을 요구합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아이의 부모는 아들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경찰의 도움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경찰에 연락합니다.
경찰은 전담형사를 배치하고 유괴 당한 어린이의 아파트 지하에 비밀수사본부를
설치하여 과학수사를 표방하지만
범인은 그런 경찰을 놀리기라도 하듯 수사망을 빠져나갑니다.
그리고는 집요한 협박전화로 부모에게 자신의 요구를 전달합니다.
범인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협박 전화 속의 목소리 뿐,
감정도 없는 듯 소름끼치게 냉정한 범인의 목소리에 끌려
아들의 생사도 모르는 채 부모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부모에게 있었던 유일한 희망은
범인의 협박전화 가운데 들려 오는 아들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녹음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아이는 유괴된 후 44일만에 손이 묶여 지고
입과 눈이 테이프로 막아진 채 잔혹하게 살해된 모습으로
잠실대교 부근 한강 고수부지에서 발견됩니다.
부검결과 아이는 유괴당일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후 벌써 18년이 지났지만 아직 범인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한국과 한국의 많은 부모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
약 2년 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내용 때문에 한국 교회는 다시 한 번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영화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조롱하고 믿음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다양한 모습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심방대원들이 어린 아들을 유괴 당한 가정에 심방을 갑니다.
"고난과 시련 중에도 감사합시다"라는 처한 상황에 약간은 어울리지 않는
목사님의 위로의 말에 아버지는 분노합니다.
"시련과 고난이 감사하다고요 ?"
"나가세요. 오늘부터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어요 !"
여기에서 기독교는 아픔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지 못하는 종교로 취급당하고.
결국은 아픔을 당한 사람들로부터 쫓겨나는 종교가 되고 맙니다.
영화의 또 다른 장면에서, 벽에 걸어놓은 십자가는 내동댕이쳐져 부러지고
목에건 십자가 목걸이는 뜯겨져 던져지고 맙니다.
또한 대표적인 이단(異端)인 시한부 종말론도 등장합니다.
이것을 통해 기독교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현실 도피적인 종교로 취급당하고 맙니다.
마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조롱과 비웃음, 침 뱉음 당함과 채찍질
그리고 결국은 버림받아 십자가에 처참히 못 박혀 죽으신 것처럼,
기독교는 심한 모욕을 당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
예수께서는 속옷까지 벗김 당하는 수치를 당하시고,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최후에는 십자가 형틀에서 죽으셨지만,
결국에는 다시 살아나 영광을 얻으신 줄 믿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모욕하고 죽인 자들이 불과 2개월이 지나지 않았을 때,
마음에 찔림을 받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사도행전2:37)
그들은 회개했고, 후회했으며,
하루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3천 명, 5천 명이 될 정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날의 교회 역시 이제는 예수님처럼 부활해야 합니다.
분명 오늘날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십자가의 희생이 사라져 가고, 섬김이 사라져 가며,
더구나 교회 안에서 예수님이 사라져 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2:20-23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에 헬라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온 장면이 기록됩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여기 찾아온 사람들은 헬라 에데사 왕국에서 온
장관들이라 합니다.
에데사 왕국의 왕자가 중병에 들었는데,
그들에게 이스라엘 나라의 예수란 분을 만나게 되면 틀림없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신하들 몇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과 면담을 요청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빌립을 만나 예수님을 만날 것을 청합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요한복음12:21)
이러한 그들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를 만나 자신들이 안고 온 문제도 해결하고,
또 예수님의 교훈도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비슷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본문37절, "모든 사람이 主를 찾나이다"
그런데 여러분 !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모든 사람이 主를 찾나이다"는 이 말씀은
비록 2천 년 전 헬라인들과 유대인들만의 소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죄 때문에 번뇌하는 모든 인류의 소원이요,
참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하고 빛을 잃은 수많은 생명들의 간절한 절규입니다.
더구나 인생의 고통을 끌어안고 아파하는 모든 사람의 아우성입니다.
