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009년7월19일, 전도서 12:1-7(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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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옆에 있는 귀한 지체들을 이렇게 축복합시다.
큰 상처가 있습니까 ? 조금만 참으세요. 곧 치유함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둘람 공동체 사람들처럼, 우리들도 크게 쓰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는다는 탈무드에는
인생의 일곱 단계를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① 한 살은 임금님 - 모두가 모여 임금님을 받들 듯이 달래기도 하고 기분을 맞춰 준다.
② 두 살은 돼지 - 하루 종일 진창 속을 뛰고 돌아다닌다.
③ 열 살은 염소 - 웃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날뛰며 돌아다닌다.
④ 열 여덟 살은 말 - 커져서 자기 힘을 뽐내고 싶어한다.
⑤ 결혼을 하면 당나귀 - 가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터벅터벅 걷지 않으면 안 된다.
⑥ 중년은 개 -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살살거려야 한다.
⑦ 노년은 원숭이 - 어린아이 같아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은 이 단계에 자신의 현재를 넣어볼 때, 어느 부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자신의 때에 가장 알맞은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
인생에게 있어서 이 일곱 단계가 끝일까요 ?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곱 단계 후에도 또 다른 단계가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들에게 이 세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첫째, "인생아 ! 너는 어디서 왔느냐 ?"
둘째, "인생아 ! 너는 무엇을 하느냐 ?"
셋째, "인생아 ! 너는 어디로 가느냐 ?"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이 세 가지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있습니까 ?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분명히 답할 수 있습니다.
자 ! 각자 답을 해 보겠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어머니의 胎를 통해 왔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계시는 천성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 중 세 번째 문제에 대한 답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그 답은 이렇습니다.
"인생아 너는 지금 죽음을 길로 가고 있구나 !"
그렇습니다.
확실히 죽음의 길은 누구나 가야 할 길이며 차별도 없고, 기다려주지도 않는 길입니다.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영웅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죽음은 인간들에게 있어서 공포요, 고통이요, 두려움입니다.
고대로부터 중세 교회에 내려오던 전승에 의하면,
죽은 지 3일 만에 예수님을 통해 부활한 나사로는
그 후로부터 웃음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죽음을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죽음은 모든 인간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있습니다.
지난 7월13일 월요일,
일본의 국회 참의원에서 뇌사(腦死)를 사람의 죽음으로 인정하는 법이
통과되었습니다.(改正 臟器移植法)
그런데 이 뇌사를 최초로 정의한 때는 1968년이었습니다.
1968년 8월, 미국의 하바드 의과대학은 뇌사에 대해 이러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비가역적(非可逆的) 혼수(Irreversible Coma)",
즉 "뇌가 영원히 기능을 상실한 상태"
이 정의를 바탕으로 세계 各國에서는 뇌가 기능을 상실한 것에 대한 판정기준으로
다음과 같은 의학적 조치를 취합니다.
(1)외부자극에 전혀 반응이 없는 깊은 혼수상태일 것.
(2)자발호흡이 되살아날 수 없는 상태로 소실되었을 것.
(3)두 눈의 동공이 확대, 고정돼 있을 것.
(4)다음의 뇌간반사가 완전히 소실돼 있을 것
- 광반사(Light Reflex), 각막반사(Corneal Reflex),
안구두부반사(Oculo-Cephalic reflex), 전정안구반사(Vestibular-Ocular Reflex),
모양체척수반사(Cilio-Spinal Reflex), 구역반사(Gag Reflex),
기침반사(Cough Reflex) 등.
(5)자발운동, 제뇌 강직, 제피질 강직 및 경련이 나타나지 아니할 것.
(6)무호흡검사 결과 자발호흡이 유발되지 아니하여
자발호흡이 되살아날 수 없다고 판정될 것.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들은 뇌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국회에서 이 법이 통과되기 몇 주전,
각 방송국 및 언론에서는 뇌사에 대해 여러 입장을 내어놓았습니다.
먼저, 뇌사를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인정하는 편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장기이식(臟器移植)입니다.
실제로 뇌사로 판정을 받은 사람으로부터 장기(臟器)를 이식 받아,
건강한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우리의 주위에는 많습니다.
