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008년6월29일, 아모스5:21-2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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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계신 복스러운 지체들을 축복합시다.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 더 인복(人福)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계절을 좋아하십니까 ?
저는 겨울이 좋습니다. 제가 겨울에 태어난 것도 있지만,
저의 어릴 적 겨울을 떠올려 보면 아름다운 추억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느 해 겨울, 평소 무뚝뚝하던 아버지가 대장간에서 만들어다 주셨던,
특제(特製) 썰매를 타고 어름 판 위를 씽씽 달릴 때,
친구들이 부러워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참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겨울 토끼 사냥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
눈밭에서의 토끼들은 참 빠릅니다. 그래서 토끼를 잡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토끼를 잡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산등성이 양쪽에서 골짜기로 토끼를 모는 겁니다.
한 번에 대량으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인데 문제는 사람이 많아야 된다는 겁니다.
또 한가지 방법은 토끼가 잘 다니는 길에 올무를 놓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토끼는 달리는 속도나 그 잽싸기로는 우리 사람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토끼는 자기가 다니는 길로만 다닙니다.
평소에 다니는 길이 아니면 절대로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토끼 발자국이 보이면 그 길목에다가 올무를 둡니다.
한 두 시간쯤 후에 가 보면 대개의 경우 토끼가 걸려 있습니다.
토끼사냥을 잘 하는 분들은 그 길목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한 가지 의문이 있지 않습니까 ?
"토끼들은 왜 바보같이 다니는 길로만 다녀 잡히고 말지요 ?"
그런데 여러분 ! 토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들 숨바꼭질하는 것을 보면, 대개 숨는 곳에 또 숨습니다.
가위 바위 보도 그렇습니다. 대개 먼저 내는 것 꼭 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런 것들을 통해, 철이 들어가면서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이미 익숙해진 것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지금 우리들에게 익숙한 것들을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지금보다 더욱 복된 삶을 위해서는 그 한 가지를 바꿔야 하는데,
오랫동안 그 일에 익숙해 져 있어서 바꾸지 못하는 것이 없는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약 2800년 전 이야기입니다.
양 치던 목자이자 뽕나무를 가꾸는 농부였던 아모스를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아모스를 통해, 당시 백성들에게 익숙해 있었던,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던 것을 바꾸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
그렇습니다. 제사, 즉 예배였습니다.
여러분 ! 예배드리는 것이 서투십니까 ? 아니면 익숙하십니까 ?
지금 우리들이 예배에 익숙해 있는 것처럼,
본문의 아모스 시대의 사람들을 제사에 매우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 때로부터 약 2천 년 이상 제사를 드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사하면 모두가 전문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그들이 가장 잘 알고있다고 느꼈을 제사의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셨습니다.
아마도 백성들은 아모스의 지적에 이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잘 드리고 있는 이 제사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까 ?"
오늘 날 우리들도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목사님 ! 잘 드리고 있는 예배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까 ?"
우리들이 잘 아는, 요한복음4장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가운데,
예배에 대한 매우 중요한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父はこのように禮拜する者を求めておられる"(요한복음4:23)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충격적인 것은,
아모스 때나, 예수님 때나, 그리고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예배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지금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2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아모스 선지자 당시, 택한 백성들을 통해 수많은 예배가 드려졌지만,
그 예배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 예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금식하고, 소 잡고 양 잡아서 번제를 드렸지만,
거기엔 그들의 中心이 빠져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23절을 보십시오.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찬양대의 찬양과, 피아노와 모든 악기 연주도 그만두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우리 신분이나 외모, 또는 예배 형식이나 절차가 아닌,
오직 우리의 中心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드리는 가 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인류 역사의 가장 초창기로부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와 그렇지 않은 예배를 분명히 구분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였고, 가인의 제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의 여러 歷史 속에서도 바른 예배드림을 무척 강조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시대(이사야1:11-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미가 시대(미가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말라기 시대(말라기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예수님도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드리는 예배를 통렬하게 비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지금도 주일, 평일 구분 할 것 없이, 이 땅에서는 수많은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아닙니다.
