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008년9월7일, 누가복음24:44-49(이 城에 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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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계신 복스러운 지체들을 축복합시다.
당신이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순간,
그 문제는 더 이상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가 됩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친구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날 밤,
두려움에 떨며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사랑하는 제자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직간접으로 확인했던 제자들은
主님의 부활을 좀처럼 믿지 못했습니다.
"혹 귀신이나 유령이 아닐까"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24:38-39)
"なぜ, うろたえているのか. どうして心に疑いを起こすのか. わたしの手や足を見なさい.
まさしくわたしだ. 觸ってよく見なさい.
亡靈には肉も骨もないが, あなたがたに見えるとおり, わたしにはそれがある."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심으로 자신의 부활을 확실하게 증명해 보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깨닫게 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본문45절,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そしてイエスは, 聖書を悟らせるために彼らの心の目を開いた.")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면 먼저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 어떤 비밀, 놀라운 소리, 기적의 소리, 심지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도
마음이 열려져 있지 않으면 그 소리, 음성, 진리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튼튼하고 가장 견고한 자물쇠는
미국, 독일, 이스라엘 등에서 만든 것들이라고 합니다.
아무나 함부로 열지 못하는 것이 견고한 자물쇠입니다.
그러나 열쇠 전문가들은 간단한 쇠꼬챙이 하나로 이 모든 열쇠를 열 수 있다고 합니다.
자동차, 아파트, 사무실 심지어 금고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서는 그 누구도 쉽게 열지 못하는 자물쇠가 있습니다.
그것은 꼭 닫아버린 인간의 마음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3: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見よ, わたしは戶口に立って, たたいている.
だれかわたしの聲を聞いて戶を開ける者があれば,
わたしは中に入ってその者と共に食事をし, 彼もまた, わたしと共に食事をするであろう."
예수님이 우리들의 마음 문을 열고 들어올 만한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의지로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마음의 문이 닫혀진 상태에서는 성경도, 설교도 깨달음이 없습니다.
설교를 들으며 졸고 있는 신자,
성경을 읽으며 하품만 연속하는 신자,
매 주일 설교를 들어도 감동이 없는 사람은
그 마음이 무엇인가로 막혀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스스로 마음을 닫아걸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 !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 말씀 앞에 마음을 닫을까요 ?
첫째, 우리의 마음을 닫아거는 최우선의 적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대개 경험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보다는 중학생이 더 아는 척합니다.
경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중학생보다는 고등학생, 대학생이 더 아는 척합니다.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축적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성향도 비슷합니다.
새로운 성도들보다는 신앙을 오래한 지체들이 교만합니다.
직분을 가지지 않은 분보다 직분을 가진 사람이 교만합니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는
여기저기 다녀보면서 성경을 조금이라도 배웠던 사람이 훨씬 교만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 안다. 이미 알고 있다. 이미 들었다'는
잘못된 경험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고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중병입니다. 이런 중병은 빨리 수술하여 고쳐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넉넉하다. 부유하다. 부족한 것이 없다."(요한계시록3:17)
"わたしは金持ちだ. 滿ち足りている. 何一つ必要な物はない."
그러나 실상은 그들은 영적(靈的) 앉은뱅이요 또한 거지였습니다.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3:17,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을 것을 알지 못하도다"
"自分が慘めな者, 哀れな者, 貧しい者, 目の見えない者,
裸の者であることが分かっていない."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번 교회설립10주년 특별예배를 통해,
우리 본향의 지체 각각에게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넉넉하다, 부유하다, 부족한 것이 없다"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우리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부어질 수 있도록,
크게 소망하고 사모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의 마음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막는 장벽은 잡념입니다.
