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009년3월29일, 요한복음19:23-30(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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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계신 복스러운 지체들을 축복합시다.
당신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되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당신을 점점 풍성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미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한 번은 그 어려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설명하라는
물리학 교수의 과제를 받고 그것을 동료 생도들 앞에서 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봐도, 교수님이 봐도 너무나 완벽하고 알기 쉽게 잘 설명을 했습니다.
크게 감동을 받은 교수님이 맥아더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이토록 어려운 이론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
그때 맥아더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이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책에 있는 내용을 다 외워서 그 외운 것을 발표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우리 신앙의 문제도 때로는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당장은 믿어지지 않더라도 열심히 듣고, 자주 묵상하고,
또 기도하면 언젠가는 정말 마음으로 믿어질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
"왜 ! 왜 !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는가 ?"
"십자가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인가 ?"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 죽음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하나님은 죄를 매우 싫어하십니다. 더구나 죄에 대해서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꼭 벌하십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문제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모든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로마서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의 징벌뿐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지은 죄를 씻음 받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죄는 어떻게 씻음 받을 수 있을까요 ?
히브리서9:22, ".......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피, 즉 죽음으로써 죄를 씻음 받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때에는 사람들이 죄를 짓게 되면,
자신을 대신해서 소나 양 等을 죽여 그 피를 하나님께 제사로 드림으로
죄를 씻음 받았습니다. 피 흘림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는 완전한 제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었으면 사람이 제물이 되어야지요.
그런데 왜 동물이 제물이 됩니까 ?
더구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도 죄인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제물에 불완전한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제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이 제사는 죄를 질 때마다 매번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습니까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놀라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선, 동물이 아닌 완전한 희생제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제물을 처참하게 죽이셨습니다.
그 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 제사를 치른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다시는 죄를 씻기 위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죄인 된 나를 위한 희생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의 신앙상태를 측정하는 기준은 바로 여기,
십자가의 은혜를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십자가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시간 함께 하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여러분의 신앙이 십자가에서 출발하고 있습니까 ?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더 알고 싶고,
예수님께 좀 더 가까이 가고싶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갈증이 있습니까 ?
만약에 우리들에게 그런 갈증이 있다면
우리들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바른 곳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마음 속에 이 십자가의 은혜가 전혀 생소한 것으로 느껴진다면
저는 여러분께 강하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자리를 빨리 갈보리 동산으로 옮기십시오.
혹, 여러분들이 부활의 동산에 서서,
죄와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 때문에 흥분하고 소리지르고,
할렐루야 찬송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십자가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
빨리 갈보리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혹, 여러분이 성령의 다락방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사와 감동을 받은 사람일지라도,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면 빨리 거기서 나와 겟세마네 동산으로 와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오, 주여 !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십자가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다시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만큼 십자가는 모든 은혜의 샘이요, 복음의 핵심이요,
복음의 시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 찬 다섯 사람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사도 요한입니다.
2천 년 전, 십자가 앞에 선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혹은 예수님이 죽는 것을 구경하러 나왔지만,
이 다섯 사람만큼은 예수님을 진정 사랑해서 십자가 앞에 온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라고 로마 군병이 무섭지 않았을까요 ?
이 사람들에게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무섭지 않았을까요 ?
그러나 이들은 어떤 해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 앞에 나와왔습니다.
이들은 예수와 함께 있고 싶어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십자가와 그곳에 달린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에
평생 십자가의 은혜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 예수님을 절대 배반하지 않는 인생을 살 았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지금 사순절 기간을 맞이하여, 우리도 십자가 밑에 나아갑시다.
두 주간 남은 사순절 기간,
가능한 한 매일 예배당을 찾아 사복음서 고난의 장을 읽으면서 십자가를 되돌아봅시다.
분명 우리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들에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자 ! 그렇다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어떤 은혜의 자리일까요 ?
첫째, 십자가는 내가 당할 고통을 主가 대신 당한 은혜의 자리입니다.
내 죄 때문에 내가 당할 고통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 시간 죄 가운데 있습니다.
형제를 미워합니다. 이웃을 속입니다. 사명 앞에 게으릅니다.