장기를 이식 받으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데
만약 이식 받지 못하면 곧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기이식 및 뇌사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사람의 몸에서 이식이 가능한 부분은,
각막(안구), 폐, 췌장, 신장, 심장, 소장, 간, 골수 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뇌사 상태에 있던 사람이 기적적으로 소생하는 이야기는,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더구나 지난 주, 어느 방송국에서는 뇌사 상태에 있는 어린이가,
키가 자라고, 손과 발이 자라는 등 성장해 가는 것을 소개함으로,
과연 뇌사가 사람의 죽음이라고 정의해도 되는가를 심도 있게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 어린이의 부모님은 기자의 인터뷰에,
"결코 내 자식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
뇌사에 대한 주장이 나오기 전, 인류는 무엇을 인간의 죽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심장 활동의 중지(맥박의 중지),
둘째는, 폐 활동의 중지(호흡의 중지)였습니다.
그런데 뇌사의 기준을 통해, 전통적으로 죽음의 정의로 규정했던
심장과 폐를 남에게 기증하는 상황에 달한 것입니다.
자 ! 그렇다면, 여러분 !
성경은 과연 죽음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릴까요 ?
심장 활동의 중지, 혹은 폐 활동의 중지, 혹은 뇌 활동의 중지를 죽음으로 정의할까요 ?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결코 중지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죽음의 의미를 중지가 아닌, 분리의 개념으로 말합니다.
전도서3:20-21,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본문7절,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마태복음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함께 창세기2:7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神である主は, 土地のちりで人を形造り, その鼻にいのちの息を吹き まれた.
そこで, 人は, 生きものとなった.)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인간의 몸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심으로 인해
비로소 인간은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생기(즉, 영혼)가 인간의 몸을 떠날 때, 인간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魂のない肉體が死んだものであるように, 行いを伴わない信仰は死んだものです.)
자 ! 그렇다면 여러분 !
인간은 왜 죽을까요 ?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본래부터 죽는 존재로 만들었을까요 ?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를 포함해서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창조가 불완전한 것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창조하신 후, 심히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의 원인을 하나님의 창조에서 찾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모든 인간에게 죽음을 맞게 할까요 ?
쉽게 말하면, 인간의 몸에서 영혼을 데리고 가실까요 ?
우리들은 이미 사실을 잘 알고있습니다.
죽음은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언약과 관련해 처음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2:16-17,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러나 첫 사람은 아담은 하나님과의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죽음을 선고받았습니다.
물론 선고한 죽음을 집행하시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을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죽음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한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이 죄의 결과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 이렇게 죽음을 선고하십니다.
창세기3:19, "네가 얼굴이 땀이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여기에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육체가 영혼과 분리되는 것,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로마의 성도들에게 교훈합니다.
로마서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또한 야고보도 죽음이 죄의 결과임을 이렇게 말합니다.(야고보서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런데, 최초의 인간 아담은 모든 인간의 대표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범죄한 결과로 인해 주어진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미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5:15, "한 사람(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자 ! 그렇다면, 여러분 !
죽음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취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
성경은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낫다 했습니다.
전도서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왜냐하면, 많은 지혜와 교훈을 얻기 때문입니다.
자 !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
첫째, 죽음에 대해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닙니다.
지금보다 훨씬 좋고 아름다운,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죽음은 모든 수고와 고통을 그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主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또한 죽음은 눈물을 씻고 위로를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또한 죽음은 우리를 위해 예비된 면류관을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者에게니라"
고로 성도인 우리들은 죽음 때문에 절망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둘째, 죽음의 원인 그리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축복된 삶을 맞이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죽음 자체는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언약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향해 말하기를,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라고까지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5: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죽음을 대할 때마다,
죄가 죽음의 원인임을 다시금 기억하여 죄로부터 멀리하는 결단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도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죄를 향하는 습성을 고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그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을 유일한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고,
믿음의 길을 온전히 걷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사도행전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셋째, 사명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들을 이 땅에 두시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들을 통해서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경우를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좀처럼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분명, 우리들의 죄를 지시고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시기 전에도 여러 가지 행하실 일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하시는 일, 병든 자, 가난한 자, 죽은 자들에게
새 생명과 새 삶을 주시는 일,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시는 일 등등.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다 행하신 후, 이렇게 운명하셨습니다.
요한복음19:30, "다 이루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렇듯 우리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대할 때,
아직 내가 살아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직 내 영혼을 데려가시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나 자신을 통해 이 땅에 이루실 것이 있기 때문임을 기억하고,
그 일이 무엇인지를 기도하는 가운데 깨닫고,
전심전력하여 행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아직 내 영혼을 데려가시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나를 통해 이 땅에 이루실 것이 있기 때문이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무엇을 죽음이라고 합니까 ?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에서 우리의 영혼을 분리하여 자신의 곳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왜 우리 인간은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까 ?
그렇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는 오직 사망(死亡)뿐입니다.
