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010년3월28일, 마태복음27:15-26(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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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계신 복스러운 지체들을 이렇게 축복합시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당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깊이 체험되어지는 이번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3월26일(금요일), 足利事件과 관련해서
菅家利和(すがや としかず)さん의 무죄가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足利事件이란, 지난 1990년5월12일,
日本 도치키켄 足利市에 있는 파칭고점의 주차장에서
당시 4세 여자 어린이가 행방불명되었고,
다음 날 아침, 사건 현장에서 멀지 않은 하천 부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입니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의 범인으로 스가야さん을 체포했습니다.
이유는 여자 어린이의 옷에 묻어있던 체액(體液)의 DNA와 스가야さん의 DNA가
1000분의 1.2정도의 오차로 일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DNA검사 결과 스가야さん이 범인이 아닐 확률은
1000분의 1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스가야さん 본인은 계속해서 자신의 무죄를 호소했습니다.
이에 최근에 와서 더욱 발전된 검사방법으로 새롭게 DNA를 검사한 결과,
스가야さん이 범인이 아닌 것이 밝혀졌습니다.
결국 스가야さん은 17년이 넘도록 살인범 취급을 당하고,
차디찬 형무소에서 참으로 억울한 날들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지난 3월26일에 있었던 최종재판에서 재판관은 스가야さん을 향해서
이렇게 사죄했습니다.
"眞實の聲に十分に耳を傾けられず,
17年半の長きにわたり自由を奪うことになりました. 誠に申し譯なく思います."
일본의 각종 언론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사법부와 재판관들이
더욱 신중하게 판결에 임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오심(誤審)은 그와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에게
심각한 상처와 부작용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오늘 본문에도 역사에 길이 길이 기억에 남는 오심(誤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엄청난 오심을 내린 사람은 바로 빌라도입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판결로 죽임 당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물론, 우리의 主님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판결해 십자가에 처참히 죽인 것은
분명 빌라도의 책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판결을 내릴 때,
과연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죄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을까요 ?
물론입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본문18절, "이는 저(빌라도)가 그들(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시기(猜忌)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누가복음23: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누가복음23: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
그에게는 절대적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중대한 법 결정은 스스로 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사형에 관해서는 반드시 로마의 허락을 얻어야 집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빌라도에게 이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빌라도 자신도 예수님에게 이것을 확실히 밝혔습니다.
요한복음19:10,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이런 상황에서 볼 때, 이제 빌라도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 무죄 ! 석방 !"
아무 죄도 없는 시민을 사형시킨다는 것은 자기모순에 빠지는 일이요,
이러한 처사는 로마법에도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기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권한을, 성실히 행사해 버리면,
이 사건은 간단히 종결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그렇게 결정을 하려니까 염려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고민에 빠집니다.
바로 그 시점에서 빌라도에게, 자신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세 가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슨 소리들이었을까요 ?
첫째, 수많은 군중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소리는 매우 컸습니다. 그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외치는 큰 소리는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하는 소리였습니다.
지금 빌라도의 귀에는 절대 권력도 흔들 만큼의
큰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민합니다.
'이 큰 소리를 무시했다가는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날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
'저 예수를 살리려다 패가망신하진 않을까 ?'
'저 큰 소리를 내가 어떻게 거절하나 ?'
'만약 내가 이 소리를 거절하면 조금 후에는
총독 물러가라 ! 총독 물러가라 ! 할 텐데... 어떻게 하나 ?'
'그래 ! 나는 손만 씻으면 돼 ! 죄 값은 저들이 받을 거야 !'
둘째, 그의 귀에 들려온 소리는 자기 아내의 작은 소리였습니다.
본문19절,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사람들이 꾸는 꿈은 하나님 계시의 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예를 들면, 애굽 왕 바로의 꿈,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꿈,
요셉의 꿈, 다니엘의 꿈 등입니다.
그런데 지금, 빌라도의 아내가 꿈을 꾸었습니다.
더구나 그 내용이 심상치 않습니다.
빌라도가 수많은 군중 앞에서 재판을 하는 그 긴박한 상황에,
꿈의 내용을 심각하게 생각한 빌라도의 아내는 남편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평소 정숙하고 침착한 여인이었을 그녀가 이번에는 다급히 행동합니다.
빌라도는 분명히 아내의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 빌라도는 왜 그 소리를 전해 듣고도 무시했을까요 ?
그렇습니다. 그 소리는 매우 작은 소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우리들 삶에도 이와 비슷한 것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 무엇을 선택할까 ?
큰 소리를 들을 것인가, 혹 진실된 작은 소리를 들을 것인가 ?
거짓된 소리를 들을 것인가, 혹 옳은 소리를 들을 것인가 ?