자 ! 그렇다면 어떤 예배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예배일까요 ?
혹, 오늘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 앞에 잘 못된 것은 없을까요 ?
앞에서 소개한 잘못된 예배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의 예배에는 세 가지가 빠져 있었습니다.
마음이 빠져 있었고, 양심이 빠져 있었고, 순종이 빠져 있었습니다.
첫째, 마음이 빠진 예배는 어떤 예배를 말하는 것일까요 ?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마가복음7: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말로만 아무리 "주님 ! 영광 받으소서 !"하면 뭐합니까 ? 마음이 빠졌는데요.
그렇다면 마음이 빠졌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
우리들은 흔히 마음이라고 하면 감정을 생각합니다.
마음이 뭉클 하다든지 소름이 끼친다든가 그런 감정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마음이라는 것은 感情的인 부분보다는
知的인 요소로 보는 경향이 더 강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가복음12:30)는 말씀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입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너의 모든 심장(heart)과, 너의 모든 혼(soul)과,
너의 모든 마음(mind)과, 너의 모든 힘(strength)을 다하여 主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우리의 마음을 'heart'(심장, 감정, 기분)라고 하지 않고,
'mind'(知性, 知力)라고 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루디아가 바울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14절을 보면,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여셨다는 것은, 루디아가 바울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즉 여기서 마음은,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감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자각(自覺)이나 발견 같은 지적(知的)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7:3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영생(永生, 구원)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永遠の命とは,唯一のまことの神であられるあなたと,
あなたのお遣わしになったイエス·キリストを知ることです.)
그렇습니다.
영생 즉 구원은 우선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知的인 요소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코 감정이 아닙니다.
결국 마음이 빠진 예배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결핍된 예배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모르고 예배당에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모르는 대상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습니까 ?
없지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도 잘 모르고, 그분이 뭘 기뻐하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존경하고 어떻게 예배합니까 ?
가인이 실패한 예배를 드렸던 것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한지 얼마 되지 않은 분과 오랜 신앙생활한지 오래 된 분은
그 예배의 모습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앉아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수준의 예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분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예배는 매주 마다 더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해질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어느 정도나 알고 계십니까 ?
성령은 누구십니까 ?
만약, 잘 모른다 대답하시면, 우리는 마음이 빠진 예배를 드리기 쉽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교회 한 두 번 왔다가 오지 않습니까 ?
아니 어떤 사람들은 한 동안 교회를 다니다가 갑자기 그만둡니까 ?
그렇습니다.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
세상사람들이 교회에 약간의 관심과 매력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또 설교자에 대해서도 약간의 매력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내적인 고통과 갈등 때문에 어떻게 위안을 얻어볼까 하고
교회를 다녀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이 없고,
성경을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없으며,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울 마음이 없으면,
좀처럼 온전한 신앙인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
성경을, 예수님을 알아가고 싶은 쪽입니까 ? 아닙니까 ?
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주일예배 외에도,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각종 성경공부 등의 시간을 주셨을까요 ?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성경에 대한 지식을 늘려 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 조상들은 天地神明에게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물을 떠놓고,
온 정성을 다해 자신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
그렇게 해야 천지신명이 감동해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
혹시 천지신명에게 기도하는 것 같은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지를
성경을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양심이 빠진 예배는 어떤 예배를 말하는 것일까요 ?
아모스2:8절에 보면 당시 양심 없는 예배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단(壇) 옆에서 전당(典當)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神(하나님)의 전(聖殿)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彼らは, すべての祭壇のそばで, 質に取った着物の上に橫たわり,
罰金で取り立てたぶどう酒を彼らの神の宮で飮んでいる.)