우리는 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는 죽음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
1> 죽음에 대해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2>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3> 사명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 영혼을 데려가시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이루실 것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예수님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하늘 나라에 예비된 아름다운 면류관을 차지하는
복된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큰 상처가 있습니까 ? 조금만 참으세요. 곧 치유함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둘람 공동체 사람들처럼, 우리들도 크게 쓰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는다는 탈무드에는
인생의 일곱 단계를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① 한 살은 임금님 - 모두가 모여 임금님을 받들 듯이 달래기도 하고 기분을 맞춰 준다.
② 두 살은 돼지 - 하루 종일 진창 속을 뛰고 돌아다닌다.
③ 열 살은 염소 - 웃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날뛰며 돌아다닌다.
④ 열 여덟 살은 말 - 커져서 자기 힘을 뽐내고 싶어한다.
⑤ 결혼을 하면 당나귀 - 가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터벅터벅 걷지 않으면 안 된다.
⑥ 중년은 개 -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살살거려야 한다.
⑦ 노년은 원숭이 - 어린아이 같아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은 이 단계에 자신의 현재를 넣어볼 때, 어느 부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자신의 때에 가장 알맞은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
인생에게 있어서 이 일곱 단계가 끝일까요 ?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곱 단계 후에도 또 다른 단계가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들에게 이 세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첫째, "인생아 ! 너는 어디서 왔느냐 ?"
둘째, "인생아 ! 너는 무엇을 하느냐 ?"
셋째, "인생아 ! 너는 어디로 가느냐 ?"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이 세 가지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있습니까 ?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분명히 답할 수 있습니다.
자 ! 각자 답을 해 보겠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어머니의 胎를 통해 왔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계시는 천성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 중 세 번째 문제에 대한 답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그 답은 이렇습니다.
"인생아 너는 지금 죽음을 길로 가고 있구나 !"
그렇습니다.
확실히 죽음의 길은 누구나 가야 할 길이며 차별도 없고, 기다려주지도 않는 길입니다.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영웅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죽음은 인간들에게 있어서 공포요, 고통이요, 두려움입니다.
고대로부터 중세 교회에 내려오던 전승에 의하면,
죽은 지 3일 만에 예수님을 통해 부활한 나사로는
그 후로부터 웃음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죽음을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죽음은 모든 인간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있습니다.
지난 7월13일 월요일,
일본의 국회 참의원에서 뇌사(腦死)를 사람의 죽음으로 인정하는 법이
통과되었습니다.(改正 臟器移植法)
그런데 이 뇌사를 최초로 정의한 때는 1968년이었습니다.
1968년 8월, 미국의 하바드 의과대학은 뇌사에 대해 이러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비가역적(非可逆的) 혼수(Irreversible Coma)",
즉 "뇌가 영원히 기능을 상실한 상태"
이 정의를 바탕으로 세계 各國에서는 뇌가 기능을 상실한 것에 대한 판정기준으로
다음과 같은 의학적 조치를 취합니다.
(1)외부자극에 전혀 반응이 없는 깊은 혼수상태일 것.
(2)자발호흡이 되살아날 수 없는 상태로 소실되었을 것.
(3)두 눈의 동공이 확대, 고정돼 있을 것.
(4)다음의 뇌간반사가 완전히 소실돼 있을 것
- 광반사(Light Reflex), 각막반사(Corneal Reflex),
안구두부반사(Oculo-Cephalic reflex), 전정안구반사(Vestibular-Ocular Reflex),
모양체척수반사(Cilio-Spinal Reflex), 구역반사(Gag Reflex),
기침반사(Cough Reflex) 등.
(5)자발운동, 제뇌 강직, 제피질 강직 및 경련이 나타나지 아니할 것.
(6)무호흡검사 결과 자발호흡이 유발되지 아니하여
자발호흡이 되살아날 수 없다고 판정될 것.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들은 뇌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국회에서 이 법이 통과되기 몇 주전,
각 방송국 및 언론에서는 뇌사에 대해 여러 입장을 내어놓았습니다.
먼저, 뇌사를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인정하는 편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장기이식(臟器移植)입니다.
실제로 뇌사로 판정을 받은 사람으로부터 장기(臟器)를 이식 받아,
건강한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우리의 주위에는 많습니다.
장기를 이식 받으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데
만약 이식 받지 못하면 곧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기이식 및 뇌사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사람의 몸에서 이식이 가능한 부분은,
각막(안구), 폐, 췌장, 신장, 심장, 소장, 간, 골수 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뇌사 상태에 있던 사람이 기적적으로 소생하는 이야기는,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더구나 지난 주, 어느 방송국에서는 뇌사 상태에 있는 어린이가,
키가 자라고, 손과 발이 자라는 등 성장해 가는 것을 소개함으로,
과연 뇌사가 사람의 죽음이라고 정의해도 되는가를 심도 있게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 어린이의 부모님은 기자의 인터뷰에,
"결코 내 자식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
뇌사에 대한 주장이 나오기 전, 인류는 무엇을 인간의 죽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심장 활동의 중지(맥박의 중지),
둘째는, 폐 활동의 중지(호흡의 중지)였습니다.