지금 세상은 교회를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에게 예수의 사랑, 예수의 능력을 보여달라 !"
"교회의 교회다움을 보여달라 !"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인도네시아에서 한 청년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빌리 목사님의 말씀을 한참이나 듣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청년이
갑자기 눈을 뜨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를 보고 예수를 믿겠습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찌 인도네시아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
그러나 생활 속에서 예수의 향기를 풍기며,
삶의 모든 부분들을 통해 불신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희생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얼마 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지만,
만약 이 땅의 영혼들이 우리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오.
그러면 내가 예수를 믿겠소 !"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예수님처럼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요한복음14:8, "주여 아버지(하나님)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足하겠나이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4:9, "나를 본 자는 아버지(하나님)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한복음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 교회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여달라고 요구해 왔을 때,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나를 본 자는 예수를 본 것과 같다",
"내 삶을 보고 예수를 알아 보라"고
자신 있게 확신에 찬 음성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우리들 역시 비웃음과 조롱함을 당할 것입니다.
더구나 교회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2:13-16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여러분 !
인자하신 예수님께서 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그 안에 있던 소와 양과 비둘기
그리고 장사꾼들을 내어 쫓으셨습니까 ?
그것은 거룩해야 하는 성전이 이익과 탐욕의 현장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어떻습니까 ?
거룩함을 간직하고, 세상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세속과, 이익과,
탐욕을 막아내고 있습니까 ?
아니면, 교회 역시 세상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까 ?
우리는 교회 부흥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여러분, 참된 부흥이 무엇입니까 ?
예배드리는 성도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부흥입니까 ?
만약 그렇다면, 양적으로 놀라운 부흥을 이룬 한국교회가
왜 그토록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습니까 ?
그것은 교회가 더 이상 교회가 아닌 시장(市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이익과 탐욕과 교만의 냄새가 아닌,
섬김과 희생과 십자가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신자들이 교회를 몰라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요
교회를 너무나 잘 알아서 믿지 않는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 본향 교회를 예수님이 主人되시는 교회로 만듭시다.
본향 교회에서 예수님의 향기, 십자가의 향기, 희생의 향기만이 넘치게 합시다.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 모두 한 가지 이상씩 세속적인 것들을 교회로부터,
그리고 우리들로부터 버리며 십자가를 향해 나아갑시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빼앗겨 버린 하나님의 자녀들을 되찾기 위해
십자가 죽음을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디디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소개한 유괴 사건과 연관시켜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유괴 당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괴범(사단)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한
최후의 방법을 행하신 날입니다.
중국 진나라 때 일입니다.
환온이라는 장수가 촉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양쯔강 중류의 협곡인 삼협이라는 곳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병사가 아기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왔습니다.
그러자 원숭이 어미는 아기 원숭이가 잡혀간 배를 쫓아
백여 리를 뒤따라오며 슬피 울었습니다.
배가 강어귀가 좁아지는 곳에 이를 즈음,
어미 원숭이는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미 원숭이는 배에 오르자마자 죽고 말았습니다.
병사들이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가르자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답니다.
자식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애를 태우다가 창자가 끊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단장(斷腸)의 슬픔, 단장의 아픔, 가슴앓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유괴 당한 자신의 자녀들을 바로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렇습니다.
더구나 거룩해야 할 교회,
세계 열방을 살릴 우리의 교회들이
그 귀한 사명을 잃고 소금도 되지 못하고 빛도 되지 못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침 뱉음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수치를 당할 때, 우리 하나님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이번 주간,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교회다움, 성도다움,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마음껏 드러냅시다.
그것은 거룩이요, 희생이요, 섬김이요, 사랑입니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합니다.
"우리에게 예수의 사랑, 예수의 능력을 보여달라 !"
"교회의 교회다움을 보여달라 !"
그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하나님)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여기 모인 모든 성도들이 이런 능력이 넘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함을 드립니다.
할렐루야 !
십자가는 내가 당할 고통과 수치를 主께서 대신 당한 은혜의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범죄 중에 가장 악한 범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살인, 강도, 사기, 마약, ......