예배를 드린다는 사람들이, 제단 옆에서 전당(典當)잡은 옷을 깔고 누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법은 전당잡은 옷은 저녁때는 돌려주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옷이 이불이고 요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강제로 빼앗은 것을 가지고 나와 취해 제사를 드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속에는 악이 가득하면서,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고, 은혜 받는 척 합니다.
도무지 양심이라고는 찾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한 주간을 살면서 결코 죄와 무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죄 짓고 삽니다.
저를 비롯한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죄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깨끗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것일까요 ?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정결한 예배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회개를 통해 가능합니다.
죄인이었던 다윗은 시편51:16-1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主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主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たとい私がささげても, まことに, あなたはいけにえを喜ばれません.
全燒のいけにえを, 望まれません.
神へのいけにえは碎かれたたましい.
碎かれた, 悔いた心. 神よ. あなたは, それをさげすまれません.)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한 주간에 지은 자신의 죄로 통회하는 마음이 있는 예배,
바로 그 예배가 양심이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자신의 죄로 통회하셨습니까 ?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두려워서,
남들이 보건 말건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눈물 흘리는
그 양심이 있었습니까 ?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지나간 일주일에 대해서 통탄해 하고 벌벌 떠는 그 마음이 한 자락이라도 있었습니까 ?
여러분 ! 한 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만약 그런 눈물이 있다면, 주일 날, 언제 그런 기도를 하시나요 ?
물론 예배 기도자의 기도에는 회개의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기도로 여러분의 한 주간의 죄가 없어진다고 생각합니까 ?
아니지요, 자기 자신이 회개하며 기도해야지요.
그런데 언제 참회하시나요 ? 언제 회개기도 하시나요 ?
사랑하는 여러분 !
왜 우리가 예배 시간 전에 일찍 와서 기도해야 합니까 ?
그렇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한 주간의 죄를 고백하며, 양심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배에 앞서서 깨끗한 양심을 가질 수 있도록 통회해야 합니다.
그 예배야말로 주님이 받으실 예배입니다.
셋째, 순종이 빠진 예배는 어떤 예배를 말하는 것일까요 ?
순종이 빠진 예배란 예배와 삶이 일치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24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公義の水のように, 正義をいつも水の流れる川のように, 流れさせよ.)
우리의 삶이 공정하고 정의로우냐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예배는
예배를 통해 듣고 깨달은 말씀을 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로마서12:1-2절을 보겠습니다.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自分の體を神に喜ばれる聖なる生けるいけにえとして捧げなさい.
これこそ, あなたがたのなすべき禮拜です.
あなたがたはこの世に倣ってはなりません.
むしろ, 心を新たにして自分を變えていただき,
何が神の御心であるか, 何が善いことで, 神に喜ばれ,
また完全なことであるかをわきまえるようになりなさい."
성도여러분 !
우리는 예배와 내 삶이 일치가 되도록 뼈를 깎는 신앙의 노력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오늘 말씀대로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는" 모습이 되기까지 변화되어야 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익숙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익숙한 일이 사실은 많이 잘못되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느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공로가 있습니다.
분명 우리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볼 때도 너무나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알아보려고 성경을 펼쳐도 잘 모르는 말씀이 많고,
또 내 양심을 봐도 오염된 부분이 많으며,
교회 안과 교회 밖에서의 내 삶이 다른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에게는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공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모든 것은 정결케 되고,
또한 그러한 상한 심령의 예배를 주님은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혹 우리의 삶이 모순투성이라도 십자가 때문에 그 예배는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
이제부터 예배드릴 때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겠다고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결단은 매 예배시간마다 필요합니다.
저는 지금도 분명히 확신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단 한 번의 예배로도 우리의 생애는 놀랍게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놀라운 일이 가능할까요 ?
그것은,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당신을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시고,
또 그 사람을 통해 온전한 예배를 받으시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하늘과 땅의 것을 폭포수처럼 넘치게 쏟아 부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가 마음을 다해 예배드릴 때, 우리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성을 다해 예배드릴 때, 죄 사함 받는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다해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허락하십니다.
