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010년4월25일, 요나3:1-10(한 생명이 구원받음에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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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계신 복스러운 지체들을 이렇게 축복합시다.
바로 지금,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예배)을 선택한 당신,
하나님도 항상 당신을 선택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당신의 결단이, 하늘나라까지 이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에서 지친 우리들을 오늘도 이 귀한 곳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위해 예비하신 커다란 은혜를 모두에게 풍성히 부어주실 것을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한 가지 묻겠습니다.
한사람의 복음 전도자를 통해,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한사람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면,
이 놀라운 구속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첫째, 복음 전도자의 능력일까요 ?
물론 여기에서 전도자의 능력이라 함은,
전도자로서의 그가 가진 사명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전도자로서 그가 가진 성령의 은사 등 모든 靈肉 간의 능력과 자세를 모두 포함합니다.
신약성경에는 하루에 삼천 명이나 구원받은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사도행전2장에 기록된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베드로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사도행전2:41, "그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즉, 하루에 삼천 명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역시 한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베드로와 같은 훌륭한 전도자가 가장 중요하구나"
그런데 여러분 !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전혀 위의 주장을 뒷받침해주지 못합니다.
사도행전2장에서 구원받은 수가 삼천이었다면,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니느웨에서 건짐 받은 수는 자그마치 십 이만 명입니다.
십 이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데,
복음전도자로 쓰임 받은 사람은 여러 명이 아니라 단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요나라는 이름을 가진 선지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에 크게 쓰임 받은 요나가 그토록 훌륭한 선지자였을까요 ?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요나 그는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싫어서
멀리 도망했던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는 "이스라엘 만 떠나면 하나님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겠지"라고 생각한
잘못(편협)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요나1장)
심지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늘로부터의 재앙을 피하게 되자,
그는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불평했습니다.
요나4: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백성들에게 복음은 전했지만,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요나는 곧 멸망할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조금의 동정심도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전파했을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 맡기신 사명을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용서받는 것을 분명히 원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그 사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요나를 보면서, 한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전도자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전도자가 담당할 중요한 부분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로마서10:14-15,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하나님은 복음전파를 위해 다니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마태복음28:19-20,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러나 여러분 !
앞에서 보았듯이 전도자의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둘째, 전도자가 전한 말씀의 내용일까요 ?
즉, 이미 소개한 사도행전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가 훌륭했기에
삼천 명이나 전도될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부분 역시도 전혀 뒷받침해주지 못합니다.
요나가 전한 멧세지는 결코 니느웨를 격려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는 용서의 말씀을 선언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회개의 은혜를 전파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파멸과 최후의 심판을 예언했을 뿐입니다.
본문4절,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의 메시지는 협박에서 시작해서 협박으로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듣고 감동을 받을 만한 그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당신 미친 것 아니야 !" "뭐 ! 우리가 망한다고 !"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는 구만 !"
그렇습니다. 여러분 !
구원에 있어서 전도자의 메시지는 분명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듯이 그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셋째, 복음을 전해 받는 사람의 자세일까요 ?
즉, 니느웨 백성들이 구원받기에 충분한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작은 외침에도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렀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도 본문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에 대해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었습니다.
요나1:2, "너는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그렇습니다. 니느웨는 악으로 가득 찬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에게 특별한 계시를 받은 민족도,
선택받은 민족도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세월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다듬어지고 또 다듬어져서
이제 작은 회개의 외침에도 무너질 만한
그런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민족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니느웨가 그 엄청난 구원을 경험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니느웨 백성들의 준비됨'이라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
그토록 교만한고 악독한 니느웨 백성들이,
불순종의 대명사, 백성을 사랑함이 없던 평범한 선지자 요나에 의해,
더구나 아무런 긍휼도 없는 한 마디 말씀을 통해,
십이 만 명이나 회개하는 엄청난 기적을 일으켰을까요 ?
사랑하는 여러분 ! 이 놀라운 기적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
그렇습니다.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불평하는 요나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4:10-11,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명이며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그렇습니다.
니느웨의 놀라운 회개의 역사, 구원의 역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전도자의 자질도, 전도자가 전한 말씀도,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해들은 백성들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전도자를 향한, 그리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오늘 제4회 코리안 파티를 개최합니다.
우리는 요나와 같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단번에 이 땅의 영혼들을 변화시킬 만한 자질이 없습니다.
말씀의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사랑도 부족합니다.
오늘 이 땅의 영혼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들을 충분히 전할 실력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땅 일본은 니느웨와 비교해 볼 때 결코 뒤짐이 없는 죄악의 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니느웨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일본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 일본과 일본의 영혼들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분이십니다.
지금 그 사랑이 이곳에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합니다.
