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008년7월6일, 누가복음19:1-10(삭개오의 감사)-맥추감사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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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계신 복스러운 지체들을 축복합시다.
하나님을 점점 알아 가는 가운데 드리는 당신의 예배,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당신의 예배,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어린이들에게 가끔 묻는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로 올라간 키 작은 사람의 이름은 누구일까요 ?
그렇습니다. 세리장(稅吏長) 삭개오입니다.
저는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아
삭개오에 대한 말씀을 통해 감사에 대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
조금 전 읽은 오늘 본문에 '감사'라는 말이 나왔던가요 ?
그렇지요. 오늘 본문에는 '감사'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을 감사주일의 본문으로 삼은 것은
삭개오(ザアカイ) 속에 온전한 감사가 가득 차있기 때문입니다.
그 삭개오 속에 가득한 감사를 오늘 우리들도 가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삭개오의 감사는 '생각하는 감사'였습니다.
언뜻 생각할 때, 감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별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영어에서 '생각하다'라는 뜻의 'think'와
'감사하다'는 뜻의 'thank'는 어원이 같습니다.
즉, 생각이 없으면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시작 전에 찬양했던 찬송가 489장의 가사를 보십시오.
1절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 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2절 "세상 근심 걱정 너를 누르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갈 때,
주가 네게 주신 복을 세어라 두렴 없이 항상 찬송하리라"
후렴의 가사는 더욱 의미가 분명합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主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여기에서 '복을 세어 보는 것'은 받은 복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결과로 풍성한 감사가 찾아옵니다.
우리들은 청교도(淸敎徒)들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것이 아닌, 오직 믿음생활 하나 제대로 할 수 있으면 願이 없겠다 싶어
그 소원 하나 붙들고 대서양을 건넌 사람들입니다.
변변한 물과 양식도 없이 65일 間을 항해한 끝에 아메리카 신대륙에 도착해 보니
떠날 때 102명이던 사람이 58명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항해 중에 44명이 괴혈병과 각종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배 위에서 죽은 것입니다.
약속의 땅이라고 생각했던 신대륙에 정착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가져 간 종자를 심어 봤더니 보리고 밀이고 다 죽어버렸습니다.
인디언들이 도움을 받아 겨우 옥수수를 심고, 거기서 추수한 옥수수 몇 개를 가지고
예배드린 것이, 바로 첫 번째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터뜨리려면 그들에겐 얼마나 많은 이유가 있습니까 ?
신앙생활 잘 해보려고 고국을 떠났는데 사랑하는 사람 절반을 잃었습니다.
먹고살려고 애썼는데 종자들은 그냥 땅에 묻힌 채 마른 싹 하나 틔우질 못했습니다.
맹 추위를 이기려고 사방팔방 다녀봤지만 변변한 옷가지 하나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의 핍박을 피해 하나님 잘 섬기려고 먼바다 건너 온 것인데,
하나님은 뭐 하나 도와주시는 것 같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 청교도들은 주시지 않은 것보다 주신 것을 생각했습니다.
건강을 감사했고, 살아 남은 것에 감사했고, 통나무집이라도 주신 것에 감사했고,
인디언들을 통해서 농사법 배운 것을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어떤 방해나 핍박 없이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간절한 첫 추수감사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고의 능력(생각할 수 있는 복)을 주신 것은,
내게 없는 것들을 찾아내어 불평 불만을 터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지금까지 내게 주신 것을 돌아보고
그 수많은 은혜와 선물들에 대해서 감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
삭개오 당시, 로마는 강력한 힘으로 많은 나라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근동의 나라들은 로마를 떠나서는 살 수 없었고,
삭개오의 나라 유대 역시 로마의 통치아래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그 상황 가운데, 먹고사는 것 해결하려고 로마에 협력하다 보니
어느 새 稅吏長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돈도 벌만큼 벌었고, 재산도 불릴 만큼 불렸습니다.
로마 사람들조차도 자기를 함부로 못합니다.
사실 자기 같은 사람이 없으면 로마도 이 나라를 잘 통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동족들은 자기를 매국노라고 합니다.
동족들의 피를 빨아먹는다고 욕하고 손가락질합니다.
물론 삭개오에게 양심의 가책이 없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민족을 배반한 고통이 있고, 동족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매긴 미안함도 있습니다.
이런 삭개오 역시, 나라가 독립해서 잘 사는 것을 왜 안 바라겠습니까 ?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로마는 너무 강했고, 이스라엘은 약했습니다.