오늘부터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서 깊이,
더 새로운 예배를 드림으로 이 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 더 인복(人福)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계절을 좋아하십니까 ?
저는 겨울이 좋습니다. 제가 겨울에 태어난 것도 있지만,
저의 어릴 적 겨울을 떠올려 보면 아름다운 추억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느 해 겨울, 평소 무뚝뚝하던 아버지가 대장간에서 만들어다 주셨던,
특제(特製) 썰매를 타고 어름 판 위를 씽씽 달릴 때,
친구들이 부러워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참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겨울 토끼 사냥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
눈밭에서의 토끼들은 참 빠릅니다. 그래서 토끼를 잡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토끼를 잡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산등성이 양쪽에서 골짜기로 토끼를 모는 겁니다.
한 번에 대량으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인데 문제는 사람이 많아야 된다는 겁니다.
또 한가지 방법은 토끼가 잘 다니는 길에 올무를 놓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토끼는 달리는 속도나 그 잽싸기로는 우리 사람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토끼는 자기가 다니는 길로만 다닙니다.
평소에 다니는 길이 아니면 절대로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토끼 발자국이 보이면 그 길목에다가 올무를 둡니다.
한 두 시간쯤 후에 가 보면 대개의 경우 토끼가 걸려 있습니다.
토끼사냥을 잘 하는 분들은 그 길목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한 가지 의문이 있지 않습니까 ?
"토끼들은 왜 바보같이 다니는 길로만 다녀 잡히고 말지요 ?"
그런데 여러분 ! 토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들 숨바꼭질하는 것을 보면, 대개 숨는 곳에 또 숨습니다.
가위 바위 보도 그렇습니다. 대개 먼저 내는 것 꼭 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런 것들을 통해, 철이 들어가면서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이미 익숙해진 것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지금 우리들에게 익숙한 것들을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지금보다 더욱 복된 삶을 위해서는 그 한 가지를 바꿔야 하는데,
오랫동안 그 일에 익숙해 져 있어서 바꾸지 못하는 것이 없는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약 2800년 전 이야기입니다.
양 치던 목자이자 뽕나무를 가꾸는 농부였던 아모스를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아모스를 통해, 당시 백성들에게 익숙해 있었던,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던 것을 바꾸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
그렇습니다. 제사, 즉 예배였습니다.
여러분 ! 예배드리는 것이 서투십니까 ? 아니면 익숙하십니까 ?
지금 우리들이 예배에 익숙해 있는 것처럼,
본문의 아모스 시대의 사람들을 제사에 매우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 때로부터 약 2천 년 이상 제사를 드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사하면 모두가 전문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그들이 가장 잘 알고있다고 느꼈을 제사의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셨습니다.
아마도 백성들은 아모스의 지적에 이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잘 드리고 있는 이 제사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까 ?"
오늘 날 우리들도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목사님 ! 잘 드리고 있는 예배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까 ?"
우리들이 잘 아는, 요한복음4장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가운데,
예배에 대한 매우 중요한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父はこのように禮拜する者を求めておられる"(요한복음4:23)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충격적인 것은,
아모스 때나, 예수님 때나, 그리고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예배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지금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2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아모스 선지자 당시, 택한 백성들을 통해 수많은 예배가 드려졌지만,
그 예배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 예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금식하고, 소 잡고 양 잡아서 번제를 드렸지만,
거기엔 그들의 中心이 빠져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23절을 보십시오.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찬양대의 찬양과, 피아노와 모든 악기 연주도 그만두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우리 신분이나 외모, 또는 예배 형식이나 절차가 아닌,
오직 우리의 中心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드리는 가 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인류 역사의 가장 초창기로부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와 그렇지 않은 예배를 분명히 구분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였고, 가인의 제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의 여러 歷史 속에서도 바른 예배드림을 무척 강조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시대(이사야1:11-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미가 시대(미가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말라기 시대(말라기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예수님도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드리는 예배를 통렬하게 비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지금도 주일, 평일 구분 할 것 없이, 이 땅에서는 수많은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아닙니다.
