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6월15일, 사무엘상6:7-16(바른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 > 主日説教原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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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日説教原稿

2008 2008년6월15일, 사무엘상6:7-16(바른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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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者 박성철
コメント 0件 照会 14,072回 日時 08-06-14 23:59

本文

  옆에 계신 복스러운 지체들을 축복합시다.
  힘써 하나님을 알기 원하시는 당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오벧에돔에게 주신 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석 달에도 우리의 삶을 놀랍게 변화시키십니다.

  어느 교단 기관지인 '기독교 타임스'에 실렸던 내용을 소개합니다.
  軍에서 사역하시는 軍牧이 쓰신 건데, 그 목사님이 사역하시는 부대의 사단장님은
  아주 신실한 신앙이었다고 합니다.
  매일 바쁜 일정 속에서도, 특히 새벽예배는 하루로 거르지 않으셨답니다.
  그런데 그 사단장님이 새벽예배에 나올 때는 꼭 그 집 개도 같이 따라 나오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개는 예배가 끝날 때까지 교회 문 앞에서 주인을 기다렸다가
  같이 돌아가곤 했답니다. 그러니까 그 개(犬)도 매일 새벽예배에 나온 셈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단장이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해 가는 부대는 개를 기를 형편이 못 되어,
  그 개를 그냥 그 부대에  두고 떠났답니다.
  그런데 사단장이 떠난 다음 날, 목사님이 새벽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와서 보니까
  그 개가 교회 문 앞에 와 있더랍니다.
  그리고는 아주 슬픈 얼굴로 목사님을 쳐다보더랍니다.
 "우리 주인님을 어디가야 만날 수 있습니까"하는 표정으로요.
  다음 날 아침, 목사님은 또 예배당 앞에서 그 개를 보았답니다.
  목사님 생각에 '며칠 저러다 말겠지'했는데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결국 한 달 정도를 계속하더랍니다.

  사실 동물들이 사람보다 진실하고, 정직한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특히 욕심부리지도 않습니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도 아무 때나 약한 동물을 잡아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배가 웬만큼 차면, 아무리 잡아먹으라고 주변에 서성거려도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더구나 욕심껏 미리 사냥해 쌓아두는 법도 없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동물이나 짐승이 사람보다 나을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짐승들을 통해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전하실 적이 가끔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재물과 권세의 유혹에 빠져 택한 백성을 저주하러 가는
  거짓 선지자 발람의 길을 막았던 당나귀가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던 나귀도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나타난 벧세메스로 가는 두 마리 암소는
  우리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더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지난주일 말씀인 오벧에돔 사건의 과정에 있는 것으로
  우리들에게 더 깊은 이해를 주리라 믿습니다.

  먼저 여러분께 오늘 제목이 되는,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 신앙생활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까 ?
  오늘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답하든 틀리지 않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전도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물론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일부분만을 가리키는 말이지 충분한 답은 아닙니다.

  여러분 ! 지난주일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왜 아비나답의 가정은 70년을 법궤를 보관하며 섬겼지만 생명을 잃었고,
  오벧에돔의 가정은 단 3개월만에 하나님의 복을 풍성히 받았습니까 ?
  그렇습니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알았습니까 ?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리하면, 바른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구현(俱現, 구체적으로 나타나게)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해 보겠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이루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말씀을 내 삶 속에서 지켜 나가는 것이다"

  자 ! 다시 본문의 법궤(언약궤)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여러분 ! 지난주일 말씀을 기억해 보면, 법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
  그렇습니다.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돌 판이 들어 있습니다.(히브리서9:4)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지난주일 찬양예배 때 말씀드린 것처럼,
  이 세 가지는 전부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습니까 ?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법궤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약 광야시대,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점령해 가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항상 이 법궤를 앞 세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법궤를 앞에 두고 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책이 자신의 책상 책꽂이에 꽂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될 당시, 법궤는
  그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책꽂이에 꽂혀만 있는 성경책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주일 말씀드린 것처럼,
  법궤가 블레셋 땅으로 간 후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법궤가 옮겨진 블레셋 城邑마다, 많은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법궤가 머물렀던 7개월 동안, 독종에, 전염병을 퍼뜨렸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쓰러뜨렸습니다.
  한 마디로 그 법궤가 있는 동안 블레셋은 온통 재앙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수호신 같은 물건을 빼앗았으니
  우리가 얼마나 대단하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온갖 질병으로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결국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하고,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우리가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 법궤를 이스라엘로 보내면서 보여주는 그 방법입니다.
  어떻게 했지요 ?
  법궤를 수레에 싣고, 그 수레를 젖 나는 암소 두 마리를 데려다가 끌게 합니다.
  그리고 그 수레를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향하도록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말씀은 그저 하나의 사건 이야기로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건 속에 참 신앙생활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먼저 본문에서 상징하는 것들이 의미를 말씀드리면,
  첫째, 법궤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가리킵니다.
  둘째, 수레에 실린 법궤를 끌고 벧세메스로 향하는 암소 두 마리는
  말씀을 갖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오늘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가져야 할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해답이 분명하고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저는 본문을 중심으로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법궤를 끌 소를 찾을 때 젖이 나는 암소를 택했다는 점입니다.
  본문7절을 보면,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매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매었다고 합니다.
  왜 하필 젖 나는 암소를 택했을까요 ?
  힘으로 따지자면 수소, 즉 황소를 택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젖 나는 암소를 택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특별한 깨달음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