심지어 사명을 팽개칩니다.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이 모든 죄악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합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이 저지른 죄 값을 그대로 받는다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옥불의 고통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대신 주님이 짊어져 주신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말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LA에 갔을 때, 그곳에서 오래 살았던 목사님 한 분이
꼭 보여 줄 것이 있다면서 어떤 장소로 데리고 가셨다고 합니다.
거기는 어떤 곳이었냐 하면, 중세 스페인의 카톨릭 교회가
당시 개신교 신자들을 잡아다가 엄청난 고문을 했는데,
그 때 사용했던 고문도구들을 진열해 놓은 곳이었답니다.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몇 백년 전 사건인데, 아마 모조품을 전시해 놨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까 진품이었습니다.
고문 도구를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그 옆에 써 있는 설명문을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세상에 인간이 이렇게 잔인해 질 수 있을까 ?" "이건 사람도 아니다. 악마다 악마 !"
그곳에는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사타구니 사이를 켜서 죽이는 데 쓰이는 톱이
몇 개 걸려 있었고,
사람을 끌어다가 기계 속에 넣으면 국수 가락처럼 되어서 나오도록 만든
소름끼치는 기계도 있었답니다.
또 사람을 집어넣고 자물통을 채우면 꼼짝달싹도 못한 채,
고스란히 말라죽어 뼈다귀만 남게 만드는 기계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아무리 이런 고문 도구들이 잔인하고 흉측하다 한들,
멀쩡한 사람을 십자가 틀에다가 눕혀 놓고
손발에 철 못을 박는 것만큼 잔인할 수 있을까요 ?
톱으로 켬을 당해 죽는 것은 고작 5분이나 10분 정도 고통을 당하다 보면
기절해서 그대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은 절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죽음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 게 십자가 죽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통은 지구상의 있었던 형벌 중 가장 잔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십자가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편22:14-15,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꿀의 찌꺼기를 끓여 만든 기름)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わたしは水となって注ぎ出され,骨はことごとくはずれ,
心は胸の中で蠟のように溶ける. 口は渴いて素燒きのかけらとなり,
舌は上顎にはり付く.)
온 몸이 촛농처럼 흘러내린 고통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상상조차 해 볼 수 없는 고통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
그것은 내가 받을 고통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사야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彼が刺し貫かれたのは, わたしたちの背きのためであり,
彼が打ち碎かれたのは,わたしたちの咎のためであった. 彼の受けた懲らしめによって,
わたしたちに平和が與えられ,彼の受けた傷によって, わたしたちはいやされた.)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찔렸습니까 ?
예수님이 왜 상했습니까 ?
예수님이 왜 징계를 받았습니까 ?
그것은 나의 허물, 나의 죄악, 내가 받을 고통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어떻게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기를 소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를 우러러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둘째, 십자가는 나의 수치를 대신 담당해 주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본문23절,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兵士たちは, イエスを十字架につけてから, その服を取り, 四つに分け,
各自に一つずつ渡るようにした. 下着も取った.)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다음에 예수님의 옷을 벗겨 나눠 가졌습니다.
또한 속옷까지도 벗겨 버렸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 당하신 길을 따라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을 당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침이 흐르고, 수 차례 뺨을 맞고, 머리를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온 몸이 완전히 빨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몸에 아무 것도 걸칠 수 없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22:6-8,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참혹한 수치를 친히 당하셔야 했습니까 ?
그 이유는 죄는 반드시 수치를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자마자 금방 부끄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나뭇잎을 엮어서 하체를 가렸습니다.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다 줍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우리가 우리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천국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아무리 초청하셔도,
우리는 천국에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왜 못 들어갑니까 ? 부끄러워서 못 들어갑니다.
우리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 억지로 천국 안에 넣어 놓는다면, 사흘 안에 미쳐버릴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누더기 옷을 입고, 엄청난 냄새를 풍기며, 머리는 다 헝클어진 가운데,
깨끗하고 멋진 사람들이 가득한 일류식당에 홀로 서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로 창피해서 당장 뛰쳐나오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
우리가 행한 죄가 가져다 준 수치를 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수치와 모욕을 다 담당하시므로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 놀라운 십자가를 우리가 어떻게 사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셋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본문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여러분 "다 이루었다"는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일까요 ?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이고,
둘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 명분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갖추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인해서
1>우리는 드디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2>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3>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히 기도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신 현장입니다.
