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2013년8월18일, 요한복음8:1-11(율법의 従이 되지 말고, 은혜의 제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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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함께 한 복된 지체들과 자신을 향해 이렇게 축복합시다.
"우리 ! 믿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거룩함을 향해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를 거룩으로 이끌어갑니다."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욕구와의 싸움에서, 절대로 패하지 맙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여러 가지로, 사람들의 등급을 매깁니다.
예를 들면, 학생들은 학업성적, 운동능력, 성실도 등에 따라,
예를 들면, 학생들은 학업성적, 운동능력, 성실도 등에 따라,
학교와 선생님들로부터 보이지 않게 등급을 매김 당합니다.
또 어른들은 직장, 직위, 재물, 권력, 경영하는 사업장의 크기 등으로,
또 어른들은 직장, 직위, 재물, 권력, 경영하는 사업장의 크기 등으로,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등급이 매겨지는 것을 느끼며 삽니다.
물론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을 차별하기 위해 등급을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들 인생은 이런 등급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은혜'와는 반대되는 경쟁, 등급, 실력 등이 강조되는 그런 모습을 띨 때가
참 많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예수님을 대적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붙들려 있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붙들려 있었습니다.
이들은 왜 이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까요 ?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 싶었습니다.
당시 그들의 율법지침서였던 산헤드린7:4절에는, 유부남 유부녀가 간통을 하면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 그들의 율법지침서였던 산헤드린7:4절에는, 유부남 유부녀가 간통을 하면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약혼한 처녀가 타인과 간통을 해도, 즉시 돌로 쳐서 죽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여인을 끌어 온 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본문5절,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그렇다면 여러분 !
왜 이 질문이 예수님께 함정이 됩니까 ?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만약 예수님께서 여인을 돌로 쳐야한다고 말씀하셨을 경우.
이럴 경우,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전하셨던,
복음의 핵심인 '용서'와 '사랑'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세상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이것 봐 ! 저 예수도 별 수 없잖아 !" "사랑은 무슨 사랑이야 ?!"
"이것 봐 ! 저 예수도 별 수 없잖아 !" "사랑은 무슨 사랑이야 ?!"
또한 당시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던 유대인에게는,
사형을 선고하고나 집행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고로 돌로 치라는 말은 곧 로마 정권과의 충돌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여인을 돌로 쳐야한다고 말씀했다면,
고로 돌로 치라는 말은 곧 로마 정권과의 충돌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여인을 돌로 쳐야한다고 말씀했다면,
그들은 분명 예수님을 로마 정부에 고소했을 것입니다.
마음대로 재판을 했다고요. 말입니다.
둘째, 만약 예수님께서 여인을 돌로 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을 경우.
이럴 경우 그들은, 예수님을 모세 율법의 권위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분으로 매도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더구나 당시에, 모세의 율법에 대항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여인의 죄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이런 음모를 꾸민 이들은, 은혜가 아닌 非은혜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사는 세계는 무서운 세계였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사람, 정직한 사람의 기준을 정하고,
그들은, 거룩한 사람, 정직한 사람의 기준을 정하고,
자신들을 그 기준을 맞추려고 나름대로 힘을 기울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철저히 구별하여 드리며,
또 하루 세 번 이상 씩 정해진 시간에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구제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겉으로는 간음하지도 않았고, 이웃의 것을 탐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구제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겉으로는 간음하지도 않았고, 이웃의 것을 탐하지도 않았으며,
거짓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큰 문제는, 이런 율법의 행위를 바탕으로,
자기들 보다 낮고,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또 차별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한 기준으로 사람들의 등급을 매겼습니다.
그리고는 그 기준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가차없이 박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한 마디로, '율법의 종(從)'이었던 것입니다.
소설 '톰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이러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개와 고양이를 한 우리에 두었더니 서로 적응하며 잘 살았습니다.
다음은 새와 돼지와 염소를 역시 한 우리에 두었더니 잘 살았습니다.