이해 타산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혹 진리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
모세가 호렙산 기슭 가시나무 불꽃 가운데 있을 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조용하게 "네 발의 신을 벗으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소리는 평범하게 살고 있는 모세로 하여금
민족 구출이라는 대 사명을 자각케 한 소리였습니다.
지난주일 말씀드린 엘리야,
그가 왕후 이세벨의 협박을 피하여 동굴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밖으로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엘리야 앞에 여러 가지 역사(役事)를 펼치십니다.
먼저 산을 흔드는 요란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은 없었습니다.
그 다음 땅을 흔드는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도 하나님의 음성은 없었습니다.
그런 뒤에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엘리야 혼자만이 들을 수 있는 작고 세미한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은 때로는 크고 강하지만,
어떤 때는 아주 작고 세미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빌라도는 자기 아내로부터 전달된 진리의 작은 소리를 무시했습니다.
결코 무시해서는 안될 소리였습니다.
셋째, 빌라도 자신의 양심으로부터 양심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예 소리가 없는 소리였습니다.
지금 빌라도에게는 군중들의 큰 소리, 아내의 작은 소리에 이어,
소리가 없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지금 빌라도의 양심을 때리는 그 소리의 내용은 분명합니다.
"그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 빨리 무죄를 선언하라"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끔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이나 존경의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당신은 너무나 훌륭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당신은 모범 사원이요,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요, 정직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부로부터 들리는 모든 칭찬의 소리는 내 양심이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느낍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말해도 내 양심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그 칭찬의 소리는 오히려 나에게 괴로움이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양심에 비췬 자기를 보고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로마서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로마서7:21, "내가 깨달았노니 .....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로마서7:22-24,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우리도 때로는 이런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의 소리는 수백 명의 고함소리보다,
또 가장 가까운 친구가 전해주는 진실된 소리보다 더 무서운 소리입니다.
빌라도는 오늘 이 세 가지의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이제 그는 이 세 가지 들려오는 소리 중에 어떤 한 소리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 ! 빌라도는 과연 무엇을 선택했을까요 ?
그는 말합니다.
본문22절, "그리스도라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여러분 ! 지금 누구에게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까 ?
그렇습니다. 군중들을 향해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여러분 !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군중들에게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 ?"라고 물으면 그 답은 무엇일까요 ?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주소서"입니다.
여러분 !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들려 오는 소리 중, 우리들이 무엇을 선택하는 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
누구에게 물으러 가는가, 누구와 상담하러 가는가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에 나아가 상담하면, 세상의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 상담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전에 무릎꿇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빌라도는 안타깝게도 군중을 향해 나가고 말았습니다.
잠간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갈라서야 하는 시간을 맞이합니다.
양쪽 다 재산규모가 커지다 보니 생활권을 따로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축업을 하는 그들로서는 양떼를 방목할 수 있는 풀밭과 물이 가장 중요한데,
그런 환경을 갖춘 지역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합니까 ?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주지요 !
창세기13:9,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때 롯의 양심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
'지금까지 이렇게 키워주시고 돌봐주시고 재산을 불리도록 해 주신 삼촌에게
이 좋은 것을 다 드리고 나는 개척지를 향해 떠나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그 소리는 무시하고,
아내와 주변 사람들의 큰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땅을 자기가 선택해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선택은 당장은 성공한 것 같아 보였지만,
그가 선택한 곳은 불과 유황, 멸망의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만약 빌라도가 소리 없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무죄를 선포하고 그에 따르는 어떤 희생도 감수했더라면
오늘날 사도신경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작지만 진리의 소리, 소리는 없지만 참된 양심의 소리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양심을 속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소리를 선택했습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아,
빌라도에게 들려 온 세 가지의 소리를 우리도 함께 똑같이 들어 보았습니다.
어떤 소리를 들을 것인가는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부디 세미한 소리, 양심의 그 소리를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단 한 사람이 전한 소리라도 그것이 진리의 소리라면 들으시기 바랍니다.
귓전에는 들리지 않지만 가슴속으로부터 들려 오는 하나님의 소리가 있다면
그 양심의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들려 온 소리를 따라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우리가 분명한 소리를 들었는데도 그 명령에 따르지 못하는 것은,
무슨 대단한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대부분은 우리가 조금만 결단하면 순종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감당할 만한 것을 원하십니다.
여러분 !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떤 세미한 음성이 들립니까 ?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떤 양심의 소리가 들립니까 ?
자 ! 이 시간 함께 묵상하며 기도해 봅시다.
