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009년8월23일, 고린도전서13:1-3(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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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옆에 있는 귀한 지체들과 함께 이렇게 고백합시다.
당신의 믿음의 말은 큰 기적을 이루어 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이 담긴 당신의 말은,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힘이 됩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오늘도 몇 가지 질문으로 설교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 사랑 없이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을까요 ?
여러분 ! 사랑 없이도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까요 ?
사랑 없이도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죽을 수 있을까요 ?
사랑 없이 봉사하고, 사랑 없이 선교하고, 사랑 없이 찬송하고, 사랑 없이 기도하고,
사랑 없이 예배할 수 있을까요 ?
누가복음18장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모습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누가복음18:11-12,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討索, 돈이나 물건 따위를
억지로 달라고 함),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은 지금 이 바리새인의 기도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드리는
온전한 기도라고 생각하십니까 ?
그렇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惡한 제사장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라기1:7-8,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主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あなたたちは, わたしの祭壇に汚れたパンをささげておきながら,
"我 はどのようにしてあなたを汚しましたか"と言う.
しかも, あなたたちは, "主の食卓は輕んじられてもよい."と言う.
あなたたちが目のつぶれた動物をいけにえとしてささげても, 惡ではないのか.
足が傷ついたり, 病氣である動物をささげても, 惡ではないのか.
それを總督に獻上してみよ. 彼はあなたを喜び, 受け入れるだろうか.)
여러분 !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 드렸습니까 ?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가운데 예배와 제물을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와 유사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3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全財産を貧しい人 のために使い盡くそうとも,
誇ろうとしてわが身を死に引き渡そうとも, 愛がなければ,
わたしに何の益もない.)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재산을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쓰는 것이,
또 남을 위해 대신 죽어 주는 것이, 사랑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든 재산을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쓴 것이,
또 남을 위해 대신 죽어 주는 것이, 만약 사랑 없이 한 것이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도, 아무런 상급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무엘상16:7,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容姿や背の高さに目を向けるな. わたしは彼を退ける.
人間が見るようには見ない. 人は目に映ることを見るが, 主は心によって見る.)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행하는 모든 선행과 믿음의 행위,
심지어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행한 모든 헌신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도, 상급도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중심에 있는 사랑을 보십니다.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제 아무리 귀한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산수시간에 곱하기를 할 때, 아무리 큰 수라 할지라도,
그 수에 0을 곱하면 그 답은 0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고귀한 일이라도 그곳에 사랑이 빠져 있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1875년1월14일, 독일의 알자스 카이저스베르크에서 목사님의 장남으로 태어나
신학자, 철학자, 음악가로서 명성을 날리던 알버트 슈바이처는,
그의 나이 38세인 1913년에 아프리카 적도(赤道)지역에 있는 가봉으로 가서,
1965년(그의 나이 90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52년 간,
아프리카의 병자들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 슈바이처에 대해 비평하는,
안티 슈바이처 그룹 가운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흑인들을 많이 살렸다.
그래서 그는 '흑인들의 아버지'라고 칭송을 받았는데,
실상을 얘기하면 사실 그는 환자들에게 굉장히 고압적이었다."
"그를 옆에서 지켜 본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그와 환자의 관계는 의사와 병자라기보다는 주인과 종처럼 보였다고 하였다."
"슈바이처는 과연 흑인들을 사랑해서 그곳으로 갔을까 ?"
"어쩌면 그는 흑인을 사랑해서라기보다, 자신의 희생 자체에 더 보람을 느끼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은 정확한 근거 없는 주장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사랑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해 보게 하는 주장입니다.
이곳 錦絲町에 이비인후과(耳鼻咽喉科) 병원이 몇 군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병원들의 의사들은 정말 불친절합니다.
본래 의사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와 사명의 정신이 발휘되어야할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이 의사들에게서는 결코 그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 병원에 갈 때마다 불편한 마음으로 돌아올 적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들 역시 교회에서, 가정에서, 이 땅 일본에서
각자 나름대로의 달란트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행하는 그 모든 일에는
반드시 사랑의 마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1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たとえ, 人 の異言, 天使たちの異言を語ろうとも,
愛がなければ, わたしは騷がしいどら, やかましいシンバル.)