바로 이러한데 우리가 어떻게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고통 당하시고 처참히 죽으신 십자가는
우리에게는 놀라운 은혜의 자리입니다.
첫째, 십자가는 내가 당할 고통을 主께서 대신 당한 은혜의 자리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나의 수치를 대신 담당해 주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셋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지금 사순절을 보내면서 이 십자가 앞에 나오십시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을 반복하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상태를 측정하는 기준은 바로 여기,
십자가의 은혜를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십자가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지금 사순절 기간을 맞이하여, 우리도 십자가 밑에 나아갑시다.
두 주간 남은 사순절 기간, 가능한 한 매일 예배당을 찾아
사복음서 고난의 장을 읽으면서 십자가를 되돌아봅시다.
분명 우리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들에게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정작 이 십자가의 은혜를 누려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작 있어야 될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연약한 여자들과 제자 중 가장 어린 막내만이 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호산나" 외쳤던 그 무리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
벳새다 광야에서 배불리 먹었던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
죽었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 난 나사로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
"다른 사람이 다 떠나갈지언정 저만큼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사랑하는 여러분 !
거듭 말씀드립니다. 두 주간 남은 사순절기간, 예배당 앞에 나아옵시다.
그리고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허물 때문에 고통 당하는 주님의 신음을 들어봅시다.
그리고 우리들 속에 있는 말할 수 고통을 그 주님 앞에 내려놓읍시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함께 할 것입니다.
자 ! 우리 함께 찬양합시다.(찬송가135장)
3절, 험한 십자가에 주가 흘린 피를 믿는 마음으로 바라보니
,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일세
4절, 주가 예비하신 나의 본향 집에 나를 부르실 그 날까지
, 험한 십자가를 항상 달게 지고 내가 죽도록 충성하리
<후렴>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아멘
당신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되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당신을 점점 풍성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미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한 번은 그 어려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설명하라는
물리학 교수의 과제를 받고 그것을 동료 생도들 앞에서 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봐도, 교수님이 봐도 너무나 완벽하고 알기 쉽게 잘 설명을 했습니다.
크게 감동을 받은 교수님이 맥아더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이토록 어려운 이론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
그때 맥아더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이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책에 있는 내용을 다 외워서 그 외운 것을 발표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우리 신앙의 문제도 때로는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당장은 믿어지지 않더라도 열심히 듣고, 자주 묵상하고,
또 기도하면 언젠가는 정말 마음으로 믿어질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
"왜 ! 왜 !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는가 ?"
"십자가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인가 ?"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 죽음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하나님은 죄를 매우 싫어하십니다. 더구나 죄에 대해서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꼭 벌하십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문제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모든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로마서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의 징벌뿐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지은 죄를 씻음 받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죄는 어떻게 씻음 받을 수 있을까요 ?
히브리서9:22, ".......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피, 즉 죽음으로써 죄를 씻음 받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때에는 사람들이 죄를 짓게 되면,
자신을 대신해서 소나 양 等을 죽여 그 피를 하나님께 제사로 드림으로
죄를 씻음 받았습니다. 피 흘림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는 완전한 제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었으면 사람이 제물이 되어야지요.
그런데 왜 동물이 제물이 됩니까 ?
더구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도 죄인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제물에 불완전한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제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이 제사는 죄를 질 때마다 매번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습니까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놀라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선, 동물이 아닌 완전한 희생제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제물을 처참하게 죽이셨습니다.
그 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 제사를 치른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다시는 죄를 씻기 위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죄인 된 나를 위한 희생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의 신앙상태를 측정하는 기준은 바로 여기,
십자가의 은혜를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십자가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시간 함께 하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여러분의 신앙이 십자가에서 출발하고 있습니까 ?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더 알고 싶고,
예수님께 좀 더 가까이 가고싶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갈증이 있습니까 ?
