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008년6월8일, 역대상13:1-14(웃사입니까 ? 아니면 오벧에돔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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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계신 복스러운 지체들을 축복합시다.
무리(푸쉬케)가 아닌 제자(마테테스)가 되기를 원하는 당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망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당신은 고독함을 통해 제자로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할렐루야 !
여러분 ! 영화 자주 보십니까 ?
최근에 보신 영화 중 어떤 작품이 기억에 남으십니까 ?
지난 5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해리슨 포드 주연의 인디아나 존스 제4편이 개봉되어
이미 전 세계 63개국에서 관람객 수 1위를 차지하는 등,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오는 21일에 개봉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시절인 1981년, 레이더스(인디아나 존스 제1편)라는 영화가
크게 흥행한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 역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해리슨 포드가 열연한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언약궤(법궤)를 찾는 내용의 영화였습니다.
참 재미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법궤(언약궤)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이 법궤는 하나님의 命에 의해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습니다(B. C. 1450년경).
그리고 벱궤는 하나님의 命에 따라 성막의 가장 중심이었던 지성소에 놓여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법궤 위에 임(臨)하셔서 제사장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그때로부터 법궤는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때로부터, 하나님 임재(臨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온 이스라엘은 법궤를 실로라는 곳에 두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 B. C. 1070년 경,
엘리 제사장 시대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연전연패하자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이 법궤의 신통력을 믿고
그것을 전쟁터로 내옵니다.
과거 자기 조상들이 법궤를 앞세웠을 때 요단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등 많은 기적을 맛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
승리는커녕 전쟁에 대패하고 법궤도 블레셋에 빼앗기고 맙니다.
이스라엘 편에서 본다면, 참담한 패배였습니다.
한편, 블레셋으로 간 법궤는 블레셋의 5대 도시를 돕니다.
돌고 싶어서 돈 게 아니라 전리품으로 생각했던 법궤가
가는 곳마다 재앙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독종에, 전염병을 퍼뜨렸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쓰러뜨렸습니다.
결국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고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보냅니다.
그런데 재앙은 이스라엘 땅에 와서도 계속 되었습니다.
호기심으로 그 법궤를 들여다 본 70명 정도의 벧세메스 사람들이
모두 죽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사무엘상6:19).
이쯤 되니 그 누구도 법궤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법궤는 기럇여아림의 山 사람인 아비나답의 집으로 모셔지게 되고
거기서 70년을 소리 소문 없이 안치되게 되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두 사람은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오벧에돔입니다.
아비나답은 사울 때의 사람이었고, 오벧에돔은 다윗 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같은 세대를 살았던 사울왕 과 아비나답은 법궤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물론 사울왕 역시 40년 재위 기간 중 제사도 드렸고 기도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종교적 행위는 형식이요 의례적인 것이었습니다.
제사를 주관해야 할, 제사장이 오든 말든 자기 나름대로 제사를 드리고 전쟁터에 나갔던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왕 밑에서 백성들 역시 왕을 닮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법궤는 70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두에게서 잊혀졌고, 방치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 하나 법궤에 관심을 가지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왕이 되자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자마자 법궤를 생각했고, 법궤가 기럇여아림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곧 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로 작정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그 일을 기뻐하고 소중하게 생각했던지
법궤를 호위할 군사만 3만 명을 뽑습니다(사무엘하6:1).
백성들도 덩달아 흥분했고,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에 빠졌습니다.
70년 동안 산 속에 내동댕이쳐졌던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법궤는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수레에 실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운반의 총 책임은 지난 70년 간 代를 이어 법궤를 맡아온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히오가 맡게 되었습니다.
법궤를 옮기는 행렬은 장관(壯觀)을 이뤘고 축제 분위기는 점점 더 고조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행렬이 기돈의 타작 마당까지 왔을 때
그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수레를 끄는 소들이 갑자기 뛰었고 그래서 궤가 기울어지려는 것을 웃사가 붙들었는데,
바로 그 순간 웃사가 즉사(卽死)한 겁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웃사가 죽고 말았는가 ? 그저 두려울 따름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법궤를 예루살렘까지 옮겨 갈 마음을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법궤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 동안 머물었고,
그때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집에 많음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여기까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첫째,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이것입니다.