본문2절,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たとえ,預言する賜物を持ち,あらゆる神秘とあらゆる知識に通じていようとも,
たとえ,山を動かすほどの完全な信仰を持っていようとも,
愛がなければ, 無に等しい.)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 없이 하는 직장 생활,
사랑 없이 하는 학교 생활,
사랑 없이 부르는 찬송,
사랑 없이 만드는 식사,
사랑 없이 하는 안내,
사랑 없이 하는 반주,
사랑 없이 하는 통역,
사랑 없이 하는 설교, 이 모든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물론 영광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행하던 사랑으로 해야합니다.
자 !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에 어떻게 사랑을 담을 수 있을까요 ?
오늘 본문에는 4절부터 13절까지를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씀드리면
본문의 말씀은 사랑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그 방법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4절 이하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사랑하면 너무 너무 좋겠지요.
가장 이상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오래 참을 수 있고, 온유하며, 질투하지도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또한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도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도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사랑하는 여러분 !
이 모든 것은 결코 현재의 우리로서는 행하기 어려운 사랑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행하지 못할 것을 기록해 놓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사랑을 행할 것을 기대하며, 한 걸음부터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두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물론 온전한 사랑을 향한, 한 걸음, 또 한 걸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 오늘 저와 함께 이 두 걸음을 뗀 성도들은
온전한 사랑의 자리에 반드시 도달할 줄 믿습니다.
첫째, 작아 보이고 평범해 보이는 것들부터 사랑합시다.
사실, 크고 추상적인 것일수록 사랑하기가 쉽습니다.
일본을 사랑하는 것이 쉽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쉽고,
직장을 사랑하는 것이 쉽습니다.
다 추상적이고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사랑하기 어려운 것은 매일 몸을 부대끼면서
가장 가까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족들이고 직장 동료들이고 한 교회에서 함께 지체된 이들입니다.
나 자신이 진정한 사랑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나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8월18일(화요일) 김대중 전대통령이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고인이 1977년, 진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일 때,
아들 홍걸에게 쓴 편지가 인터넷 게시판에 소개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홍걸아 !
너의 편지는 언제나 반갑게 받아보았다.
아빠는 너희들의 편지 받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
더구나 네가 학교성적도 좋아지고 체육도 잘되어간다니 참 기쁘다.
무엇보다도 좋은 친구가 많이 생기고 선생님들에게도 호감을 느끼면서
재미있게 공부한다니 더 바랄 것이 없구나.
친구들에게는 되도록 친절하고 관대하며
그의 인격을 나의 인격같이 존중해 주어야 한다.
내가 남으로부터 존경받고 사랑 받으려면 먼저 나부터 남에게 그렇게 해야한다.
그러나 동시에 꼭 명심할 것은 아무리 친구를 아낀다 하더라도,
그의 주장이나 행동이 너의 판단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때,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옳지 않은 데도 마지못해 따라가는 그런 사람은 자주성과 신념이 없는 사람이며,
결코 장래 자기 앞을 성공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특별한 큰 차이가 없거든,
되도록 친구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많은 벗들과 원만히 살아나가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길이다.
홍철이, 연수, 연학이가 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다니 참 고맙다.
형주나 그 동생들에게 고마운 말 전하거라.
그전에 내가 말하던 '정신력을 기르는 책'을 잊지 말고 되풀이해서 읽어라.
꼭 필요한 일이다.
중간고사를 치렀다는데 성적이 더욱 좋아졌기를 바란다.
몸 건강하여라.
아버지로부터.
고 김대중 대통령,
그 분은 나라를 사랑함 못지 않게, 가족과 자녀를 사랑할 줄 아는 아버지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가장 가까운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
혹 가족과의 상처가 있다면, 사랑으로 회복하는 모두가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와 함께 3년을 이 땅에서 지내셨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선생님과 제자 사이라고는 하지만 매일 붙어 있는데
서로 불만이 없었겠습니까 ?
우선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무슨 일정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끼니가 넉넉히 마련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육 시간이 하루 여덟 시간씩 딱 정해진 것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뭐 하나 정해진 규칙도 없고, 계획도 없고, 잠시 후의 일도 모르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보면 그 어려운 군대생활 가운데 그래도 희망을 갖는 것은
휴가가 있고 제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휴가나 제대날짜가 달력에 표시해 놓고,
그 어떤 어려움도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까 ?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것도 없이 꼬박 3년을 쉴새 없이 보냈습니다.