만약에 우리들에게 그런 갈증이 있다면
우리들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바른 곳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마음 속에 이 십자가의 은혜가 전혀 생소한 것으로 느껴진다면
저는 여러분께 강하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자리를 빨리 갈보리 동산으로 옮기십시오.
혹, 여러분들이 부활의 동산에 서서,
죄와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 때문에 흥분하고 소리지르고,
할렐루야 찬송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십자가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
빨리 갈보리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혹, 여러분이 성령의 다락방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사와 감동을 받은 사람일지라도,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면 빨리 거기서 나와 겟세마네 동산으로 와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오, 주여 !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십자가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다시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만큼 십자가는 모든 은혜의 샘이요, 복음의 핵심이요,
복음의 시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 찬 다섯 사람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사도 요한입니다.
2천 년 전, 십자가 앞에 선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혹은 예수님이 죽는 것을 구경하러 나왔지만,
이 다섯 사람만큼은 예수님을 진정 사랑해서 십자가 앞에 온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라고 로마 군병이 무섭지 않았을까요 ?
이 사람들에게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무섭지 않았을까요 ?
그러나 이들은 어떤 해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 앞에 나와왔습니다.
이들은 예수와 함께 있고 싶어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십자가와 그곳에 달린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에
평생 십자가의 은혜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 예수님을 절대 배반하지 않는 인생을 살 았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지금 사순절 기간을 맞이하여, 우리도 십자가 밑에 나아갑시다.
두 주간 남은 사순절 기간,
가능한 한 매일 예배당을 찾아 사복음서 고난의 장을 읽으면서 십자가를 되돌아봅시다.
분명 우리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들에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자 ! 그렇다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어떤 은혜의 자리일까요 ?
첫째, 십자가는 내가 당할 고통을 主가 대신 당한 은혜의 자리입니다.
내 죄 때문에 내가 당할 고통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 시간 죄 가운데 있습니다.
형제를 미워합니다. 이웃을 속입니다. 사명 앞에 게으릅니다.
심지어 사명을 팽개칩니다.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이 모든 죄악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합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이 저지른 죄 값을 그대로 받는다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옥불의 고통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대신 주님이 짊어져 주신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말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LA에 갔을 때, 그곳에서 오래 살았던 목사님 한 분이
꼭 보여 줄 것이 있다면서 어떤 장소로 데리고 가셨다고 합니다.
거기는 어떤 곳이었냐 하면, 중세 스페인의 카톨릭 교회가
당시 개신교 신자들을 잡아다가 엄청난 고문을 했는데,
그 때 사용했던 고문도구들을 진열해 놓은 곳이었답니다.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몇 백년 전 사건인데, 아마 모조품을 전시해 놨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까 진품이었습니다.
고문 도구를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그 옆에 써 있는 설명문을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세상에 인간이 이렇게 잔인해 질 수 있을까 ?" "이건 사람도 아니다. 악마다 악마 !"
그곳에는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사타구니 사이를 켜서 죽이는 데 쓰이는 톱이
몇 개 걸려 있었고,
사람을 끌어다가 기계 속에 넣으면 국수 가락처럼 되어서 나오도록 만든
소름끼치는 기계도 있었답니다.
또 사람을 집어넣고 자물통을 채우면 꼼짝달싹도 못한 채,
고스란히 말라죽어 뼈다귀만 남게 만드는 기계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아무리 이런 고문 도구들이 잔인하고 흉측하다 한들,
멀쩡한 사람을 십자가 틀에다가 눕혀 놓고
손발에 철 못을 박는 것만큼 잔인할 수 있을까요 ?
톱으로 켬을 당해 죽는 것은 고작 5분이나 10분 정도 고통을 당하다 보면
기절해서 그대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은 절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죽음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 게 십자가 죽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통은 지구상의 있었던 형벌 중 가장 잔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십자가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편22:14-15,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꿀의 찌꺼기를 끓여 만든 기름)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わたしは水となって注ぎ出され,骨はことごとくはずれ,
心は胸の中で蠟のように溶ける. 口は渴いて素燒きのかけらとなり,
舌は上顎にはり付く.)