이번에는 침례교인, 장로교인, 카톨릭교도를 한 방에 두었더니 서로 죽이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큰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등급을 매기고,
내 편 네 편하며, 마땅히 하나되어야 할 지체들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버립니다.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쪽에는 온갖 배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쪽에는 온갖 배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다른 지체의 편에게는 작은 실수에도 날카로운 칼을 들이댑니다.
분명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바라고 소망하면서도,
분명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바라고 소망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非은혜 세계에 푹 빠져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자칭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말씀을 이용해서 연약한 사람들을 집요하고 잔악하게 괴롭히는 아주 나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얇디얇은 성경 지식은 오히려 흉기가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큰 문제는, 이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자칫하다가는 놀랍게 잔혹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자칫하다가는 놀랍게 잔혹해 질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들의 자녀에게 그럴 수 있습니다.
소설 '노인과 바다'로 널리 알려진 헤밍웨이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헤밍웨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우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특히 어머니 그레이스 홀은 철저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헤밍웨이는 어려서부터 지나치리만큼 엄한 신앙교육을 강조한 어머니와,
항상 마음의 간격을 두고 살았습니다.
당연히 헤밍웨이의 신앙 생활은 온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어머니인 그레이스 홀은, 헤밍웨이를 위로하고 격려하기보다는,
당연히 헤밍웨이의 신앙 생활은 온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어머니인 그레이스 홀은, 헤밍웨이를 위로하고 격려하기보다는,
심각한 자극만을 가했습니다.
어느 해, 어머니가 헤밍웨이에게 생일 선물을 보냈는데,
그 속에는 헤밍웨이의 아버지가 자살한 총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토록 세상에 치우친 삶을 살 바에는 차라리 목숨을 끊으라는 의미였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헤밍웨이는 예수 믿는 어머니를 저주하며 살았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헤밍웨이는 예수 믿는 어머니를 저주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말년, 기쁨과 평안이 없는 삶을 살다가,
결국 사냥총을 자기 입에 넣고 방아쇠를 당겨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도 당연히 가르쳐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르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약한 자 앞에 철저히 잔인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본문7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들은 예수님께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본문7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아마도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겠지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당장에 돌로 쳐야 합니까 ?" "돌로 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요구는, 한 가운데 무릎 꿇려 팽개쳐 있는 그 여인에게는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요구는, 한 가운데 무릎 꿇려 팽개쳐 있는 그 여인에게는
날카로운 칼날이었고, 커다란 두려움이었습니다.
한동안 잠잠하셨던 예수님께서, 드디어 한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문7절,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
참으로 엄청난 말씀이었습니다.
본문7절,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
참으로 엄청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한 마디의 말씀은,
자기들의 지은 죄와는 아랑곳없이, 눈앞에 나타난 여인의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감상적인 의(義)에 빠졌던 무리들에게, 강한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인을 고소하던 모든 무리들을,
더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인을 고소하던 모든 무리들을,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게 하였습니다.
결국 어른들은 물론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무서운 기세로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쳐들었던 그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님의 그 엄중한 말씀 앞에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곳에는 예수님과 여인만이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엄했지만 따뜻한 음성으로 여인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본문11절, "나도 너를 정죄(定罪)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
예수님은, 판단과 등급, 그리고 자기 의(義)가 판치는 非은혜의 세상에서,
따뜻한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품어서 용서해주시고,
그 사람을 다시는 죄짓지 않게 하셨습니다.
분명 이 여인은 결혼 제도 및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습니다.
분명 악성 바이러스입니다.
이 정도 되었으면 교회에서조차 배척 당할 수 있습니다.
용서받을 어떤 자격도 없었습니다.
죄의 형벌로부터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두려움을 아셨습니다.
이 여인의 절규와 신음과 공포와 절망을 아시고 들으셨습니다.
비록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살고자하는 간절한 소망을 아셨습니다.
여러분 ! 이것이 은혜입니다. 자격이 없는 자가 받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 여인의 절규와 신음과 공포와 절망을 아시고 들으셨습니다.