그저 "가족을 위해 무엇이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살다 보니,
어느 새 자기는 남들이 말하는 가장 악독한 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분명 삭개오는 괴로웠을 것입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삭개오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이 곧 삭개오가 살고 있는 여리고에 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사실, 얼마 전부터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예수님의 별명이, '죄인과 세리의 친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삭개오에게는 예수의 제자 중 하나가 자기처럼 세리 출신이라는 것도
커다란 흥미 거리였습니다.(마태-세리)
당시 유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 세리는 가장 악한 죄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리를 제자로 삼은 예수, '죄인과 세리의 친구'인 예수,
그 예수를 생각하면서 삭개오는 인생의 새로운 소망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 소망을 준 예수께 감사한 마음이 넘쳤습니다.
그러므로 여리고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보기 위해
체면 불구하고 뽕나무 위에까지 올라 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많이 나오는 말씀 중에 하나가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이 '기억하라'는 말씀을 그렇게 강조하셨을까요 ?
그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기억하고, 그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기억하라'는 말씀은 '생각하라'는 말씀이고 그것은 곧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어디에서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깊은 생각을 통해 받은 복을 세어보는 모두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풍성한 감사가 넘치고, 그로 인해 더 큰 감사의 조건들로 채움 받는
모든 본향성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삭개오의 감사는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감사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성경 말씀을 소개합니다. 함께 읽어보지요.
데살로니가전서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은 각각의 문장이 독립적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사실은 한 묶음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 세 말씀,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를
한 바구니에 같이 넣어 두셨을까요 ?
그렇습니다. 이 셋이 서로 원인과 결과를 주거니 받거니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기쁨이 오게 되고, 그러면 감사가 따라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감사하면 기뻐지고 그러면 자연 기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뻐하면 기도하게 되고 그 기도는 감사를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셋을 이렇게 저렇게 바꿔도 감사와 기도와 기쁨은 언제나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감사를 느낀다면 거기엔 기쁨이 따라옵니다.
즐거움이 없는 감사란 어쩌면 거짓이거나 아니면 억지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6절에 보면, '삭개오가 즐거워하며 영접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 삭개오를 그토록 즐겁게 했을까요 ?
분명 삭개오의 기쁨의 배후에는 감사와 기도가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사실, 삭개오의 바램은 별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먼발치에서나마 예수님을 한 번 볼 수 있다면 그만이었습니다.
물론 그 분을 대면하고 그 분과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하지만 자기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어림도 없는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보기만 하려고 했던 것인데 그나마 여의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는 길가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키는 너무나 작았습니다.
그냥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그러나 꼭 보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속에 강렬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때 보인 것이 뽕나무였습니다.
유대 뽕나무의 줄기는 짧고, 가지는 넓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지들은 사방 팔방으로 뻗어 있어서 올라가기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사실 어른으로서 또는 사회적 지위를 생각해 보면 이것은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지만
이미 그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이라는 분을 보고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삭개오는 뽕나무 바로 아래를 지나는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곤 곧 이어 꿈에도 생각 못 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떻게 아셨는지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내려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삭개오야 ! 속히 내려오라"(본문5절)
더 놀랄 일은 그 예수님께서 오늘 자기 집에 묵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인생에서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부턴가 자기 주변엔 사람이 다 끊겨버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삭개오는 항상 외롭고 고독했던 날들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더구나 수많은 군중들의 환영을 받는 그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셔서 밤을 지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때때로 우리가 기도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도 기도로 받아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응답해 주시는 자애로운 분이십니다.
예를 들면, 마음에 생각만 했던 것을 말입니다.
오늘 삭개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한 번 만나 보았으면"하는 자기의 막연한 바램을 구체적인 기도로 들으시고,
직접 찾아와 자기 집에 머물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삭개오는 펄쩍 하늘로 치솟을 만큼 기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오늘 삭개오가 즐거워 한 이유는 물질이나 권력이나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머무신다는 것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함께 유하시는 그 자체가 감사했고
거기에 대한 그의 감사표현은 기뻐하고 즐거워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우리 인생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걸음을 인도하셔서 지금 예배하는 자리까지 이끄십니다.
이 놀라운 사실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감사하는 우리 되기 바랍니다.
셋째, 삭개오의 감사는, 표현하는 감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감사한다면 그것은 표현되어야 합니다.
과거 유명한 코미디언이었던 배삼룡씨가
병상에서 외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는 뉴스를 지난주간 보았습니다.