누구는 법궤를 70년 간이나 모셨는데도 저주를 받고 말았고,
누구는 단 석 달을 모셨는데도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 70년과 석 달은 그 세월로 볼 때 비교 자체가 되질 않습니다.
문제는 그 석 달이 70년의 세월보다 더 값어치가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제 능력에 대해 실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3학년에 복학했는데, 선형대수학(Linear Algebra)이란 과목이 있었습니다.
모처럼 시험 준비를 위해 도서관에 앉았는데,
벡터공간에서의 행렬계산문제가 1시간을 지나, 2시간가까이 씨름해도
전혀 진전이 없는 겁니다.
그때 후배가 들어왔는데 3분도 걸리지 않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까 ?
저는 100분, 그 후배는 3분, 이게 비교가 됩니까 ?
아비나답과 그 아들 웃사, 그리고 저에게 있어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
그렇습니다. 해답은 간단합니다. 몰라서였습니다.
일의 성패 여부는 아느냐와 모르느냐가 그 분기점이 됩니다.
알면 길이 보이고 그래서 진행이 빠르고 뜻을 이루게 되지만,
모르면 길이 안 보이고 진행은 더디고 결국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신앙생활도 동일합니다.
알면 기쁘고 즐겁고 복되지만 모르면 힘들고 불평하고 포기하고 맙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단연 오벧에돔입니다.
오벧에돔은 열 두 지파 중 레위 지파 고핫자손에 속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레위지파는 평생 성전 일을 보면서 살도록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 안에도 세 자손이 있어서 자손 별로 섬길 일이 다 따로 있었습니다.
그 중에 고핫 자손이 하는 일은 특별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 있을 때부터 법궤 운반을 맡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벧에돔은 분명 아버지,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통해,
법궤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지를 깊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법궤를 지키고 관리하는 일은 그들이 마음 깊이 간직한 사명이었을 것입니다.
오벧에돔과 고핫자손들은 늘 법궤를 마음에 그리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 오벧에돔이 어느 날, 법궤를 찾아 옮긴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다윗 왕이 법궤를 수소문 끝에 찾아내고 이제 그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거룩한 처소에 모셔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원래 법궤는 자기 선조들에 의해서 모셔져야 했고,
거기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법궤의 행방은 묘연해지고, 따라서 영광도 떠나버렸고,
그것은 자기들 고핫 자손에게 평생 짐이 되었습니다. 법궤를 지키지 못했다는 .....
그런데 법궤는 사라지지 않았고, 이제 다시 성전의 중심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을 생각할 때 오벧에돔은 기뻤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봤으면 하고 열망했던 그 법궤가
자기와 가까운 곳으로 지나간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을 것입니다.
기다리던 그 날이 마침내 왔습니다.
법궤의 행렬이 3만의 군대, 수천 명의 찬양대와 오케스트라의 음악과 함께
점점 자기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다윗 왕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법궤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소 두 마리가 끄는, 화려하게 치장된 수레가 보였고
그 앞에는 두 사람이 오만하게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오고 나서야 법궤가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오벧에돔은 크게 놀랐습니다.
자기가 배운 바로는 법궤는 소 따위가 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레위 지파 중 고핫 자손들이 어깨로 매 운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감격과 흥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의문과 불안이 몰려왔습니다.
"이것이 아닌데, 이것은 아닌 것 같은데 ....."
바로 그때, 소들이 뛰었고 법궤를 잡았던 웃사가 수레 아래 나동그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 죽었습니다.
찬양대의 찬양소리는 멈췄고, 주변의 사람들은 누구랄 것 없이 모두 공포에 떨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화려했던 수레는 치장과는 달리 한없이 초라해졌고
거기에 실려있는 법궤는 그 순간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오벧에돔의 마음에는 이 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입니다.
"내가 모셔야 해 ! 내가 저 법궤에 대해 잘 알고 있잖아 !"