1991년1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에서 놀던 9살의 남자 어린이가
유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어린이를 유괴한 범인은 아이를 잃어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엄청난 돈을 요구합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아이의 부모는 아들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경찰의 도움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경찰에 연락합니다.
경찰은 전담형사를 배치하고 유괴 당한 어린이의 아파트 지하에 비밀수사본부를
설치하여 과학수사를 표방하지만
범인은 그런 경찰을 놀리기라도 하듯 수사망을 빠져나갑니다.
그리고는 집요한 협박전화로 부모에게 자신의 요구를 전달합니다.
범인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협박 전화 속의 목소리 뿐,
감정도 없는 듯 소름끼치게 냉정한 범인의 목소리에 끌려
아들의 생사도 모르는 채 부모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부모에게 있었던 유일한 희망은
범인의 협박전화 가운데 들려 오는 아들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녹음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아이는 유괴된 후 44일만에 손이 묶여 지고
입과 눈이 테이프로 막아진 채 잔혹하게 살해된 모습으로
잠실대교 부근 한강 고수부지에서 발견됩니다.
부검결과 아이는 유괴당일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후 벌써 18년이 지났지만 아직 범인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한국과 한국의 많은 부모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
약 2년 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내용 때문에 한국 교회는 다시 한 번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영화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조롱하고 믿음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다양한 모습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심방대원들이 어린 아들을 유괴 당한 가정에 심방을 갑니다.
"고난과 시련 중에도 감사합시다"라는 처한 상황에 약간은 어울리지 않는
목사님의 위로의 말에 아버지는 분노합니다.
"시련과 고난이 감사하다고요 ?"
"나가세요. 오늘부터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어요 !"
여기에서 기독교는 아픔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지 못하는 종교로 취급당하고.
결국은 아픔을 당한 사람들로부터 쫓겨나는 종교가 되고 맙니다.
영화의 또 다른 장면에서, 벽에 걸어놓은 십자가는 내동댕이쳐져 부러지고
목에건 십자가 목걸이는 뜯겨져 던져지고 맙니다.
또한 대표적인 이단(異端)인 시한부 종말론도 등장합니다.
이것을 통해 기독교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현실 도피적인 종교로 취급당하고 맙니다.
마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조롱과 비웃음, 침 뱉음 당함과 채찍질
그리고 결국은 버림받아 십자가에 처참히 못 박혀 죽으신 것처럼,
기독교는 심한 모욕을 당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
예수께서는 속옷까지 벗김 당하는 수치를 당하시고,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최후에는 십자가 형틀에서 죽으셨지만,
결국에는 다시 살아나 영광을 얻으신 줄 믿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모욕하고 죽인 자들이 불과 2개월이 지나지 않았을 때,
마음에 찔림을 받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사도행전2:37)
그들은 회개했고, 후회했으며,
하루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3천 명, 5천 명이 될 정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날의 교회 역시 이제는 예수님처럼 부활해야 합니다.
분명 오늘날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십자가의 희생이 사라져 가고, 섬김이 사라져 가며,
더구나 교회 안에서 예수님이 사라져 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2:20-23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에 헬라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온 장면이 기록됩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여기 찾아온 사람들은 헬라 에데사 왕국에서 온
장관들이라 합니다.
에데사 왕국의 왕자가 중병에 들었는데,
그들에게 이스라엘 나라의 예수란 분을 만나게 되면 틀림없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신하들 몇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과 면담을 요청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빌립을 만나 예수님을 만날 것을 청합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요한복음12:21)
이러한 그들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를 만나 자신들이 안고 온 문제도 해결하고,
또 예수님의 교훈도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비슷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본문37절, "모든 사람이 主를 찾나이다"
그런데 여러분 !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모든 사람이 主를 찾나이다"는 이 말씀은
비록 2천 년 전 헬라인들과 유대인들만의 소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죄 때문에 번뇌하는 모든 인류의 소원이요,
참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하고 빛을 잃은 수많은 생명들의 간절한 절규입니다.