4년 째, 결혼도 뒤로 미루고 아버지를 병상에서 간호하는 딸에게
기자가 어려움을 물었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가끔 나만 생각하면 간호에 지쳐서 어디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면 얼마나 답답하실까 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아버지가 빨리 기운 차리고 일어나셔서 '그동안 수고했다'라고 한마디만 해 주신다면
그 보다 큰 소원이 없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베푸는 쪽에서는 큰 감사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이 담긴 말 한 마디면 만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 삭개오의 감사는 표현하는 감사였습니다.
본문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主よ, わたしは財産の半分を貧しい人 に施します.
また,だれかから何かだまし取っていたら, それを四倍にして返します.)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우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드렸습니다.
또한 나머지 반도 자신의 소유로 남겨두려고 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죄로 인정되는 토색에 대해 배상하는데 쓰려고 했습니다.
더구나 배상에 있어서도,
삭개오는 당시 율법으로 규정한 기준보다 훨씬 넘는 액수를 준비했습니다.
당시 네 배로 배상해야 되는 경우는, 강도가 남의 것을 억지로 탈취한 경우만 해당했습니다.
삭개오처럼 자발적으로 보상한다면 원금에 1/5만 보태서 갚으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 생명을 얻고 나니,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물질이나 그 외의 것은 아무런 미련도 없었습니다.
그런 삭개오를 가리켜 예수님은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사실 오늘 사건은 예수님 편에서나 삭개오 편에서나 아주 단순한 일로 시작됐습니다.
예수님은 한 외로운 영혼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삭개오는 거기에 감사해서 그 감사를 표현한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파장은 참으로 컸습니다.
여리고의 가난한 사람들의 찌든 얼굴엔 오랜만에 밝은 웃음이 퍼졌을 것이고,
뜻밖의 보상으로 넉넉해진 사람들은 오랜만에 살 만한 세상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삭개오란 인물이 어떻게 됐는지는 더 이상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그의 대해서 더 이상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대 기독교사에 여리고의 감독 중에 삭개오란 이름이 나옵니다.
감독이란 초대교회 당시 성자 같은 사람만이 임명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신학자들이 추측하기는 이 사람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삭개오와 동일인물이라고
추측합니다.
삭개오는 분명히 그렇게 믿음의 지도자로서 聖者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은 맥추 감사주일입니다.
한 해의 절반을 은혜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이번 한 주간, 삭개오처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복을 세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헤아릴 수 없는 그 감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표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사를 통해,
우리 주위가 온통 기쁨으로 가득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을 점점 알아 가는 가운데 드리는 당신의 예배,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당신의 예배,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어린이들에게 가끔 묻는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로 올라간 키 작은 사람의 이름은 누구일까요 ?
그렇습니다. 세리장(稅吏長) 삭개오입니다.
저는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아
삭개오에 대한 말씀을 통해 감사에 대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
조금 전 읽은 오늘 본문에 '감사'라는 말이 나왔던가요 ?
그렇지요. 오늘 본문에는 '감사'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을 감사주일의 본문으로 삼은 것은
삭개오(ザアカイ) 속에 온전한 감사가 가득 차있기 때문입니다.
그 삭개오 속에 가득한 감사를 오늘 우리들도 가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삭개오의 감사는 '생각하는 감사'였습니다.
언뜻 생각할 때, 감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별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영어에서 '생각하다'라는 뜻의 'think'와
'감사하다'는 뜻의 'thank'는 어원이 같습니다.
즉, 생각이 없으면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시작 전에 찬양했던 찬송가 489장의 가사를 보십시오.
1절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 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2절 "세상 근심 걱정 너를 누르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갈 때,
주가 네게 주신 복을 세어라 두렴 없이 항상 찬송하리라"
후렴의 가사는 더욱 의미가 분명합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主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여기에서 '복을 세어 보는 것'은 받은 복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결과로 풍성한 감사가 찾아옵니다.
우리들은 청교도(淸敎徒)들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것이 아닌, 오직 믿음생활 하나 제대로 할 수 있으면 願이 없겠다 싶어
그 소원 하나 붙들고 대서양을 건넌 사람들입니다.
변변한 물과 양식도 없이 65일 間을 항해한 끝에 아메리카 신대륙에 도착해 보니
떠날 때 102명이던 사람이 58명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항해 중에 44명이 괴혈병과 각종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배 위에서 죽은 것입니다.
약속의 땅이라고 생각했던 신대륙에 정착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가져 간 종자를 심어 봤더니 보리고 밀이고 다 죽어버렸습니다.
인디언들이 도움을 받아 겨우 옥수수를 심고, 거기서 추수한 옥수수 몇 개를 가지고
예배드린 것이, 바로 첫 번째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터뜨리려면 그들에겐 얼마나 많은 이유가 있습니까 ?