아마도 오벧에돔은 다윗 왕을 찾아가 이 결단을 말했을 것이고,
어찌할 바 몰라 당황해 했던 다윗은, 오벧에돔에게 "그리하라"라고 命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채 석 달이 못되어 오벧에돔의 가정에 하나님은 복에 복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역대상26장에 보면, 오벧에돔의 자손들 62명 모두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게 되었고,
그의 곳간은 쌓을 곳이 없도록 넘쳐났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그렇습니다. 우선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게 힘이고 실력입니다.
아비나답은 무식하니 용감했고 그래서 아들 웃사를 잃었습니다.
오벧에돔은 알았고 그것이 힘이 되었고 복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연약해서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몰라서 연약한 것이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무성의 때문에 연약한 것이며,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니까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亡하는도다"(호세아4:1, 6)
또한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세아6:3)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새해를 맞아 이제까지 지난5개월 동안 하나님을 알기 위해 얼마나 힘쓰셨습니까 ?
혹시 이미 하나님을 다 안다고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
아니면 하나님은 빼놓고 제 나름대로 신앙생활한 것 아닙니까 ?
사울처럼, 아미나답처럼, 웃사처럼 말입니다.
둘째,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수레에 태워 보낼 때는 가만히 계셨던 하나님,
또한 70년을 산 속에서 있을 때는 거미줄 떼느라 만지고,
청소하느라 이리저리 굴려도 가만히 계시던 그 하나님이 왜 이번에는 참지 않으셨을까요 ?
왜 하필, 다윗 앞에서, 오벧에돔 앞에서 일을 벌이셨을까요 ?
대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섬김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야 수레에 실려와도 괜찮고,
아무 관심 없는 사울이나 아비나답 같은 사람들에게 70년 괄세를 받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침 뱉음을 당해도 괜찮고,
따귀를 맞거나 주먹 세례를 받아도 괜찮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다윗, 그리고 오벧에돔에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마저 나를 이렇게 대접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다윗 ! 오벧에돔 ! 너희들에게만큼은 내가 하나님이고 싶다."
"다윗 ! 오벧에돔 ! 너희들만큼은 나를 온전히 섬겨야 하는 것 아니니 ?"
그래서 하나님이 안타까운 눈으로 바로 그들을 찾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때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남들은 막살아도 놔두시면서 저는 그렇게 살면 왜 안됩니까 ?"
"남들은 다 편한데, 왜 하필 저에게만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주십니까 ?"
그럴 때마다 여러분들 !
불평 불만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얘야 !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에게만큼은 높임을 받고 싶구나 !"
"오벧에돔처럼 너만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단다 !"
사랑하는 여러분 !
왜 하필, 오벧에돔의 앞에서 소가 뛰고 법궤가 흔들립니까 ?
바로 우리들에게 거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우리 앞에서 그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피하지 말고 '아멘'으로 감당하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하나님을 여러분의 의지대로 컨트롤하려 들지 마십시오.
본문9절을 보면,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오늘 본문 어디에도 궤가 떨어지려고 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소는 말과 다릅니다. 말은 한 번 뛰면 앞발을 1m 이상 들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약 말이 수레를 끌고 있다면 말이 놀랐을 때
수레에 실린 짐은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는 아무리 놀라도 앞 발 두 개를 한꺼번에 드는 경우는 별로 없을 뿐더러
혹 있더라도 소의 생태 상 30cm 이상은 뛰어오를 수 없다고 합니다.
더구나 어느 바보가 그렇게 귀중한 궤를,
조금 흔들리면 이리저리 사방으로 움직이도록 고정시키는 장치를 안 했겠습니까 ?
그렇다면 웃사는 지금 무엇을 한 것입니까 ?
소가 뛰는 것을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본문9절의 붙잡았다는 원어 '아하츠'라는 말은 소유개념입니다.
컨트롤했다는 뜻입니다. 자기 것을 자기가 만졌다는 의미입니다.