잡념이란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몸은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그 마음은 동네방네 동서남북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있는 사람,
찬송 부르고 기도를 하고 설교를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는 떠오르지 않고 다른 것들만 오락가락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 잡념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에게 잡념이 많으면 그는 결코 실력 있는 학생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 생활에 잡념이 많으면 당연히 말씀을 제대로 듣질 못하게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강단을 바라보는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짐을 반복한다면
우리는 이미 잡념에 빠져있는 뒤떨어진 신앙인 인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의 마음도 특히 이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전적으로 신뢰하며 따랐던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죽음, 부활에 대한 여러 가지의 소문들,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대제사장 측근들에 대한 두려움,
빌라도를 중심으로 한 로마 군대의 움직임 등
어느 것 하나도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불안과 잡념 등으로 닫혀버린 그들의 마음을 여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복잡하고 어수선한 때,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
그 때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나아갈 길을 깨닫습니다.
또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가 임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것저것 복잡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성경 공부할 시간보다 세상의 복잡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더 나아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
하나님 말씀 속에 길이 있고,
하나님 말씀 속에 지혜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 속에 능력이 있습니다.
어렵고, 복잡하고, 어수선하고, 답답할수록 성경을 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오히려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 문을 열고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한참 말씀을 가르치시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축복하시길,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입으라"하십니다.
본문4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わたしは, 父が約束されたものをあなたがたに送る.
高い所からの力に覆われるまでは, 都にとどまっていなさい."
여기서 우리는 능력에 대한 두 가지를 주목하여야 합니다.
첫째, 능력은 위로부터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육체의 힘은 땅에서 생겨납니다. 음식을 잘 먹고, 운동을 잘하면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영혼의 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정말로 필요한 힘은 위에서 임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마리아에게도, 바울에게도 임한 것도 위로부터 내린 능력이었습니다.
그 능력이 그들을 위대한 사명자로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능력자로 만듭니다.
이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는 모든 본향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그 능력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좋은 옷도 입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뜨겁고 강한 성령의 능력이 위로부터 임할 때
그 능력을 내가 입어야 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오늘 본문에서,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입는다'는 말과 '입힌다'는 말은 전혀 다릅니다.
입는 것은 내가 혹은 남이 스스로 입는 것이고,
입힌다는 것은 누군가가 나를 혹은 남을 입혀 주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내가 입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죄 사함 받는 것도, 능력 입는 것도, 그리고 믿음을 갖는 것도 실은 내가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여러분 !
오늘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을 하나님의 은혜로 덧입는 여러분 모두가 되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그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高い所からの力に覆われるまでは, 都にとどまっていなさい.)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이 성'은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120명의 성도들만 이 능력을 입히움 받았습니다.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줍니다.
익숙하지 않더라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갈릴리지방 사람들이었던 제자들로서는 예루살렘이 익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법 관행을 따지는 예루살렘보다는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갈릴리 바다가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안 계신 예루살렘은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1:4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벗하며 살다가 교회를 처음 나왔다든지,
교회를 옮긴 사람들은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떠나면 다시 처음이 됩니다.
저는 우리 본향의 성도들이 금번 교회설립10주년 특별예배를 드리면서,
예배당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예배당보다는 여러분의 집이 편안할 것입니다.
마음대로 누워있을 수도 있고, 먹을 것도 가까이 있고, 화장실도 불편하지 않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러나 여러분 !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는 때로는 불편하고 또는 부담되더라도,
은혜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서울의 고등학생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한 기록을 소개합니다.
"공부가 재미있니 ?"라고 물었더니 1천명 중 128명만 재미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왜 공부하는 가 ?"라고 물었더니 대답은 거쳐야 할 과정이니까.
대학에 들어가야 하니까. 안 하면 사람구실을 못하니까. 부모님이 싫어하니까.
등의 대답들이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그 진가를 알기 전까지는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기다려 보십시오.
분명 놀라운 기쁨과 희락이 있습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삶의 복잡함과 두려움, 온갖 잡념의 때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2> 말씀을 깨달을 때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힙 입습니다.
3> 그리고 말씀을 깨달으려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4> 말씀을 듣고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城)에 머물러야 합니다.