그런데 뇌사의 기준을 통해, 전통적으로 죽음의 정의로 규정했던
심장과 폐를 남에게 기증하는 상황에 달한 것입니다.
자 ! 그렇다면, 여러분 !
성경은 과연 죽음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릴까요 ?
심장 활동의 중지, 혹은 폐 활동의 중지, 혹은 뇌 활동의 중지를 죽음으로 정의할까요 ?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결코 중지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죽음의 의미를 중지가 아닌, 분리의 개념으로 말합니다.
전도서3:20-21,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본문7절,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마태복음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함께 창세기2:7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神である主は, 土地のちりで人を形造り, その鼻にいのちの息を吹き まれた.
そこで, 人は, 生きものとなった.)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인간의 몸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심으로 인해
비로소 인간은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생기(즉, 영혼)가 인간의 몸을 떠날 때, 인간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魂のない肉體が死んだものであるように, 行いを伴わない信仰は死んだものです.)
자 ! 그렇다면 여러분 !
인간은 왜 죽을까요 ?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본래부터 죽는 존재로 만들었을까요 ?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를 포함해서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창조가 불완전한 것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창조하신 후, 심히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의 원인을 하나님의 창조에서 찾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모든 인간에게 죽음을 맞게 할까요 ?
쉽게 말하면, 인간의 몸에서 영혼을 데리고 가실까요 ?
우리들은 이미 사실을 잘 알고있습니다.
죽음은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언약과 관련해 처음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2:16-17,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러나 첫 사람은 아담은 하나님과의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죽음을 선고받았습니다.
물론 선고한 죽음을 집행하시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을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죽음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한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이 죄의 결과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 이렇게 죽음을 선고하십니다.
창세기3:19, "네가 얼굴이 땀이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여기에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육체가 영혼과 분리되는 것,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로마의 성도들에게 교훈합니다.
로마서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또한 야고보도 죽음이 죄의 결과임을 이렇게 말합니다.(야고보서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런데, 최초의 인간 아담은 모든 인간의 대표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범죄한 결과로 인해 주어진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미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5:15, "한 사람(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자 ! 그렇다면, 여러분 !
죽음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취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
성경은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낫다 했습니다.
전도서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왜냐하면, 많은 지혜와 교훈을 얻기 때문입니다.
자 !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
첫째, 죽음에 대해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닙니다.
지금보다 훨씬 좋고 아름다운,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죽음은 모든 수고와 고통을 그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主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또한 죽음은 눈물을 씻고 위로를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또한 죽음은 우리를 위해 예비된 면류관을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者에게니라"
고로 성도인 우리들은 죽음 때문에 절망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둘째, 죽음의 원인 그리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축복된 삶을 맞이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죽음 자체는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언약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향해 말하기를,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라고까지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5: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죽음을 대할 때마다,
죄가 죽음의 원인임을 다시금 기억하여 죄로부터 멀리하는 결단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도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죄를 향하는 습성을 고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그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을 유일한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고,
믿음의 길을 온전히 걷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사도행전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셋째, 사명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들을 이 땅에 두시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들을 통해서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경우를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좀처럼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분명, 우리들의 죄를 지시고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시기 전에도 여러 가지 행하실 일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하시는 일, 병든 자, 가난한 자, 죽은 자들에게
새 생명과 새 삶을 주시는 일,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시는 일 등등.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다 행하신 후, 이렇게 운명하셨습니다.
요한복음19:30, "다 이루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렇듯 우리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대할 때,
아직 내가 살아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직 내 영혼을 데려가시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나 자신을 통해 이 땅에 이루실 것이 있기 때문임을 기억하고,
그 일이 무엇인지를 기도하는 가운데 깨닫고,
전심전력하여 행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아직 내 영혼을 데려가시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나를 통해 이 땅에 이루실 것이 있기 때문이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무엇을 죽음이라고 합니까 ?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에서 우리의 영혼을 분리하여 자신의 곳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왜 우리 인간은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까 ?
그렇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는 오직 사망(死亡)뿐입니다.
우리는 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는 죽음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
1> 죽음에 대해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2>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3> 사명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 영혼을 데려가시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이루실 것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예수님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하늘 나라에 예비된 아름다운 면류관을 차지하는
복된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