궤가 마치 자기 것인 양, 떨어지지도 않을 궤를 괜히 한 번 만져서
사람들 앞에 과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본문10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그렇습니다. 웃사가 주인 노릇 할 때 하나님께서 치셨습니다.
그가 죽은 곳이 어디였습니까 ?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입니다.
자신이 컨트롤하려 했던 궤 옆에서,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누구도 내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나를 컨트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11절에 보면, 다윗이 그 곳의 이름을 '베레스 웃사'라고 했습니다.
베레스는 '치다'라는 뜻이고, 웃사는 고유명사이기도 하지만,
'힘, 능력'이란 뜻을 가진 보통명사이기도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위에 두고자 하는 인간의 힘이나 능력,
그것을 더 신봉하는 자는 하나님이 치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
그런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 말씀을 비틀고 왜곡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것은 자기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죽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조종하고 부리려는 내 마음을
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끌고 가는 것 버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지, 내 의지가 아닙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말씀 마지막 절에 보면, 하나님은 석 달 만에도 인생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벧에돔의 인생을, 오벧에돔 자녀들의 인생을 바꾸셨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어려운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하면, 주님은 우리 인생을 역전시켜 주십니다.
70년 걸려서 안됐던 일이라도 주님이 하시면 석 달에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오늘 오벧에돔이 잘 섬긴 것은 불과 석 달이었습니다.
물론 석 달만 잘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잘 섬겼더니 석 달만에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믿고 한 번 지금부터 석 달만이라도 하나님을 잘 섬겨보십시오.
물론 딱 석 달만 섬기고 마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부터 석 달만이라도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해
주 우리 하나님을 섬겨 보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 석 달 후에 서로들 돌아보고 간증해 보십시다.
한 사람이 석 달만 잘 섬겨도 온 가정이 구원받고 축복 받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왜 우리가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
우리들의 가정에는 우리들이 그런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만은 하나님이고 싶고 섬김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기대를 걸고 계시며 늘 관계 맺고 싶어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를 소망하고 온전히 알도록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오벧에돔처럼 단 석 달 만 잘 했는데도 모든 게 변하는 역사가
꼭 있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무리(푸쉬케)가 아닌 제자(마테테스)가 되기를 원하는 당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망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당신은 고독함을 통해 제자로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할렐루야 !
여러분 ! 영화 자주 보십니까 ?
최근에 보신 영화 중 어떤 작품이 기억에 남으십니까 ?
지난 5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해리슨 포드 주연의 인디아나 존스 제4편이 개봉되어
이미 전 세계 63개국에서 관람객 수 1위를 차지하는 등,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오는 21일에 개봉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시절인 1981년, 레이더스(인디아나 존스 제1편)라는 영화가
크게 흥행한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 역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해리슨 포드가 열연한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언약궤(법궤)를 찾는 내용의 영화였습니다.
참 재미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법궤(언약궤)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이 법궤는 하나님의 命에 의해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습니다(B. C. 1450년경).
그리고 벱궤는 하나님의 命에 따라 성막의 가장 중심이었던 지성소에 놓여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법궤 위에 임(臨)하셔서 제사장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그때로부터 법궤는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때로부터, 하나님 임재(臨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온 이스라엘은 법궤를 실로라는 곳에 두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 B. C. 1070년 경,
엘리 제사장 시대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연전연패하자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이 법궤의 신통력을 믿고
그것을 전쟁터로 내옵니다.
과거 자기 조상들이 법궤를 앞세웠을 때 요단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등 많은 기적을 맛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
승리는커녕 전쟁에 대패하고 법궤도 블레셋에 빼앗기고 맙니다.
이스라엘 편에서 본다면, 참담한 패배였습니다.
한편, 블레셋으로 간 법궤는 블레셋의 5대 도시를 돕니다.
돌고 싶어서 돈 게 아니라 전리품으로 생각했던 법궤가
가는 곳마다 재앙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독종에, 전염병을 퍼뜨렸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쓰러뜨렸습니다.
결국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고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보냅니다.
그런데 재앙은 이스라엘 땅에 와서도 계속 되었습니다.
