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010년3월21일, 열왕기상19:9-14(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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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계신 복스러운 지체들을 이렇게 축복합시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당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내가 합심하여 기도하여, 큰 응답을 받읍시다.
인도 사람들에게 전해내려 오는 옛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고양이만 보면 너무나 무서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떠는 작은 쥐 한 마리를 어떤 마술사가 보았습니다.
그 쥐가 얼마나 불쌍해 보였든지 마술사는 그 쥐를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고양이가 또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나운 개가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마술사는 그 고양이를 개로 변신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개로 변한 고양이는 금방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번에는 호랑이가 무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모습도 불쌍히 여긴 마술사는 이번에도 그 개를 호랑이로 변신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
호랑이로 변신한 개는, 이제는 사냥꾼의 총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마술사가 이렇게 그 호랑이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너를 도와주어도 너의 두려움이 끝나지 않는구나 !
너는 별 수 없는 쥐로 구나. 다시 쥐로 돌아가라."
이 이야기는 많은 인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담대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움과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자들의 통계에 의하면 현대인의 열 명 중 한 명은
어떤 형태로든 자기연민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자기연민과 우울증은 대표적인 마음의 장애입니다.
육신이 아닌 마음이 병이 든 것입니다.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자기연민, 우울증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초라하고 비참한 존재라고 느낀다고 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가끔씩 슬픔과 좌절감이 마음에 밀려오면서
금방 마음이 침체되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쉽게 흥미와 의욕이 저하되고 무기력감에 빠진다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상실하고 삶의 의욕을 잃는다고 합니다.
의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자기연민, 우울증 증세에 시달리는 사람은
암에 걸릴 확률이 마음이 건강한 사람보다 2배 이상 높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은 몸의 면역체계 중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은 어떻습니다.
혹 자기 자신이 불쌍하거나 혹은 가끔씩 삶이 두렵고,
또 가끔씩 좌절감과 슬픔에 빠지곤 하지 않습니까 ?
윌리암 미첼 박사는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그의 책에서 '메뚜기的 사고방식에 빠진 자'로 혹평합니다.
왜 메뚜기로 비유했느냐 하면,
모세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을 정탐했던 12명 중 10명이 이렇게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3:32-33,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열 명의 정탐꾼은 자신들을 메뚜기와 같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여러분 ! 이 열 명의 정탐꾼에 대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듭니까 ?
첫째, 어찌하여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 !
둘째, 정말로 이해가 된다.
셋째, 어쩌면 그렇게 나와 똑 같으냐 !
성경에는 메뚜기的 사고방식에 빠진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믿음의 조상 사라가 그랬습니다.
"이 나이에 어찌 아들을 낳습니까 ?"
모세도 그랬습니다. "다른 이를 보내소서"
요나도 그러했습니다.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그러나, 여러분 !
이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생각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메뚜기的 사고방식에 빠진 사람이 오늘 본문에도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야는 탁월한 영성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자기연민과 우울증에 빠져있습니다.
그는 분명 갈멜산의 대적들과의 싸움에서는 이겼으나,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힘없이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넋두리합니다.
열왕기상19:4,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
왜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믿음의 사람들조차 자기연민, 우울증,
즉 메뚜기적 사고방식에 빠질까요 ?
첫째, 내 앞의 현실을 지나치게 크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불과 얼마 전, 바알 우상을 섬기는 850명과의 영적 대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엘리야를 왕후 이세벨이 협박합니다.
열왕기상19:2,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그런데 이 협박에 엘리야의 마음이 크게 흔들립니다.
열왕기상19:3,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또한 자기연민에 빠집니다.
열왕기상19:4,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그렇습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답지 않게, 자신 앞에 다가온 현실에 대해,
너무나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세벨의 협박을 지나치게 과대 해석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떱니다.
여러분 ! 정말로 지금 이세벨에게 엘리야를 죽일 마음과 힘이 있다면,
사람을 미리 보내, 준비시키는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
바로 병사를 보내서 엘리야를 잡겠지요.
여러분 !
지금 이세벨에게는 엘리야를 잡을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자신 앞의 현실을 지나치게 과대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은 자신의 걸음을 주님이 친히 주장하심을 믿으십니까 ?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삶 속에 함께 하심을 믿으십니까 ?