신앙생활 잘 해보려고 고국을 떠났는데 사랑하는 사람 절반을 잃었습니다.
먹고살려고 애썼는데 종자들은 그냥 땅에 묻힌 채 마른 싹 하나 틔우질 못했습니다.
맹 추위를 이기려고 사방팔방 다녀봤지만 변변한 옷가지 하나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의 핍박을 피해 하나님 잘 섬기려고 먼바다 건너 온 것인데,
하나님은 뭐 하나 도와주시는 것 같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 청교도들은 주시지 않은 것보다 주신 것을 생각했습니다.
건강을 감사했고, 살아 남은 것에 감사했고, 통나무집이라도 주신 것에 감사했고,
인디언들을 통해서 농사법 배운 것을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어떤 방해나 핍박 없이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토록 간절한 첫 추수감사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고의 능력(생각할 수 있는 복)을 주신 것은,
내게 없는 것들을 찾아내어 불평 불만을 터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지금까지 내게 주신 것을 돌아보고
그 수많은 은혜와 선물들에 대해서 감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
삭개오 당시, 로마는 강력한 힘으로 많은 나라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근동의 나라들은 로마를 떠나서는 살 수 없었고,
삭개오의 나라 유대 역시 로마의 통치아래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그 상황 가운데, 먹고사는 것 해결하려고 로마에 협력하다 보니
어느 새 稅吏長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돈도 벌만큼 벌었고, 재산도 불릴 만큼 불렸습니다.
로마 사람들조차도 자기를 함부로 못합니다.
사실 자기 같은 사람이 없으면 로마도 이 나라를 잘 통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동족들은 자기를 매국노라고 합니다.
동족들의 피를 빨아먹는다고 욕하고 손가락질합니다.
물론 삭개오에게 양심의 가책이 없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민족을 배반한 고통이 있고, 동족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매긴 미안함도 있습니다.
이런 삭개오 역시, 나라가 독립해서 잘 사는 것을 왜 안 바라겠습니까 ?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로마는 너무 강했고, 이스라엘은 약했습니다.
그저 "가족을 위해 무엇이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살다 보니,
어느 새 자기는 남들이 말하는 가장 악독한 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분명 삭개오는 괴로웠을 것입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삭개오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이 곧 삭개오가 살고 있는 여리고에 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사실, 얼마 전부터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예수님의 별명이, '죄인과 세리의 친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삭개오에게는 예수의 제자 중 하나가 자기처럼 세리 출신이라는 것도
커다란 흥미 거리였습니다.(마태-세리)
당시 유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 세리는 가장 악한 죄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리를 제자로 삼은 예수, '죄인과 세리의 친구'인 예수,
그 예수를 생각하면서 삭개오는 인생의 새로운 소망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 소망을 준 예수께 감사한 마음이 넘쳤습니다.
그러므로 여리고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보기 위해
체면 불구하고 뽕나무 위에까지 올라 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많이 나오는 말씀 중에 하나가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이 '기억하라'는 말씀을 그렇게 강조하셨을까요 ?
그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기억하고, 그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기억하라'는 말씀은 '생각하라'는 말씀이고 그것은 곧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어디에서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깊은 생각을 통해 받은 복을 세어보는 모두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풍성한 감사가 넘치고, 그로 인해 더 큰 감사의 조건들로 채움 받는
모든 본향성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삭개오의 감사는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감사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성경 말씀을 소개합니다. 함께 읽어보지요.
데살로니가전서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은 각각의 문장이 독립적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사실은 한 묶음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 세 말씀,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를
한 바구니에 같이 넣어 두셨을까요 ?
그렇습니다. 이 셋이 서로 원인과 결과를 주거니 받거니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기쁨이 오게 되고, 그러면 감사가 따라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감사하면 기뻐지고 그러면 자연 기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뻐하면 기도하게 되고 그 기도는 감사를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셋을 이렇게 저렇게 바꿔도 감사와 기도와 기쁨은 언제나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감사를 느낀다면 거기엔 기쁨이 따라옵니다.
즐거움이 없는 감사란 어쩌면 거짓이거나 아니면 억지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6절에 보면, '삭개오가 즐거워하며 영접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 삭개오를 그토록 즐겁게 했을까요 ?
분명 삭개오의 기쁨의 배후에는 감사와 기도가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사실, 삭개오의 바램은 별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먼발치에서나마 예수님을 한 번 볼 수 있다면 그만이었습니다.