여러분 !
그 긴 시간 동안, 무엇이 제자들의 힘이 되었을까요 ?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깊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자신들의 힘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 역시 스트레스가 많으셨을 것입니다.
병자들은 끊임없이 밀려오지요, 모함하는 자들은 계속 꼬투리를 잡지요,
제자들은 여전히 딴 생각을 하고 있지요.
그 모든 것을 생각하면
그런 스트레스를 바로 옆에 있는 제자들에게 풀어야 될 것 같은데,
복음서 어디를 봐도 예수님의 그런 모습은 발견되질 않습니다.
다만 혼자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사실을
몸소 행해 보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가장 가까운 가족들을 사랑하고,
바로 옆에 있는 동료, 학교의 친구, 선생님,
본향에 속한 각각의 지체를 사랑하는 것은 정말 작은 일이고 평범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참 사랑의 시작입니다.
가장 평범해 보이고, 가장 작아 보이는 사람들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시작은 바로 거기서부터 이고,
그래야 우리의 사랑은 더 크고 특별한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둘째, 부자연스러운 것을 실천하는 것이 사랑의 둘째 걸음입니다.
본문4-7절을 보면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설명이 나오고 있는데
하나같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는 참지 못하고, 불친절하고, 시기하고, 자랑하고, 교만하고, 무례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고, 성내고, 악한 생각을 품습니다.
이것들이 오히려 우리에겐 더 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에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온전한 사랑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고,
따라서 우리에겐 초자연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때
비로소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고, 따라서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사랑하는 일이 자연스럽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어야 마땅합니다.
여러분 ! 보십시오.
오랫동안 함께 교회 생활을 했던 지체들끼린 사랑하는 일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새로 나온 분들에게는 다가가 관심을 보이고 가까이 가는 일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여러분 !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인데, 새로 오신 당사자들은 얼마나 부자연스럽겠습니까 ?
그런데 그런 부자연스러운 사랑을 행하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여러분 !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최근에 새로 함께 한 지체에게 진실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인사를 건네 보신 적이 있습니까 ?
많지 않지요. 그렇습니다. 어렵습니다. 영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연스러움을 이기고 오히려 인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한 번 주변에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일이나 사람들이 있는지 돌아보세요.
보인다면, 바로 그런 일이나, 그 사람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사랑은 자연적으로 생겨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려고 작정을 하고 사랑해야 비로소 생기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자연스러워서 사랑하시겠습니까 ?
우리들이 하는 짓을 보면 당장에라도 내치고 싶지만,
그러나 애당초 사랑하기로 작정하고 우리가 어떤 모양이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랑 받을 만 해서 사랑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랑 받도록 선택받아 태어났기에 사랑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나 인격을 보고
그 삶이 보기 좋고 장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런 어색하고 부자연스런 사랑을 하시는 주님을
조금은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예수님에겐 별명이 있었습니다.
'세리와 이방인과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렇게 되실 수 있었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
연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즉,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도 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주님처럼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일부터가 아니라 바로 오늘부터 이런 사랑을 실천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내 자신이 행하는 일 속에 사랑이 담겨 있는가를
다시금 돌아보아야 합니다.
찬양대에서 그 사명을 감당하든,
헌금 위원을 하든,
파워 포인트를 쏘든,
아니면 식사를 준비하고, 찬양 인도를 하고,
그 밖의 어떤 일을 하던 간에, 그 속에 사랑이 담겨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으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곁에, 그리고 우리들 곁에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도
힘있거나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만약 가장 작아 보이고 평범한 것으로부터 사랑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사랑은 점점 큰사랑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또한 조금 껄끄러운 것, 부자연스러운 것, 어색한 것을 행하여 사랑을 실천합시다.
기본적 사랑에서, 이타적(利他的) 사랑으로 한 걸음을 나아갑시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불이 되는 것처럼, 작은 사랑은 큰사랑으로 커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널리 퍼지는 길은,
다른 길이 아니라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퍼질 수 있습니다.