함께 찬양합시다.(찬송가 185장)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죄 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려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代贖)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이번 한 주간, 우리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구체적으로 헌신을 결심하고,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감동의 소리에 묵묵히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당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깊이 체험되어지는 이번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3월26일(금요일), 足利事件과 관련해서
菅家利和(すがや としかず)さん의 무죄가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足利事件이란, 지난 1990년5월12일,
日本 도치키켄 足利市에 있는 파칭고점의 주차장에서
당시 4세 여자 어린이가 행방불명되었고,
다음 날 아침, 사건 현장에서 멀지 않은 하천 부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입니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의 범인으로 스가야さん을 체포했습니다.
이유는 여자 어린이의 옷에 묻어있던 체액(體液)의 DNA와 스가야さん의 DNA가
1000분의 1.2정도의 오차로 일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DNA검사 결과 스가야さん이 범인이 아닐 확률은
1000분의 1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스가야さん 본인은 계속해서 자신의 무죄를 호소했습니다.
이에 최근에 와서 더욱 발전된 검사방법으로 새롭게 DNA를 검사한 결과,
스가야さん이 범인이 아닌 것이 밝혀졌습니다.
결국 스가야さん은 17년이 넘도록 살인범 취급을 당하고,
차디찬 형무소에서 참으로 억울한 날들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지난 3월26일에 있었던 최종재판에서 재판관은 스가야さん을 향해서
이렇게 사죄했습니다.
"眞實の聲に十分に耳を傾けられず,
17年半の長きにわたり自由を奪うことになりました. 誠に申し譯なく思います."
일본의 각종 언론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사법부와 재판관들이
더욱 신중하게 판결에 임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오심(誤審)은 그와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에게
심각한 상처와 부작용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오늘 본문에도 역사에 길이 길이 기억에 남는 오심(誤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엄청난 오심을 내린 사람은 바로 빌라도입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판결로 죽임 당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물론, 우리의 主님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판결해 십자가에 처참히 죽인 것은
분명 빌라도의 책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판결을 내릴 때,
과연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죄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을까요 ?
물론입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본문18절, "이는 저(빌라도)가 그들(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시기(猜忌)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누가복음23: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누가복음23: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
그에게는 절대적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중대한 법 결정은 스스로 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사형에 관해서는 반드시 로마의 허락을 얻어야 집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빌라도에게 이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빌라도 자신도 예수님에게 이것을 확실히 밝혔습니다.
요한복음19:10,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이런 상황에서 볼 때, 이제 빌라도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 무죄 ! 석방 !"
아무 죄도 없는 시민을 사형시킨다는 것은 자기모순에 빠지는 일이요,
이러한 처사는 로마법에도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기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권한을, 성실히 행사해 버리면,
이 사건은 간단히 종결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그렇게 결정을 하려니까 염려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고민에 빠집니다.
바로 그 시점에서 빌라도에게, 자신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세 가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슨 소리들이었을까요 ?
첫째, 수많은 군중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소리는 매우 컸습니다. 그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외치는 큰 소리는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하는 소리였습니다.
지금 빌라도의 귀에는 절대 권력도 흔들 만큼의
큰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민합니다.
'이 큰 소리를 무시했다가는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날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
'저 예수를 살리려다 패가망신하진 않을까 ?'
'저 큰 소리를 내가 어떻게 거절하나 ?'
'만약 내가 이 소리를 거절하면 조금 후에는
총독 물러가라 ! 총독 물러가라 ! 할 텐데... 어떻게 하나 ?'
'그래 ! 나는 손만 씻으면 돼 ! 죄 값은 저들이 받을 거야 !'
둘째, 그의 귀에 들려온 소리는 자기 아내의 작은 소리였습니다.
본문19절,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사람들이 꾸는 꿈은 하나님 계시의 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예를 들면, 애굽 왕 바로의 꿈,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꿈,
요셉의 꿈, 다니엘의 꿈 등입니다.
그런데 지금, 빌라도의 아내가 꿈을 꾸었습니다.
더구나 그 내용이 심상치 않습니다.
빌라도가 수많은 군중 앞에서 재판을 하는 그 긴박한 상황에,
꿈의 내용을 심각하게 생각한 빌라도의 아내는 남편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평소 정숙하고 침착한 여인이었을 그녀가 이번에는 다급히 행동합니다.
빌라도는 분명히 아내의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 빌라도는 왜 그 소리를 전해 듣고도 무시했을까요 ?
그렇습니다. 그 소리는 매우 작은 소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우리들 삶에도 이와 비슷한 것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 무엇을 선택할까 ?
큰 소리를 들을 것인가, 혹 진실된 작은 소리를 들을 것인가 ?
거짓된 소리를 들을 것인가, 혹 옳은 소리를 들을 것인가 ?