자 ! 그렇다면 어떤 예배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예배일까요 ?
혹, 오늘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 앞에 잘 못된 것은 없을까요 ?
앞에서 소개한 잘못된 예배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의 예배에는 세 가지가 빠져 있었습니다.
마음이 빠져 있었고, 양심이 빠져 있었고, 순종이 빠져 있었습니다.
첫째, 마음이 빠진 예배는 어떤 예배를 말하는 것일까요 ?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마가복음7: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말로만 아무리 "주님 ! 영광 받으소서 !"하면 뭐합니까 ? 마음이 빠졌는데요.
그렇다면 마음이 빠졌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
우리들은 흔히 마음이라고 하면 감정을 생각합니다.
마음이 뭉클 하다든지 소름이 끼친다든가 그런 감정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마음이라는 것은 感情的인 부분보다는
知的인 요소로 보는 경향이 더 강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가복음12:30)는 말씀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입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너의 모든 심장(heart)과, 너의 모든 혼(soul)과,
너의 모든 마음(mind)과, 너의 모든 힘(strength)을 다하여 主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우리의 마음을 'heart'(심장, 감정, 기분)라고 하지 않고,
'mind'(知性, 知力)라고 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루디아가 바울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14절을 보면,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여셨다는 것은, 루디아가 바울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즉 여기서 마음은,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감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자각(自覺)이나 발견 같은 지적(知的)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7:3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영생(永生, 구원)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永遠の命とは,唯一のまことの神であられるあなたと,
あなたのお遣わしになったイエス·キリストを知ることです.)
그렇습니다.
영생 즉 구원은 우선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知的인 요소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코 감정이 아닙니다.
결국 마음이 빠진 예배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결핍된 예배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모르고 예배당에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모르는 대상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습니까 ?
없지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도 잘 모르고, 그분이 뭘 기뻐하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존경하고 어떻게 예배합니까 ?
가인이 실패한 예배를 드렸던 것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한지 얼마 되지 않은 분과 오랜 신앙생활한지 오래 된 분은
그 예배의 모습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앉아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수준의 예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분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예배는 매주 마다 더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해질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어느 정도나 알고 계십니까 ?
성령은 누구십니까 ?
만약, 잘 모른다 대답하시면, 우리는 마음이 빠진 예배를 드리기 쉽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교회 한 두 번 왔다가 오지 않습니까 ?
아니 어떤 사람들은 한 동안 교회를 다니다가 갑자기 그만둡니까 ?
그렇습니다.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
세상사람들이 교회에 약간의 관심과 매력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또 설교자에 대해서도 약간의 매력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내적인 고통과 갈등 때문에 어떻게 위안을 얻어볼까 하고
교회를 다녀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이 없고,
성경을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없으며,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울 마음이 없으면,
좀처럼 온전한 신앙인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
성경을, 예수님을 알아가고 싶은 쪽입니까 ? 아닙니까 ?
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주일예배 외에도,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각종 성경공부 등의 시간을 주셨을까요 ?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성경에 대한 지식을 늘려 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 조상들은 天地神明에게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물을 떠놓고,
온 정성을 다해 자신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
그렇게 해야 천지신명이 감동해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
혹시 천지신명에게 기도하는 것 같은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지를
성경을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양심이 빠진 예배는 어떤 예배를 말하는 것일까요 ?
아모스2:8절에 보면 당시 양심 없는 예배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단(壇) 옆에서 전당(典當)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神(하나님)의 전(聖殿)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彼らは, すべての祭壇のそばで, 質に取った着物の上に橫たわり,
罰金で取り立てたぶどう酒を彼らの神の宮で飮んでいる.)
예배를 드린다는 사람들이, 제단 옆에서 전당(典當)잡은 옷을 깔고 누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법은 전당잡은 옷은 저녁때는 돌려주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옷이 이불이고 요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강제로 빼앗은 것을 가지고 나와 취해 제사를 드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속에는 악이 가득하면서,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고, 은혜 받는 척 합니다.