금번 교회설립10주년 특별예배를 통해 주시는 여덟 번의 말씀을 통해 능력 받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당신이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순간,
그 문제는 더 이상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가 됩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친구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날 밤,
두려움에 떨며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사랑하는 제자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직간접으로 확인했던 제자들은
主님의 부활을 좀처럼 믿지 못했습니다.
"혹 귀신이나 유령이 아닐까"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24:38-39)
"なぜ, うろたえているのか. どうして心に疑いを起こすのか. わたしの手や足を見なさい.
まさしくわたしだ. 觸ってよく見なさい.
亡靈には肉も骨もないが, あなたがたに見えるとおり, わたしにはそれがある."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심으로 자신의 부활을 확실하게 증명해 보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깨닫게 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본문45절,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そしてイエスは, 聖書を悟らせるために彼らの心の目を開いた.")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면 먼저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 어떤 비밀, 놀라운 소리, 기적의 소리, 심지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도
마음이 열려져 있지 않으면 그 소리, 음성, 진리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튼튼하고 가장 견고한 자물쇠는
미국, 독일, 이스라엘 등에서 만든 것들이라고 합니다.
아무나 함부로 열지 못하는 것이 견고한 자물쇠입니다.
그러나 열쇠 전문가들은 간단한 쇠꼬챙이 하나로 이 모든 열쇠를 열 수 있다고 합니다.
자동차, 아파트, 사무실 심지어 금고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서는 그 누구도 쉽게 열지 못하는 자물쇠가 있습니다.
그것은 꼭 닫아버린 인간의 마음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3: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見よ, わたしは戶口に立って, たたいている.
だれかわたしの聲を聞いて戶を開ける者があれば,
わたしは中に入ってその者と共に食事をし, 彼もまた, わたしと共に食事をするであろう."
예수님이 우리들의 마음 문을 열고 들어올 만한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의지로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마음의 문이 닫혀진 상태에서는 성경도, 설교도 깨달음이 없습니다.
설교를 들으며 졸고 있는 신자,
성경을 읽으며 하품만 연속하는 신자,
매 주일 설교를 들어도 감동이 없는 사람은
그 마음이 무엇인가로 막혀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스스로 마음을 닫아걸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 !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 말씀 앞에 마음을 닫을까요 ?
첫째, 우리의 마음을 닫아거는 최우선의 적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대개 경험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보다는 중학생이 더 아는 척합니다.
경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중학생보다는 고등학생, 대학생이 더 아는 척합니다.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축적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성향도 비슷합니다.
새로운 성도들보다는 신앙을 오래한 지체들이 교만합니다.
직분을 가지지 않은 분보다 직분을 가진 사람이 교만합니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는
여기저기 다녀보면서 성경을 조금이라도 배웠던 사람이 훨씬 교만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 안다. 이미 알고 있다. 이미 들었다'는
잘못된 경험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고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중병입니다. 이런 중병은 빨리 수술하여 고쳐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넉넉하다. 부유하다. 부족한 것이 없다."(요한계시록3:17)
"わたしは金持ちだ. 滿ち足りている. 何一つ必要な物はない."
그러나 실상은 그들은 영적(靈的) 앉은뱅이요 또한 거지였습니다.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3:17,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을 것을 알지 못하도다"
"自分が慘めな者, 哀れな者, 貧しい者, 目の見えない者,
裸の者であることが分かっていない."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번 교회설립10주년 특별예배를 통해,
우리 본향의 지체 각각에게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넉넉하다, 부유하다, 부족한 것이 없다"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우리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부어질 수 있도록,
크게 소망하고 사모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의 마음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막는 장벽은 잡념입니다.