물론 그 분을 대면하고 그 분과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하지만 자기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어림도 없는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보기만 하려고 했던 것인데 그나마 여의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는 길가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키는 너무나 작았습니다.
그냥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그러나 꼭 보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속에 강렬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때 보인 것이 뽕나무였습니다.
유대 뽕나무의 줄기는 짧고, 가지는 넓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지들은 사방 팔방으로 뻗어 있어서 올라가기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사실 어른으로서 또는 사회적 지위를 생각해 보면 이것은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지만
이미 그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이라는 분을 보고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삭개오는 뽕나무 바로 아래를 지나는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곤 곧 이어 꿈에도 생각 못 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떻게 아셨는지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내려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삭개오야 ! 속히 내려오라"(본문5절)
더 놀랄 일은 그 예수님께서 오늘 자기 집에 묵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인생에서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부턴가 자기 주변엔 사람이 다 끊겨버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삭개오는 항상 외롭고 고독했던 날들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더구나 수많은 군중들의 환영을 받는 그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셔서 밤을 지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때때로 우리가 기도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도 기도로 받아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응답해 주시는 자애로운 분이십니다.
예를 들면, 마음에 생각만 했던 것을 말입니다.
오늘 삭개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한 번 만나 보았으면"하는 자기의 막연한 바램을 구체적인 기도로 들으시고,
직접 찾아와 자기 집에 머물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삭개오는 펄쩍 하늘로 치솟을 만큼 기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오늘 삭개오가 즐거워 한 이유는 물질이나 권력이나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머무신다는 것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함께 유하시는 그 자체가 감사했고
거기에 대한 그의 감사표현은 기뻐하고 즐거워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우리 인생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걸음을 인도하셔서 지금 예배하는 자리까지 이끄십니다.
이 놀라운 사실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감사하는 우리 되기 바랍니다.
셋째, 삭개오의 감사는, 표현하는 감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감사한다면 그것은 표현되어야 합니다.
과거 유명한 코미디언이었던 배삼룡씨가
병상에서 외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는 뉴스를 지난주간 보았습니다.
4년 째, 결혼도 뒤로 미루고 아버지를 병상에서 간호하는 딸에게
기자가 어려움을 물었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가끔 나만 생각하면 간호에 지쳐서 어디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면 얼마나 답답하실까 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아버지가 빨리 기운 차리고 일어나셔서 '그동안 수고했다'라고 한마디만 해 주신다면
그 보다 큰 소원이 없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베푸는 쪽에서는 큰 감사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이 담긴 말 한 마디면 만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 삭개오의 감사는 표현하는 감사였습니다.
본문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主よ, わたしは財産の半分を貧しい人 に施します.
また,だれかから何かだまし取っていたら, それを四倍にして返します.)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우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드렸습니다.
또한 나머지 반도 자신의 소유로 남겨두려고 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죄로 인정되는 토색에 대해 배상하는데 쓰려고 했습니다.
더구나 배상에 있어서도,
삭개오는 당시 율법으로 규정한 기준보다 훨씬 넘는 액수를 준비했습니다.
당시 네 배로 배상해야 되는 경우는, 강도가 남의 것을 억지로 탈취한 경우만 해당했습니다.
삭개오처럼 자발적으로 보상한다면 원금에 1/5만 보태서 갚으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 생명을 얻고 나니,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물질이나 그 외의 것은 아무런 미련도 없었습니다.
그런 삭개오를 가리켜 예수님은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사실 오늘 사건은 예수님 편에서나 삭개오 편에서나 아주 단순한 일로 시작됐습니다.
예수님은 한 외로운 영혼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삭개오는 거기에 감사해서 그 감사를 표현한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파장은 참으로 컸습니다.
여리고의 가난한 사람들의 찌든 얼굴엔 오랜만에 밝은 웃음이 퍼졌을 것이고,
뜻밖의 보상으로 넉넉해진 사람들은 오랜만에 살 만한 세상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삭개오란 인물이 어떻게 됐는지는 더 이상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그의 대해서 더 이상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대 기독교사에 여리고의 감독 중에 삭개오란 이름이 나옵니다.
감독이란 초대교회 당시 성자 같은 사람만이 임명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신학자들이 추측하기는 이 사람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삭개오와 동일인물이라고
추측합니다.
삭개오는 분명히 그렇게 믿음의 지도자로서 聖者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은 맥추 감사주일입니다.
한 해의 절반을 은혜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이번 한 주간, 삭개오처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복을 세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헤아릴 수 없는 그 감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표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사를 통해,
우리 주위가 온통 기쁨으로 가득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