호기심으로 그 법궤를 들여다 본 70명 정도의 벧세메스 사람들이
모두 죽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사무엘상6:19).
이쯤 되니 그 누구도 법궤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법궤는 기럇여아림의 山 사람인 아비나답의 집으로 모셔지게 되고
거기서 70년을 소리 소문 없이 안치되게 되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두 사람은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오벧에돔입니다.
아비나답은 사울 때의 사람이었고, 오벧에돔은 다윗 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같은 세대를 살았던 사울왕 과 아비나답은 법궤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물론 사울왕 역시 40년 재위 기간 중 제사도 드렸고 기도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종교적 행위는 형식이요 의례적인 것이었습니다.
제사를 주관해야 할, 제사장이 오든 말든 자기 나름대로 제사를 드리고 전쟁터에 나갔던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왕 밑에서 백성들 역시 왕을 닮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법궤는 70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두에게서 잊혀졌고, 방치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 하나 법궤에 관심을 가지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왕이 되자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자마자 법궤를 생각했고, 법궤가 기럇여아림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곧 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로 작정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그 일을 기뻐하고 소중하게 생각했던지
법궤를 호위할 군사만 3만 명을 뽑습니다(사무엘하6:1).
백성들도 덩달아 흥분했고,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에 빠졌습니다.
70년 동안 산 속에 내동댕이쳐졌던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법궤는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수레에 실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운반의 총 책임은 지난 70년 간 代를 이어 법궤를 맡아온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히오가 맡게 되었습니다.
법궤를 옮기는 행렬은 장관(壯觀)을 이뤘고 축제 분위기는 점점 더 고조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행렬이 기돈의 타작 마당까지 왔을 때
그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수레를 끄는 소들이 갑자기 뛰었고 그래서 궤가 기울어지려는 것을 웃사가 붙들었는데,
바로 그 순간 웃사가 즉사(卽死)한 겁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웃사가 죽고 말았는가 ? 그저 두려울 따름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법궤를 예루살렘까지 옮겨 갈 마음을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법궤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 동안 머물었고,
그때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집에 많음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여기까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첫째,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이것입니다.
누구는 법궤를 70년 간이나 모셨는데도 저주를 받고 말았고,
누구는 단 석 달을 모셨는데도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 70년과 석 달은 그 세월로 볼 때 비교 자체가 되질 않습니다.
문제는 그 석 달이 70년의 세월보다 더 값어치가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제 능력에 대해 실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3학년에 복학했는데, 선형대수학(Linear Algebra)이란 과목이 있었습니다.
모처럼 시험 준비를 위해 도서관에 앉았는데,
벡터공간에서의 행렬계산문제가 1시간을 지나, 2시간가까이 씨름해도
전혀 진전이 없는 겁니다.
그때 후배가 들어왔는데 3분도 걸리지 않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까 ?
저는 100분, 그 후배는 3분, 이게 비교가 됩니까 ?
아비나답과 그 아들 웃사, 그리고 저에게 있어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
그렇습니다. 해답은 간단합니다. 몰라서였습니다.
일의 성패 여부는 아느냐와 모르느냐가 그 분기점이 됩니다.
알면 길이 보이고 그래서 진행이 빠르고 뜻을 이루게 되지만,
모르면 길이 안 보이고 진행은 더디고 결국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신앙생활도 동일합니다.
알면 기쁘고 즐겁고 복되지만 모르면 힘들고 불평하고 포기하고 맙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단연 오벧에돔입니다.
오벧에돔은 열 두 지파 중 레위 지파 고핫자손에 속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레위지파는 평생 성전 일을 보면서 살도록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 안에도 세 자손이 있어서 자손 별로 섬길 일이 다 따로 있었습니다.
그 중에 고핫 자손이 하는 일은 특별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 있을 때부터 법궤 운반을 맡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벧에돔은 분명 아버지,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통해,
법궤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지를 깊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법궤를 지키고 관리하는 일은 그들이 마음 깊이 간직한 사명이었을 것입니다.