  그것은 아픔입니다.
  이제 막 송아지를 낳아서 사랑으로 길러야 할 어미 소가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송아지와 생이별을 해야하는 것,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
  아픔이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동물학자들에 의하면, 동물 역시 사람만큼 자기 핏줄에 대한 사랑이 있답니다.
  특히 암컷의 모성애는 사람에 비해 그 정도가 전혀 뒤지지 않는답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동물의 자식 사랑을 직접 보신 분이 있을 겁니다.
  개가 자기 강아지를 보호하는 것을 보신 분이 계십니까 ?
  강아지 낳고 며칠은 그 누구도 얼씬 못하게 합니다. 조금 가까이 가 보십시오.
  생명을 걸고 짖습니다.
  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송아지는 난지 10분도 채 안 돼서 걸어다닙니다.
  그러면 어미 소가 그 송아지가 사랑스러워서 그 긴 혀로 온 몸을 구석구석 핥고 빨아줍니다.
  얼마나 예뻐하는 지 모릅니다.

  그런데 본문7절을 보십시오.
  그 송아지들을 떼어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또 본문10절에 보면, 그 송아지들을 집에다 가두었다고 합니다.
  결국 본문12절을 보면, 암소들은 벧세메스를 향할 때 울었다고 합니다.
  송아지들과의 생이별로 인해 울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하면 반드시 큰 슬픔과 아픔이 동반됩니다.
  말씀대로 살려면, 외로움, 괴로움, 희생, 포기가 수 없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강도는 마치 막 낳은 자식과 생이별할 할 정도입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가 축복과 기쁨과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희망을 잃고, 용기를 잃은 사람들에게 분명 위로와 소망의 종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고난입니다.
  요한복음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신앙생활하면 반드시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더구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지금 신앙생활 바로 해보려 하니 이곳 저곳이 아프십니까 ?
  지금 우리가 아픈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청년 때에 섬기던 교회에서 한 집사님이 자기 남편 때문에 항상 속상해 했습니다.
  명색이 집사라는 분이 기회만 되면 낚시에 빠져, 주일에도 낚시터에 가는 겁니다.
  그런데 목사님과 성도들, 그리고 아내의 권고로
  드디어 주일에는 낚시터를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그 집사님께 "이렇게 주일마다 교회 나오시니까 좋으시지요 ?"라고
  물었더니 그 집사님 대답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목사님, 낚시터에 있을 때는 교회 생각을 많이 했는데,
  막상 교회에 나오니까 낚시터 생각이 더 나는데 어느 쪽이 좋은 겁니까 ? 괴롭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런 갈등과 선택의 괴로움은 그 집사님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겪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
  결국 참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과 내 영혼을 위해 세상의 유혹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판이 납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자기 자신의 지난날들의 신앙생활을 한 번 떠 올려 보십시오.
  처음에는 술, 담배로 아파합니다. 식사기도로도 아파합니다.
  또 주일이 되면 꼭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지, 집에서 좀 쉬어도 되는 것인지를 놓고도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러다가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약간의 주일 헌금으로 때울 것인지를 놓고도 마음을 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 놀라지 마십시오. 이것들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성숙한 신앙생활에 접어들수록
  우리의 삶에는 더 심한 강도의 아픔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가 말씀대로 산다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정말로 말씀대로 살려면, 내려놓는 삶을 수없이 반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현실 속에서 오는 끊임없는 갈등들,
  이것은 우리를 끝없이 괴롭힙니다.
  우리는 "세상사람들 다 하는 방법으로 적당히 타협하라"는 유혹을 수없이 받습니다.
  더구나 그 유혹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비롯됩니다.
  그 유혹에 타협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아픔이 싫다면 결국 우리는 말씀을 버려야 합니다.
  이 아픔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결국 신앙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편119:105)"
  라는 말씀을 사모한다면,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순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바로 신앙인의 길인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났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때까지 밥줄이었던 그물과 배를 버렸습니다.
  물론 우리 역시 생업을 접고, 공부를 포기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수록 우리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지금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
  그렇다면, 고난이 올 것입니다. 많은 것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수없이 내려놓는 결단을 반복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두 마리의 암소처럼, 그 길을 마다하지 않고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이렇듯 고통 중에서 순종한 결과는 무엇일까요 ?
  이에 대해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적 답을 주고 있습니다.
  목적지 벧세메스에 도착한 암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
  본문1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그렇습니다. 상급을 받은 것이 아니라 번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즉 말씀 따라 아픔을 안고 평생을 산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의외로 영광이 아닌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비참한 최후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우리들이 말씀을 굳게 잡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아이들과 헤어지는 아픔까지도 참으면서 주를 위해 일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합니까 ?
  그렇습니다. 놀라운 축복과 영광을 기대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르는데서 오는 모든 고통과 희생을 알면서도,
  그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은 인생의 후반전에 얻을 영광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다를 적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주의 일을 한 후의 결과로 우리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영광이 아닌, 내가 희생의 제물이 되는 경우도 있음을 분명히 말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진정한 진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사는 우리 삶은, 더 썩어지고, 더 희생하고, 더 양보하고
  그리고 결국은 자신을 태워 제물이 되는 순간까지 봉사하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고, 대접해 주고, 박수를 쳐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840년9월4일,
  영국 웨일즈 리야드란 곳에서 어느 목사님의 가정에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런던대학 뉴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863년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중국의 선교에 관심이 있었던 이 젊은 목사는
  1864년 24세의 나이로 신혼의 아내와 함께 중국 선교사로 건너갑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선교사업을 벌이기도 전에 풍토병에 걸린 아내가 그만 죽고 맙니다.
  큰 슬픔과 괴로움이 있었지만 이것을 극복하고 있다가,
  마침 조선 땅 황해도 장연에서 건너온 김자평 최선일이란 사람들을 만나
  조선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후원을 받아서 많은 한문 성경을 준비해,
  조선 땅 백령도를 중심으로 한 서해 도서지방에 성경을 나눠줍니다.
  그것이 1865년9월의 일이었습니다.