잡념이란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몸은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그 마음은 동네방네 동서남북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있는 사람,
찬송 부르고 기도를 하고 설교를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는 떠오르지 않고 다른 것들만 오락가락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 잡념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에게 잡념이 많으면 그는 결코 실력 있는 학생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 생활에 잡념이 많으면 당연히 말씀을 제대로 듣질 못하게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강단을 바라보는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짐을 반복한다면
우리는 이미 잡념에 빠져있는 뒤떨어진 신앙인 인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의 마음도 특히 이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전적으로 신뢰하며 따랐던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죽음, 부활에 대한 여러 가지의 소문들,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대제사장 측근들에 대한 두려움,
빌라도를 중심으로 한 로마 군대의 움직임 등
어느 것 하나도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불안과 잡념 등으로 닫혀버린 그들의 마음을 여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복잡하고 어수선한 때,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
그 때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나아갈 길을 깨닫습니다.
또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가 임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것저것 복잡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성경 공부할 시간보다 세상의 복잡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더 나아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
하나님 말씀 속에 길이 있고,
하나님 말씀 속에 지혜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 속에 능력이 있습니다.
어렵고, 복잡하고, 어수선하고, 답답할수록 성경을 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오히려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 문을 열고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한참 말씀을 가르치시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축복하시길,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입으라"하십니다.
본문4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わたしは, 父が約束されたものをあなたがたに送る.
高い所からの力に覆われるまでは, 都にとどまっていなさい."
여기서 우리는 능력에 대한 두 가지를 주목하여야 합니다.
첫째, 능력은 위로부터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육체의 힘은 땅에서 생겨납니다. 음식을 잘 먹고, 운동을 잘하면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영혼의 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정말로 필요한 힘은 위에서 임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마리아에게도, 바울에게도 임한 것도 위로부터 내린 능력이었습니다.
그 능력이 그들을 위대한 사명자로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능력자로 만듭니다.
이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는 모든 본향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그 능력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좋은 옷도 입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뜨겁고 강한 성령의 능력이 위로부터 임할 때
그 능력을 내가 입어야 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오늘 본문에서,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입는다'는 말과 '입힌다'는 말은 전혀 다릅니다.
입는 것은 내가 혹은 남이 스스로 입는 것이고,
입힌다는 것은 누군가가 나를 혹은 남을 입혀 주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내가 입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죄 사함 받는 것도, 능력 입는 것도, 그리고 믿음을 갖는 것도 실은 내가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여러분 !
오늘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을 하나님의 은혜로 덧입는 여러분 모두가 되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그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高い所からの力に覆われるまでは, 都にとどまっていなさい.)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이 성'은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120명의 성도들만 이 능력을 입히움 받았습니다.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줍니다.
익숙하지 않더라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갈릴리지방 사람들이었던 제자들로서는 예루살렘이 익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법 관행을 따지는 예루살렘보다는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갈릴리 바다가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안 계신 예루살렘은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1:4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벗하며 살다가 교회를 처음 나왔다든지,
교회를 옮긴 사람들은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떠나면 다시 처음이 됩니다.
저는 우리 본향의 성도들이 금번 교회설립10주년 특별예배를 드리면서,
예배당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예배당보다는 여러분의 집이 편안할 것입니다.
마음대로 누워있을 수도 있고, 먹을 것도 가까이 있고, 화장실도 불편하지 않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러나 여러분 !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는 때로는 불편하고 또는 부담되더라도,
은혜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서울의 고등학생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한 기록을 소개합니다.
"공부가 재미있니 ?"라고 물었더니 1천명 중 128명만 재미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왜 공부하는 가 ?"라고 물었더니 대답은 거쳐야 할 과정이니까.
대학에 들어가야 하니까. 안 하면 사람구실을 못하니까. 부모님이 싫어하니까.
등의 대답들이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그 진가를 알기 전까지는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기다려 보십시오.
분명 놀라운 기쁨과 희락이 있습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삶의 복잡함과 두려움, 온갖 잡념의 때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2> 말씀을 깨달을 때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힙 입습니다.
3> 그리고 말씀을 깨달으려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4> 말씀을 듣고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城)에 머물러야 합니다.
금번 교회설립10주년 특별예배를 통해 주시는 여덟 번의 말씀을 통해 능력 받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