오벧에돔과 고핫자손들은 늘 법궤를 마음에 그리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 오벧에돔이 어느 날, 법궤를 찾아 옮긴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다윗 왕이 법궤를 수소문 끝에 찾아내고 이제 그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거룩한 처소에 모셔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원래 법궤는 자기 선조들에 의해서 모셔져야 했고,
거기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법궤의 행방은 묘연해지고, 따라서 영광도 떠나버렸고,
그것은 자기들 고핫 자손에게 평생 짐이 되었습니다. 법궤를 지키지 못했다는 .....
그런데 법궤는 사라지지 않았고, 이제 다시 성전의 중심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을 생각할 때 오벧에돔은 기뻤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봤으면 하고 열망했던 그 법궤가
자기와 가까운 곳으로 지나간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을 것입니다.
기다리던 그 날이 마침내 왔습니다.
법궤의 행렬이 3만의 군대, 수천 명의 찬양대와 오케스트라의 음악과 함께
점점 자기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다윗 왕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법궤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소 두 마리가 끄는, 화려하게 치장된 수레가 보였고
그 앞에는 두 사람이 오만하게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오고 나서야 법궤가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오벧에돔은 크게 놀랐습니다.
자기가 배운 바로는 법궤는 소 따위가 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레위 지파 중 고핫 자손들이 어깨로 매 운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감격과 흥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의문과 불안이 몰려왔습니다.
"이것이 아닌데, 이것은 아닌 것 같은데 ....."
바로 그때, 소들이 뛰었고 법궤를 잡았던 웃사가 수레 아래 나동그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 죽었습니다.
찬양대의 찬양소리는 멈췄고, 주변의 사람들은 누구랄 것 없이 모두 공포에 떨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화려했던 수레는 치장과는 달리 한없이 초라해졌고
거기에 실려있는 법궤는 그 순간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오벧에돔의 마음에는 이 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입니다.
"내가 모셔야 해 ! 내가 저 법궤에 대해 잘 알고 있잖아 !"
아마도 오벧에돔은 다윗 왕을 찾아가 이 결단을 말했을 것이고,
어찌할 바 몰라 당황해 했던 다윗은, 오벧에돔에게 "그리하라"라고 命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채 석 달이 못되어 오벧에돔의 가정에 하나님은 복에 복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역대상26장에 보면, 오벧에돔의 자손들 62명 모두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게 되었고,
그의 곳간은 쌓을 곳이 없도록 넘쳐났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그렇습니다. 우선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게 힘이고 실력입니다.
아비나답은 무식하니 용감했고 그래서 아들 웃사를 잃었습니다.
오벧에돔은 알았고 그것이 힘이 되었고 복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연약해서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몰라서 연약한 것이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무성의 때문에 연약한 것이며,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니까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亡하는도다"(호세아4:1, 6)
또한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세아6:3)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새해를 맞아 이제까지 지난5개월 동안 하나님을 알기 위해 얼마나 힘쓰셨습니까 ?
혹시 이미 하나님을 다 안다고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
아니면 하나님은 빼놓고 제 나름대로 신앙생활한 것 아닙니까 ?
사울처럼, 아미나답처럼, 웃사처럼 말입니다.
둘째,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수레에 태워 보낼 때는 가만히 계셨던 하나님,
또한 70년을 산 속에서 있을 때는 거미줄 떼느라 만지고,
청소하느라 이리저리 굴려도 가만히 계시던 그 하나님이 왜 이번에는 참지 않으셨을까요 ?
왜 하필, 다윗 앞에서, 오벧에돔 앞에서 일을 벌이셨을까요 ?
대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섬김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야 수레에 실려와도 괜찮고,
아무 관심 없는 사울이나 아비나답 같은 사람들에게 70년 괄세를 받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침 뱉음을 당해도 괜찮고,
따귀를 맞거나 주먹 세례를 받아도 괜찮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다윗, 그리고 오벧에돔에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마저 나를 이렇게 대접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다윗 ! 오벧에돔 ! 너희들에게만큼은 내가 하나님이고 싶다."