이해 타산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혹 진리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
모세가 호렙산 기슭 가시나무 불꽃 가운데 있을 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조용하게 "네 발의 신을 벗으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소리는 평범하게 살고 있는 모세로 하여금
민족 구출이라는 대 사명을 자각케 한 소리였습니다.
지난주일 말씀드린 엘리야,
그가 왕후 이세벨의 협박을 피하여 동굴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밖으로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엘리야 앞에 여러 가지 역사(役事)를 펼치십니다.
먼저 산을 흔드는 요란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은 없었습니다.
그 다음 땅을 흔드는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도 하나님의 음성은 없었습니다.
그런 뒤에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엘리야 혼자만이 들을 수 있는 작고 세미한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은 때로는 크고 강하지만,
어떤 때는 아주 작고 세미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빌라도는 자기 아내로부터 전달된 진리의 작은 소리를 무시했습니다.
결코 무시해서는 안될 소리였습니다.
셋째, 빌라도 자신의 양심으로부터 양심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예 소리가 없는 소리였습니다.
지금 빌라도에게는 군중들의 큰 소리, 아내의 작은 소리에 이어,
소리가 없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지금 빌라도의 양심을 때리는 그 소리의 내용은 분명합니다.
"그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 빨리 무죄를 선언하라"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끔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이나 존경의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당신은 너무나 훌륭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당신은 모범 사원이요,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요, 정직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부로부터 들리는 모든 칭찬의 소리는 내 양심이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느낍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말해도 내 양심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그 칭찬의 소리는 오히려 나에게 괴로움이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양심에 비췬 자기를 보고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로마서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로마서7:21, "내가 깨달았노니 .....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로마서7:22-24,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우리도 때로는 이런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의 소리는 수백 명의 고함소리보다,
또 가장 가까운 친구가 전해주는 진실된 소리보다 더 무서운 소리입니다.
빌라도는 오늘 이 세 가지의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이제 그는 이 세 가지 들려오는 소리 중에 어떤 한 소리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 ! 빌라도는 과연 무엇을 선택했을까요 ?
그는 말합니다.
본문22절, "그리스도라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여러분 ! 지금 누구에게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까 ?
그렇습니다. 군중들을 향해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여러분 !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군중들에게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 ?"라고 물으면 그 답은 무엇일까요 ?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주소서"입니다.
여러분 !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들려 오는 소리 중, 우리들이 무엇을 선택하는 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
누구에게 물으러 가는가, 누구와 상담하러 가는가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에 나아가 상담하면, 세상의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 상담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전에 무릎꿇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빌라도는 안타깝게도 군중을 향해 나가고 말았습니다.
잠간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갈라서야 하는 시간을 맞이합니다.
양쪽 다 재산규모가 커지다 보니 생활권을 따로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축업을 하는 그들로서는 양떼를 방목할 수 있는 풀밭과 물이 가장 중요한데,
그런 환경을 갖춘 지역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합니까 ?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주지요 !
창세기13:9,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때 롯의 양심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
'지금까지 이렇게 키워주시고 돌봐주시고 재산을 불리도록 해 주신 삼촌에게
이 좋은 것을 다 드리고 나는 개척지를 향해 떠나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그 소리는 무시하고,
아내와 주변 사람들의 큰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땅을 자기가 선택해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선택은 당장은 성공한 것 같아 보였지만,
그가 선택한 곳은 불과 유황, 멸망의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만약 빌라도가 소리 없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무죄를 선포하고 그에 따르는 어떤 희생도 감수했더라면
오늘날 사도신경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작지만 진리의 소리, 소리는 없지만 참된 양심의 소리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양심을 속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소리를 선택했습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아,
빌라도에게 들려 온 세 가지의 소리를 우리도 함께 똑같이 들어 보았습니다.
어떤 소리를 들을 것인가는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부디 세미한 소리, 양심의 그 소리를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단 한 사람이 전한 소리라도 그것이 진리의 소리라면 들으시기 바랍니다.
귓전에는 들리지 않지만 가슴속으로부터 들려 오는 하나님의 소리가 있다면
그 양심의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들려 온 소리를 따라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우리가 분명한 소리를 들었는데도 그 명령에 따르지 못하는 것은,
무슨 대단한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대부분은 우리가 조금만 결단하면 순종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감당할 만한 것을 원하십니다.
여러분 !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떤 세미한 음성이 들립니까 ?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떤 양심의 소리가 들립니까 ?
자 ! 이 시간 함께 묵상하며 기도해 봅시다.
함께 찬양합시다.(찬송가 185장)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죄 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려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代贖)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이번 한 주간, 우리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구체적으로 헌신을 결심하고,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감동의 소리에 묵묵히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