이 사랑으로 이 땅을 밝게 변화시키는 우리 본향성도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당신의 믿음의 말은 큰 기적을 이루어 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이 담긴 당신의 말은,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힘이 됩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오늘도 몇 가지 질문으로 설교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 사랑 없이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을까요 ?
여러분 ! 사랑 없이도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까요 ?
사랑 없이도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죽을 수 있을까요 ?
사랑 없이 봉사하고, 사랑 없이 선교하고, 사랑 없이 찬송하고, 사랑 없이 기도하고,
사랑 없이 예배할 수 있을까요 ?
누가복음18장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모습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누가복음18:11-12,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討索, 돈이나 물건 따위를
억지로 달라고 함),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은 지금 이 바리새인의 기도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드리는
온전한 기도라고 생각하십니까 ?
그렇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惡한 제사장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라기1:7-8,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主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あなたたちは, わたしの祭壇に汚れたパンをささげておきながら,
"我 はどのようにしてあなたを汚しましたか"と言う.
しかも, あなたたちは, "主の食卓は輕んじられてもよい."と言う.
あなたたちが目のつぶれた動物をいけにえとしてささげても, 惡ではないのか.
足が傷ついたり, 病氣である動物をささげても, 惡ではないのか.
それを總督に獻上してみよ. 彼はあなたを喜び, 受け入れるだろうか.)
여러분 !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 드렸습니까 ?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가운데 예배와 제물을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와 유사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3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全財産を貧しい人 のために使い盡くそうとも,
誇ろうとしてわが身を死に引き渡そうとも, 愛がなければ,
わたしに何の益もない.)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재산을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쓰는 것이,
또 남을 위해 대신 죽어 주는 것이, 사랑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든 재산을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쓴 것이,
또 남을 위해 대신 죽어 주는 것이, 만약 사랑 없이 한 것이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도, 아무런 상급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무엘상16:7,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容姿や背の高さに目を向けるな. わたしは彼を退ける.
人間が見るようには見ない. 人は目に映ることを見るが, 主は心によって見る.)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행하는 모든 선행과 믿음의 행위,
심지어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행한 모든 헌신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도, 상급도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중심에 있는 사랑을 보십니다.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제 아무리 귀한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산수시간에 곱하기를 할 때, 아무리 큰 수라 할지라도,
그 수에 0을 곱하면 그 답은 0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고귀한 일이라도 그곳에 사랑이 빠져 있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1875년1월14일, 독일의 알자스 카이저스베르크에서 목사님의 장남으로 태어나
신학자, 철학자, 음악가로서 명성을 날리던 알버트 슈바이처는,
그의 나이 38세인 1913년에 아프리카 적도(赤道)지역에 있는 가봉으로 가서,
1965년(그의 나이 90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52년 간,
아프리카의 병자들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 슈바이처에 대해 비평하는,
안티 슈바이처 그룹 가운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흑인들을 많이 살렸다.
그래서 그는 '흑인들의 아버지'라고 칭송을 받았는데,
실상을 얘기하면 사실 그는 환자들에게 굉장히 고압적이었다."
"그를 옆에서 지켜 본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그와 환자의 관계는 의사와 병자라기보다는 주인과 종처럼 보였다고 하였다."
"슈바이처는 과연 흑인들을 사랑해서 그곳으로 갔을까 ?"
"어쩌면 그는 흑인을 사랑해서라기보다, 자신의 희생 자체에 더 보람을 느끼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은 정확한 근거 없는 주장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사랑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해 보게 하는 주장입니다.
이곳 錦絲町에 이비인후과(耳鼻咽喉科) 병원이 몇 군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병원들의 의사들은 정말 불친절합니다.
본래 의사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와 사명의 정신이 발휘되어야할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이 의사들에게서는 결코 그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 병원에 갈 때마다 불편한 마음으로 돌아올 적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들 역시 교회에서, 가정에서, 이 땅 일본에서
각자 나름대로의 달란트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행하는 그 모든 일에는
반드시 사랑의 마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1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たとえ, 人 の異言, 天使たちの異言を語ろうとも,
愛がなければ, わたしは騷がしいどら, やかましいシンバル.)