온 몸이 촛농처럼 흘러내린 고통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상상조차 해 볼 수 없는 고통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
그것은 내가 받을 고통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사야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彼が刺し貫かれたのは, わたしたちの背きのためであり,
彼が打ち碎かれたのは,わたしたちの咎のためであった. 彼の受けた懲らしめによって,
わたしたちに平和が與えられ,彼の受けた傷によって, わたしたちはいやされた.)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찔렸습니까 ?
예수님이 왜 상했습니까 ?
예수님이 왜 징계를 받았습니까 ?
그것은 나의 허물, 나의 죄악, 내가 받을 고통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어떻게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기를 소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를 우러러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둘째, 십자가는 나의 수치를 대신 담당해 주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본문23절,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兵士たちは, イエスを十字架につけてから, その服を取り, 四つに分け,
各自に一つずつ渡るようにした. 下着も取った.)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다음에 예수님의 옷을 벗겨 나눠 가졌습니다.
또한 속옷까지도 벗겨 버렸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 당하신 길을 따라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을 당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침이 흐르고, 수 차례 뺨을 맞고, 머리를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온 몸이 완전히 빨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몸에 아무 것도 걸칠 수 없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22:6-8,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참혹한 수치를 친히 당하셔야 했습니까 ?
그 이유는 죄는 반드시 수치를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자마자 금방 부끄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나뭇잎을 엮어서 하체를 가렸습니다.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다 줍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우리가 우리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천국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아무리 초청하셔도,
우리는 천국에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왜 못 들어갑니까 ? 부끄러워서 못 들어갑니다.
우리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 억지로 천국 안에 넣어 놓는다면, 사흘 안에 미쳐버릴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누더기 옷을 입고, 엄청난 냄새를 풍기며, 머리는 다 헝클어진 가운데,
깨끗하고 멋진 사람들이 가득한 일류식당에 홀로 서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로 창피해서 당장 뛰쳐나오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
우리가 행한 죄가 가져다 준 수치를 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수치와 모욕을 다 담당하시므로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 놀라운 십자가를 우리가 어떻게 사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셋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본문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여러분 "다 이루었다"는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일까요 ?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이고,
둘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 명분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갖추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인해서
1>우리는 드디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2>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3>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히 기도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신 현장입니다.
바로 이러한데 우리가 어떻게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고통 당하시고 처참히 죽으신 십자가는
우리에게는 놀라운 은혜의 자리입니다.
첫째, 십자가는 내가 당할 고통을 主께서 대신 당한 은혜의 자리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나의 수치를 대신 담당해 주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셋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지금 사순절을 보내면서 이 십자가 앞에 나오십시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을 반복하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상태를 측정하는 기준은 바로 여기,
십자가의 은혜를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십자가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지금 사순절 기간을 맞이하여, 우리도 십자가 밑에 나아갑시다.
두 주간 남은 사순절 기간, 가능한 한 매일 예배당을 찾아
사복음서 고난의 장을 읽으면서 십자가를 되돌아봅시다.
분명 우리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들에게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정작 이 십자가의 은혜를 누려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작 있어야 될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연약한 여자들과 제자 중 가장 어린 막내만이 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호산나" 외쳤던 그 무리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
벳새다 광야에서 배불리 먹었던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
죽었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 난 나사로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
"다른 사람이 다 떠나갈지언정 저만큼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사랑하는 여러분 !
거듭 말씀드립니다. 두 주간 남은 사순절기간, 예배당 앞에 나아옵시다.
그리고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허물 때문에 고통 당하는 주님의 신음을 들어봅시다.
그리고 우리들 속에 있는 말할 수 고통을 그 주님 앞에 내려놓읍시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함께 할 것입니다.
자 ! 우리 함께 찬양합시다.(찬송가135장)
3절, 험한 십자가에 주가 흘린 피를 믿는 마음으로 바라보니
,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일세
4절, 주가 예비하신 나의 본향 집에 나를 부르실 그 날까지
, 험한 십자가를 항상 달게 지고 내가 죽도록 충성하리
<후렴>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