더구나 인생의 고통을 끌어안고 아파하는 모든 사람의 아우성입니다.
지금 세상은 교회를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에게 예수의 사랑, 예수의 능력을 보여달라 !"
"교회의 교회다움을 보여달라 !"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인도네시아에서 한 청년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빌리 목사님의 말씀을 한참이나 듣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청년이
갑자기 눈을 뜨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를 보고 예수를 믿겠습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찌 인도네시아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
그러나 생활 속에서 예수의 향기를 풍기며,
삶의 모든 부분들을 통해 불신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희생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얼마 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지만,
만약 이 땅의 영혼들이 우리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오.
그러면 내가 예수를 믿겠소 !"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예수님처럼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요한복음14:8, "주여 아버지(하나님)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足하겠나이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4:9, "나를 본 자는 아버지(하나님)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한복음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 교회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여달라고 요구해 왔을 때,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나를 본 자는 예수를 본 것과 같다",
"내 삶을 보고 예수를 알아 보라"고
자신 있게 확신에 찬 음성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우리들 역시 비웃음과 조롱함을 당할 것입니다.
더구나 교회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2:13-16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여러분 !
인자하신 예수님께서 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그 안에 있던 소와 양과 비둘기
그리고 장사꾼들을 내어 쫓으셨습니까 ?
그것은 거룩해야 하는 성전이 이익과 탐욕의 현장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어떻습니까 ?
거룩함을 간직하고, 세상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세속과, 이익과,
탐욕을 막아내고 있습니까 ?
아니면, 교회 역시 세상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까 ?
우리는 교회 부흥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여러분, 참된 부흥이 무엇입니까 ?
예배드리는 성도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부흥입니까 ?
만약 그렇다면, 양적으로 놀라운 부흥을 이룬 한국교회가
왜 그토록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습니까 ?
그것은 교회가 더 이상 교회가 아닌 시장(市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이익과 탐욕과 교만의 냄새가 아닌,
섬김과 희생과 십자가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신자들이 교회를 몰라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요
교회를 너무나 잘 알아서 믿지 않는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 본향 교회를 예수님이 主人되시는 교회로 만듭시다.
본향 교회에서 예수님의 향기, 십자가의 향기, 희생의 향기만이 넘치게 합시다.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 모두 한 가지 이상씩 세속적인 것들을 교회로부터,
그리고 우리들로부터 버리며 십자가를 향해 나아갑시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빼앗겨 버린 하나님의 자녀들을 되찾기 위해
십자가 죽음을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디디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소개한 유괴 사건과 연관시켜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유괴 당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괴범(사단)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한
최후의 방법을 행하신 날입니다.
중국 진나라 때 일입니다.
환온이라는 장수가 촉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양쯔강 중류의 협곡인 삼협이라는 곳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병사가 아기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왔습니다.
그러자 원숭이 어미는 아기 원숭이가 잡혀간 배를 쫓아
백여 리를 뒤따라오며 슬피 울었습니다.
배가 강어귀가 좁아지는 곳에 이를 즈음,
어미 원숭이는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미 원숭이는 배에 오르자마자 죽고 말았습니다.
병사들이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가르자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답니다.
자식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애를 태우다가 창자가 끊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단장(斷腸)의 슬픔, 단장의 아픔, 가슴앓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유괴 당한 자신의 자녀들을 바로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렇습니다.
더구나 거룩해야 할 교회,
세계 열방을 살릴 우리의 교회들이
그 귀한 사명을 잃고 소금도 되지 못하고 빛도 되지 못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침 뱉음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수치를 당할 때, 우리 하나님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이번 주간,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교회다움, 성도다움,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마음껏 드러냅시다.
그것은 거룩이요, 희생이요, 섬김이요, 사랑입니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합니다.
"우리에게 예수의 사랑, 예수의 능력을 보여달라 !"
"교회의 교회다움을 보여달라 !"
그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하나님)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여기 모인 모든 성도들이 이런 능력이 넘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함을 드립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