본문2절,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たとえ,預言する賜物を持ち,あらゆる神秘とあらゆる知識に通じていようとも,
たとえ,山を動かすほどの完全な信仰を持っていようとも,
愛がなければ, 無に等しい.)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 없이 하는 직장 생활,
사랑 없이 하는 학교 생활,
사랑 없이 부르는 찬송,
사랑 없이 만드는 식사,
사랑 없이 하는 안내,
사랑 없이 하는 반주,
사랑 없이 하는 통역,
사랑 없이 하는 설교, 이 모든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물론 영광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행하던 사랑으로 해야합니다.
자 !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에 어떻게 사랑을 담을 수 있을까요 ?
오늘 본문에는 4절부터 13절까지를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씀드리면
본문의 말씀은 사랑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그 방법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4절 이하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사랑하면 너무 너무 좋겠지요.
가장 이상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오래 참을 수 있고, 온유하며, 질투하지도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또한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도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도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사랑하는 여러분 !
이 모든 것은 결코 현재의 우리로서는 행하기 어려운 사랑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행하지 못할 것을 기록해 놓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사랑을 행할 것을 기대하며, 한 걸음부터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두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물론 온전한 사랑을 향한, 한 걸음, 또 한 걸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 오늘 저와 함께 이 두 걸음을 뗀 성도들은
온전한 사랑의 자리에 반드시 도달할 줄 믿습니다.
첫째, 작아 보이고 평범해 보이는 것들부터 사랑합시다.
사실, 크고 추상적인 것일수록 사랑하기가 쉽습니다.
일본을 사랑하는 것이 쉽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쉽고,
직장을 사랑하는 것이 쉽습니다.
다 추상적이고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사랑하기 어려운 것은 매일 몸을 부대끼면서
가장 가까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족들이고 직장 동료들이고 한 교회에서 함께 지체된 이들입니다.
나 자신이 진정한 사랑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나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8월18일(화요일) 김대중 전대통령이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고인이 1977년, 진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일 때,
아들 홍걸에게 쓴 편지가 인터넷 게시판에 소개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홍걸아 !
너의 편지는 언제나 반갑게 받아보았다.
아빠는 너희들의 편지 받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
더구나 네가 학교성적도 좋아지고 체육도 잘되어간다니 참 기쁘다.
무엇보다도 좋은 친구가 많이 생기고 선생님들에게도 호감을 느끼면서
재미있게 공부한다니 더 바랄 것이 없구나.
친구들에게는 되도록 친절하고 관대하며
그의 인격을 나의 인격같이 존중해 주어야 한다.
내가 남으로부터 존경받고 사랑 받으려면 먼저 나부터 남에게 그렇게 해야한다.
그러나 동시에 꼭 명심할 것은 아무리 친구를 아낀다 하더라도,
그의 주장이나 행동이 너의 판단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때,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옳지 않은 데도 마지못해 따라가는 그런 사람은 자주성과 신념이 없는 사람이며,
결코 장래 자기 앞을 성공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특별한 큰 차이가 없거든,
되도록 친구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많은 벗들과 원만히 살아나가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길이다.
홍철이, 연수, 연학이가 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다니 참 고맙다.
형주나 그 동생들에게 고마운 말 전하거라.
그전에 내가 말하던 '정신력을 기르는 책'을 잊지 말고 되풀이해서 읽어라.
꼭 필요한 일이다.
중간고사를 치렀다는데 성적이 더욱 좋아졌기를 바란다.
몸 건강하여라.
아버지로부터.
고 김대중 대통령,
그 분은 나라를 사랑함 못지 않게, 가족과 자녀를 사랑할 줄 아는 아버지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가장 가까운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
혹 가족과의 상처가 있다면, 사랑으로 회복하는 모두가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와 함께 3년을 이 땅에서 지내셨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선생님과 제자 사이라고는 하지만 매일 붙어 있는데
서로 불만이 없었겠습니까 ?
우선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무슨 일정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끼니가 넉넉히 마련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육 시간이 하루 여덟 시간씩 딱 정해진 것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뭐 하나 정해진 규칙도 없고, 계획도 없고, 잠시 후의 일도 모르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보면 그 어려운 군대생활 가운데 그래도 희망을 갖는 것은
휴가가 있고 제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휴가나 제대날짜가 달력에 표시해 놓고,
그 어떤 어려움도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까 ?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것도 없이 꼬박 3년을 쉴새 없이 보냈습니다.