요나와 같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니느웨에서 일어났던 그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폭발적으로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
바로 지금,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예배)을 선택한 당신,
하나님도 항상 당신을 선택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당신의 결단이, 하늘나라까지 이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에서 지친 우리들을 오늘도 이 귀한 곳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위해 예비하신 커다란 은혜를 모두에게 풍성히 부어주실 것을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한 가지 묻겠습니다.
한사람의 복음 전도자를 통해,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한사람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면,
이 놀라운 구속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첫째, 복음 전도자의 능력일까요 ?
물론 여기에서 전도자의 능력이라 함은,
전도자로서의 그가 가진 사명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전도자로서 그가 가진 성령의 은사 등 모든 靈肉 간의 능력과 자세를 모두 포함합니다.
신약성경에는 하루에 삼천 명이나 구원받은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사도행전2장에 기록된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베드로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사도행전2:41, "그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즉, 하루에 삼천 명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역시 한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베드로와 같은 훌륭한 전도자가 가장 중요하구나"
그런데 여러분 !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전혀 위의 주장을 뒷받침해주지 못합니다.
사도행전2장에서 구원받은 수가 삼천이었다면,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니느웨에서 건짐 받은 수는 자그마치 십 이만 명입니다.
십 이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데,
복음전도자로 쓰임 받은 사람은 여러 명이 아니라 단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요나라는 이름을 가진 선지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에 크게 쓰임 받은 요나가 그토록 훌륭한 선지자였을까요 ?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요나 그는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싫어서
멀리 도망했던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는 "이스라엘 만 떠나면 하나님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겠지"라고 생각한
잘못(편협)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요나1장)
심지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늘로부터의 재앙을 피하게 되자,
그는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불평했습니다.
요나4: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백성들에게 복음은 전했지만,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요나는 곧 멸망할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조금의 동정심도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전파했을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 맡기신 사명을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용서받는 것을 분명히 원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그 사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요나를 보면서, 한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전도자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전도자가 담당할 중요한 부분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로마서10:14-15,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하나님은 복음전파를 위해 다니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마태복음28:19-20,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러나 여러분 !
앞에서 보았듯이 전도자의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둘째, 전도자가 전한 말씀의 내용일까요 ?
즉, 이미 소개한 사도행전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가 훌륭했기에
삼천 명이나 전도될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부분 역시도 전혀 뒷받침해주지 못합니다.
요나가 전한 멧세지는 결코 니느웨를 격려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는 용서의 말씀을 선언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회개의 은혜를 전파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파멸과 최후의 심판을 예언했을 뿐입니다.
본문4절,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의 메시지는 협박에서 시작해서 협박으로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듣고 감동을 받을 만한 그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당신 미친 것 아니야 !" "뭐 ! 우리가 망한다고 !"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는 구만 !"
그렇습니다. 여러분 !
구원에 있어서 전도자의 메시지는 분명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듯이 그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셋째, 복음을 전해 받는 사람의 자세일까요 ?
즉, 니느웨 백성들이 구원받기에 충분한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작은 외침에도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렀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도 본문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에 대해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었습니다.
요나1:2, "너는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그렇습니다. 니느웨는 악으로 가득 찬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에게 특별한 계시를 받은 민족도,
선택받은 민족도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세월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다듬어지고 또 다듬어져서
이제 작은 회개의 외침에도 무너질 만한
그런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민족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니느웨가 그 엄청난 구원을 경험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니느웨 백성들의 준비됨'이라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
그토록 교만한고 악독한 니느웨 백성들이,
불순종의 대명사, 백성을 사랑함이 없던 평범한 선지자 요나에 의해,
더구나 아무런 긍휼도 없는 한 마디 말씀을 통해,
십이 만 명이나 회개하는 엄청난 기적을 일으켰을까요 ?
사랑하는 여러분 ! 이 놀라운 기적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
그렇습니다.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불평하는 요나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4:10-11,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명이며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그렇습니다.
니느웨의 놀라운 회개의 역사, 구원의 역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전도자의 자질도, 전도자가 전한 말씀도,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해들은 백성들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전도자를 향한, 그리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오늘 제4회 코리안 파티를 개최합니다.
우리는 요나와 같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단번에 이 땅의 영혼들을 변화시킬 만한 자질이 없습니다.
말씀의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사랑도 부족합니다.
오늘 이 땅의 영혼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들을 충분히 전할 실력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땅 일본은 니느웨와 비교해 볼 때 결코 뒤짐이 없는 죄악의 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니느웨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일본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 일본과 일본의 영혼들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분이십니다.
지금 그 사랑이 이곳에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합니다.
요나와 같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니느웨에서 일어났던 그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폭발적으로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