도무지 양심이라고는 찾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한 주간을 살면서 결코 죄와 무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죄 짓고 삽니다.
저를 비롯한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죄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깨끗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것일까요 ?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정결한 예배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회개를 통해 가능합니다.
죄인이었던 다윗은 시편51:16-1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主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主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たとい私がささげても, まことに, あなたはいけにえを喜ばれません.
全燒のいけにえを, 望まれません.
神へのいけにえは碎かれたたましい.
碎かれた, 悔いた心. 神よ. あなたは, それをさげすまれません.)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한 주간에 지은 자신의 죄로 통회하는 마음이 있는 예배,
바로 그 예배가 양심이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자신의 죄로 통회하셨습니까 ?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두려워서,
남들이 보건 말건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눈물 흘리는
그 양심이 있었습니까 ?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지나간 일주일에 대해서 통탄해 하고 벌벌 떠는 그 마음이 한 자락이라도 있었습니까 ?
여러분 ! 한 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만약 그런 눈물이 있다면, 주일 날, 언제 그런 기도를 하시나요 ?
물론 예배 기도자의 기도에는 회개의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기도로 여러분의 한 주간의 죄가 없어진다고 생각합니까 ?
아니지요, 자기 자신이 회개하며 기도해야지요.
그런데 언제 참회하시나요 ? 언제 회개기도 하시나요 ?
사랑하는 여러분 !
왜 우리가 예배 시간 전에 일찍 와서 기도해야 합니까 ?
그렇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한 주간의 죄를 고백하며, 양심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배에 앞서서 깨끗한 양심을 가질 수 있도록 통회해야 합니다.
그 예배야말로 주님이 받으실 예배입니다.
셋째, 순종이 빠진 예배는 어떤 예배를 말하는 것일까요 ?
순종이 빠진 예배란 예배와 삶이 일치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24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公義の水のように, 正義をいつも水の流れる川のように, 流れさせよ.)
우리의 삶이 공정하고 정의로우냐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예배는
예배를 통해 듣고 깨달은 말씀을 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로마서12:1-2절을 보겠습니다.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自分の體を神に喜ばれる聖なる生けるいけにえとして捧げなさい.
これこそ, あなたがたのなすべき禮拜です.
あなたがたはこの世に倣ってはなりません.
むしろ, 心を新たにして自分を變えていただき,
何が神の御心であるか, 何が善いことで, 神に喜ばれ,
また完全なことであるかをわきまえるようになりなさい."
성도여러분 !
우리는 예배와 내 삶이 일치가 되도록 뼈를 깎는 신앙의 노력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오늘 말씀대로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는" 모습이 되기까지 변화되어야 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익숙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익숙한 일이 사실은 많이 잘못되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느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공로가 있습니다.
분명 우리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볼 때도 너무나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알아보려고 성경을 펼쳐도 잘 모르는 말씀이 많고,
또 내 양심을 봐도 오염된 부분이 많으며,
교회 안과 교회 밖에서의 내 삶이 다른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에게는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공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모든 것은 정결케 되고,
또한 그러한 상한 심령의 예배를 주님은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혹 우리의 삶이 모순투성이라도 십자가 때문에 그 예배는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
이제부터 예배드릴 때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겠다고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결단은 매 예배시간마다 필요합니다.
저는 지금도 분명히 확신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단 한 번의 예배로도 우리의 생애는 놀랍게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놀라운 일이 가능할까요 ?
그것은,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당신을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시고,
또 그 사람을 통해 온전한 예배를 받으시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하늘과 땅의 것을 폭포수처럼 넘치게 쏟아 부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가 마음을 다해 예배드릴 때, 우리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성을 다해 예배드릴 때, 죄 사함 받는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다해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허락하십니다.
오늘부터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서 깊이,
더 새로운 예배를 드림으로 이 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