비록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살고자하는 간절한 소망을 아셨습니다.
여러분 ! 이것이 은혜입니다. 자격이 없는 자가 받는 것이 은혜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분명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죄는 지적하셨지만, 그 죄를 지은 죄인은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지적하셨지만, 그 죄를 지은 죄인은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 어떻게 이런 용서가 가능합니까 ?
그것은, 저와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 여기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파괴하는 분입니까 ?
무조건, 어떤 죄라도, 그 죄를 간단하게 용서하실 수 있는 분입니까 ?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 여기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파괴하는 분입니까 ?
무조건, 어떤 죄라도, 그 죄를 간단하게 용서하실 수 있는 분입니까 ?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에는, 보다 깊은 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대신해서 돌에 맞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대신해서, 온갖 고통을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피 한 방울 남김없이, 우리의 죄를 위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대신해서, 온갖 고통을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피 한 방울 남김없이, 우리의 죄를 위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대로 定罪하면, 영원히 멸망 받을 죄인입니다.
그러나 죄인 된 우리를, 예수님께서 품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본향교회에는 이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은혜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창에 찔리신 것은 우리들의 허물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채찍에 상하신 것은 우리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 옆구리의 창 자국과, 온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 머리의 가시면류관과 얼굴의 피는, 우리의 교만함과 악함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채찍에 상하신 것은 우리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 옆구리의 창 자국과, 온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 머리의 가시면류관과 얼굴의 피는, 우리의 교만함과 악함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용서는 값싼 동정이나 요술이 아니라, 값비싼 은혜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신 용서를 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최고의 비밀이며, 사랑이며, 용서의 은혜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신 용서를 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최고의 비밀이며, 사랑이며, 용서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무너뜨리는 분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세워 가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 주님의 은혜의 방울이 우리에게 뚝뚝 떨어질 때, 우리가 살아납니다.
은혜를 받아야 사람이 참으로 변합니다.
세상 다른 것으로는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사람이 참으로 변합니다.
세상 다른 것으로는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골수 죄인들입니다. 도저히 방법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낙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뚝뚝 떨어지는 보혈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용서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이 은혜를 느끼며 누리며 사십니까 ?
왜 저 사람 때문에 안 된다고 합니까 ?
왜 그 사람 때문에 교회가 가정이 사업이 나라가 안 된다고 말합니까 ?
왜 남의 탓합니까 ?
내가 녹으면 되는 것입니다. 왜 남부터 녹이려고 합니까 ?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직장이 변합니다.
왜 저 사람 때문에 안 된다고 합니까 ?
왜 그 사람 때문에 교회가 가정이 사업이 나라가 안 된다고 말합니까 ?
왜 남의 탓합니까 ?
내가 녹으면 되는 것입니다. 왜 남부터 녹이려고 합니까 ?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직장이 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 본향교회를 은혜가 철철 넘쳐흐르는 그런 교회가 되게 합시다.
신앙과 물질과 배움과 외모와 열심 등으로 등급을 매기지 맙시다.
판단하지 맙시다.
포용해주고, 칭찬해주고, 감싸주고, 격려해주고, 안아주고, 바로 살도록 사랑으로 충고해 주는,
우리 본향교회를 은혜가 철철 넘쳐흐르는 그런 교회가 되게 합시다.
신앙과 물질과 배움과 외모와 열심 등으로 등급을 매기지 맙시다.
판단하지 맙시다.
포용해주고, 칭찬해주고, 감싸주고, 격려해주고, 안아주고, 바로 살도록 사랑으로 충고해 주는,
그런 교회가 되게 합시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 율법의 종(從)이 되지 말고, 은혜의 제자가 됩시다.
우리 율법의 종(從)이 되지 말고, 은혜의 제자가 됩시다.
우리 본향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은 참으로 상처 많은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우리 교회에 맡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본향교회에서, 비로소 그들의 영혼을 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상처 많은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우리 교회에 맡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본향교회에서, 비로소 그들의 영혼을 살아날 것입니다.
모세의 제자가 되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시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