"다윗 ! 오벧에돔 ! 너희들만큼은 나를 온전히 섬겨야 하는 것 아니니 ?"
그래서 하나님이 안타까운 눈으로 바로 그들을 찾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때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남들은 막살아도 놔두시면서 저는 그렇게 살면 왜 안됩니까 ?"
"남들은 다 편한데, 왜 하필 저에게만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주십니까 ?"
그럴 때마다 여러분들 !
불평 불만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얘야 !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에게만큼은 높임을 받고 싶구나 !"
"오벧에돔처럼 너만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단다 !"
사랑하는 여러분 !
왜 하필, 오벧에돔의 앞에서 소가 뛰고 법궤가 흔들립니까 ?
바로 우리들에게 거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우리 앞에서 그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피하지 말고 '아멘'으로 감당하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하나님을 여러분의 의지대로 컨트롤하려 들지 마십시오.
본문9절을 보면,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오늘 본문 어디에도 궤가 떨어지려고 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소는 말과 다릅니다. 말은 한 번 뛰면 앞발을 1m 이상 들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약 말이 수레를 끌고 있다면 말이 놀랐을 때
수레에 실린 짐은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는 아무리 놀라도 앞 발 두 개를 한꺼번에 드는 경우는 별로 없을 뿐더러
혹 있더라도 소의 생태 상 30cm 이상은 뛰어오를 수 없다고 합니다.
더구나 어느 바보가 그렇게 귀중한 궤를,
조금 흔들리면 이리저리 사방으로 움직이도록 고정시키는 장치를 안 했겠습니까 ?
그렇다면 웃사는 지금 무엇을 한 것입니까 ?
소가 뛰는 것을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본문9절의 붙잡았다는 원어 '아하츠'라는 말은 소유개념입니다.
컨트롤했다는 뜻입니다. 자기 것을 자기가 만졌다는 의미입니다.
궤가 마치 자기 것인 양, 떨어지지도 않을 궤를 괜히 한 번 만져서
사람들 앞에 과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본문10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그렇습니다. 웃사가 주인 노릇 할 때 하나님께서 치셨습니다.
그가 죽은 곳이 어디였습니까 ?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입니다.
자신이 컨트롤하려 했던 궤 옆에서,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누구도 내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나를 컨트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11절에 보면, 다윗이 그 곳의 이름을 '베레스 웃사'라고 했습니다.
베레스는 '치다'라는 뜻이고, 웃사는 고유명사이기도 하지만,
'힘, 능력'이란 뜻을 가진 보통명사이기도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위에 두고자 하는 인간의 힘이나 능력,
그것을 더 신봉하는 자는 하나님이 치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
그런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 말씀을 비틀고 왜곡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것은 자기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죽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조종하고 부리려는 내 마음을
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끌고 가는 것 버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지, 내 의지가 아닙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말씀 마지막 절에 보면, 하나님은 석 달 만에도 인생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벧에돔의 인생을, 오벧에돔 자녀들의 인생을 바꾸셨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어려운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하면, 주님은 우리 인생을 역전시켜 주십니다.
70년 걸려서 안됐던 일이라도 주님이 하시면 석 달에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오늘 오벧에돔이 잘 섬긴 것은 불과 석 달이었습니다.
물론 석 달만 잘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잘 섬겼더니 석 달만에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믿고 한 번 지금부터 석 달만이라도 하나님을 잘 섬겨보십시오.
물론 딱 석 달만 섬기고 마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부터 석 달만이라도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해
주 우리 하나님을 섬겨 보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 석 달 후에 서로들 돌아보고 간증해 보십시다.
한 사람이 석 달만 잘 섬겨도 온 가정이 구원받고 축복 받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왜 우리가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
우리들의 가정에는 우리들이 그런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만은 하나님이고 싶고 섬김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기대를 걸고 계시며 늘 관계 맺고 싶어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를 소망하고 온전히 알도록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오벧에돔처럼 단 석 달 만 잘 했는데도 모든 게 변하는 역사가
꼭 있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