  이 선교사는 다시 중국으로 갔다가 이듬해 1866년 미국 상선이었던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드디어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강화를 돌아 한강으로 올라가야 할 배가 그만 뱃길을 잘못 들어서,
  북상해서 대동강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배가 정박한 곳은 평양의 만경대 일대였는데,
  물이 빠지자 그 배는 그만 대동강 모래사장에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평양감사 박규수가 병사를 이끌고 나와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을 다 잡아 죽이게 되는데,
  그때 이 젊은 목사도 체포되어 백사장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끌려 나오는 순간에도 사람들과 병사들에게 성경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바로 그 대동강변에서 참수형으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의 나이 27세로, 1866년 9월 2일 저녁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젊은 목사의 이름은 토마스(Robert J Tomas 1840-1866)로서,
  조선 땅에 들어온 선교사로서 첫 순교자가 된 분입니다.

  그런데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에게서 성경을 받았던 사람 중 홍신길이란 사람은
  후에 강서의 탄포지교회를 세우게 되고,
  최치량이란 사람은 평양교회를 개척하고 훗날 장로님의 사명까지 감당하게 됩니다.
  또 성경을 뜯어서 벽지로 발랐던 영문 주사 박영식은
  후에 신실한 신자가 되어 그 집이 널다리교회(평양 장대현교회)가 됩니다.
  또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자른 장본인인 박춘권이란 사람은 평양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다시 말씀드립니다. 신앙생활은 아픔입니다. 신앙생활은 희생입니다.
  내가 복음을 붙들고 죽어야 그 복음은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의 끝은 멸시와 조롱이었고, 제자들의 끝은 곧 순교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동경에 여러 교회가 있는데 왜 여러분은 우리 본향교회를 나오셨습니까 ?
  물론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찾아 나오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다.
  우리 본향교회가 정말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교회가 되려면,
  더 아파하고 더 희생해야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픔을 참는 일입니다.

  이제 성경으로 돌아가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기십시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혹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 중에는
  이쯤에서 신앙생활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정말 아픔과 희생뿐이겠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파할수록, 슬퍼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만족스럽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기쁨의 샘을 숨겨 놓으셨기 때문이고,
  그 샘은 우리가 아파할수록, 슬퍼할수록, 희생할수록 더 힘차게 솟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암소처럼 결국엔 죽음으로, 제사로 드려진 모든 우리 선배들은
  그렇게 기쁨으로 죽어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분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
  꺼져 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생명은 거저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고 희생을 해야만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의 희열을 아십니까 ?
  목이 잘려 죽는 사도 바울의 그 기쁨을 아십니까 ?
  인도의 한 이름 모를 땅에서 창에 찔려 죽는 도마의 그 환희를 아십니까 ?
  X자 형 십자가에서 온갖 회유를 마다하며 죽어간 안드레의 그 기쁨을 아십니까 ?
  자기 몸이 타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감사하는 폴리갑의 그 희열을 아십니까 ?
  이름 모를 조선의 강변에서 참수형을 당하는 토마스 선교사의 그 환희를 아십니까 ?

  우리 역시 그렇게 장엄한 모습은 아니더라도 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따르면서 아픔을 느끼시면 됩니다.
  말씀 때문에 고통이 오고, 그 말씀을 따르느라 내가 점점 없어지면
  바로 그 자리에 기쁨과 희열과 환희의 꽃은 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이 클 수록 여러분 영혼의 꽃밭은 기쁨과 희열과 환희로 가득찰 것입니다.
  이런 역설의 축복을 선물 받아,
  그 속에서 퍼져 나온 향기로 평생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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