여러분 !
그 긴 시간 동안, 무엇이 제자들의 힘이 되었을까요 ?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깊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자신들의 힘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 역시 스트레스가 많으셨을 것입니다.
병자들은 끊임없이 밀려오지요, 모함하는 자들은 계속 꼬투리를 잡지요,
제자들은 여전히 딴 생각을 하고 있지요.
그 모든 것을 생각하면
그런 스트레스를 바로 옆에 있는 제자들에게 풀어야 될 것 같은데,
복음서 어디를 봐도 예수님의 그런 모습은 발견되질 않습니다.
다만 혼자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사실을
몸소 행해 보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가장 가까운 가족들을 사랑하고,
바로 옆에 있는 동료, 학교의 친구, 선생님,
본향에 속한 각각의 지체를 사랑하는 것은 정말 작은 일이고 평범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참 사랑의 시작입니다.
가장 평범해 보이고, 가장 작아 보이는 사람들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시작은 바로 거기서부터 이고,
그래야 우리의 사랑은 더 크고 특별한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둘째, 부자연스러운 것을 실천하는 것이 사랑의 둘째 걸음입니다.
본문4-7절을 보면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설명이 나오고 있는데
하나같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는 참지 못하고, 불친절하고, 시기하고, 자랑하고, 교만하고, 무례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고, 성내고, 악한 생각을 품습니다.
이것들이 오히려 우리에겐 더 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에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온전한 사랑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고,
따라서 우리에겐 초자연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때
비로소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고, 따라서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사랑하는 일이 자연스럽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어야 마땅합니다.
여러분 ! 보십시오.
오랫동안 함께 교회 생활을 했던 지체들끼린 사랑하는 일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새로 나온 분들에게는 다가가 관심을 보이고 가까이 가는 일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여러분 !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인데, 새로 오신 당사자들은 얼마나 부자연스럽겠습니까 ?
그런데 그런 부자연스러운 사랑을 행하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여러분 !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최근에 새로 함께 한 지체에게 진실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인사를 건네 보신 적이 있습니까 ?
많지 않지요. 그렇습니다. 어렵습니다. 영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연스러움을 이기고 오히려 인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한 번 주변에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일이나 사람들이 있는지 돌아보세요.
보인다면, 바로 그런 일이나, 그 사람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사랑은 자연적으로 생겨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려고 작정을 하고 사랑해야 비로소 생기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자연스러워서 사랑하시겠습니까 ?
우리들이 하는 짓을 보면 당장에라도 내치고 싶지만,
그러나 애당초 사랑하기로 작정하고 우리가 어떤 모양이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랑 받을 만 해서 사랑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랑 받도록 선택받아 태어났기에 사랑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나 인격을 보고
그 삶이 보기 좋고 장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런 어색하고 부자연스런 사랑을 하시는 주님을
조금은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예수님에겐 별명이 있었습니다.
'세리와 이방인과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렇게 되실 수 있었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
연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즉,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도 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주님처럼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일부터가 아니라 바로 오늘부터 이런 사랑을 실천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내 자신이 행하는 일 속에 사랑이 담겨 있는가를
다시금 돌아보아야 합니다.
찬양대에서 그 사명을 감당하든,
헌금 위원을 하든,
파워 포인트를 쏘든,
아니면 식사를 준비하고, 찬양 인도를 하고,
그 밖의 어떤 일을 하던 간에, 그 속에 사랑이 담겨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으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곁에, 그리고 우리들 곁에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도
힘있거나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만약 가장 작아 보이고 평범한 것으로부터 사랑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사랑은 점점 큰사랑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또한 조금 껄끄러운 것, 부자연스러운 것, 어색한 것을 행하여 사랑을 실천합시다.
기본적 사랑에서, 이타적(利他的) 사랑으로 한 걸음을 나아갑시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불이 되는 것처럼, 작은 사랑은 큰사랑으로 커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널리 퍼지는 길은,
다른 길이 아니라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퍼질 수 있습니다.
이 사랑으로 이 땅을 밝게 변화시키는 우리 본향성도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