자 ! 그렇다면 호들갑을 버리십시오. 잠잠히 믿고 기다리십시오.
믿음의 조상 다윗을 기억해 봅시다.
다윗이 그 굉장한 골리앗을 넘지 못할 장벽으로 보았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골리앗을 있는 그대로 보았고, 자신 뒤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혹 지금 자기연민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
혹 우울하십니까 ? 혹 범사에 의욕이 없습니까 ?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여러분 앞에 펼쳐진 현실을 너무 확대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사람이나 환경을 크게 보지말고,
다윗처럼 주님을 크게 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둘째, 조급한 판단은 자칫 자기연민에 빠지게 합니다.
엘리야는 오늘 본문에서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기도중심으로 살아왔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충동적으로 행동합니다.
이세벨의 말 한마디(협박)에 기운을 잃고 도망합니다.
그렇습니다.
대개의 경우 마음이 성급한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돌발적인 행동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어떤 상황 속에서도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기를 부탁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교훈을 했습니다.
"조급하면 이스마엘을 얻고, 기다리면 이삭을 얻는다."
제가 한동안 자주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려고 마음먹으시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을 내게 주신다."
물론 우리들이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살피며 주님보다 앞서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말을 잘합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후회할 것입니다."
물론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결판나지 않습니다.
심지가 굳은 자를 축복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끝까지 설득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계획하신 복을 누릴 자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성도여러분 ! 혹, 지금 우울하십니까 ? 불안하십니까 ?
분명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훨씬 앞서 나가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시는 자리로 돌아가시기를 부탁합니다.
셋째, 인격적 사귐이 없으면 자기연민, 우울증에 빠집니다.
혹, 지금 우울하십니까 ?
아마도 여러분은 믿음의 성도들과 혹은 가족의 구성원들과 직장 동료들과
사귐이 부족한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엘리야의 최대의 단점은 사귐의 부족이었습니다.
열왕기상19:3에 보면, 사환도 자기에게서 멀리 있게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과의 사귐까지도 일방적으로 깨뜨리려 했습니다.
열왕기상19:4, "내 생명을 취하소서"
엘리야의 기질은 혼자만의 고독을 즐기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함께 교제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갑작스런 인생의 위기 상황에서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숙의하며,
합심하여 기도했더라면 그는 절대로 자기연민이나 우울증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홀로 광야로 나갑니다.
그리고는 "오직 나 홀로 남았구나"하며 자신을 학대합니다.
자조적인 독백과 볼멘소리로 푸념합니다.
여러분 ! 누가 엘리야에게 혼자 있으라고 했습니까 ?
뉴우튼이란 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리를 놓는 대신 담을 쌓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다섯 이상의 가족을 친구로 가진 사람은 반드시 성공적인 가정생활을 하며,
더구나 십 년 이상 지속되는 다른 가정과의 우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의 가정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영국 시인 요한 돈네는 "인간은 누구도 각각 떨어진 외딴 섬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대륙의 한 부분이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혹 지금 우울합니까 ? 자기연민에 빠져있습니까 ?
그 이유는 스스로 고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찾아 올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믿음의 친구들에게 손을 내어 미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넷째,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잃으면 자기연민에 빠집니다.
삶의 목적과 사명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쉽게 피곤을 느끼며,
목적을 상실할수록 인생의 허무함을 느낍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얼굴이 밝지 못합니다.
바람 빠진 고무풍선처럼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꿈적하지 않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민족을 살려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으로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려 호렙산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오히려 광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사명을 잃으니까, 사명을 뒤로하니까 로뎀 나무라고 하는
싸리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아 처량한 자기연민에 빠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사명감으로 사는 사람은 스스로 체념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 여러분은 어떤 목적과 사명감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
꿈과 비전이 뚜렷한 사람은 결코 자기연민에 빠질 틈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활력과 기상이 넘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맥없는 삶이 아니라,
힘차게 달려가는 역동적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
사도행전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디모데후서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者에게니라"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 혹 지쳐있습니까 ? 우울합니까 ?
무엇이 여러분을 그렇게 힘들게 했습니까 ?
1> 혹시 눈앞의 현실을 너무 과대 해석한 것은 아닙니까 ?
2> 혹시 조급하고 충동적인 판단으로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닙니까 ?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인내하십시오.
3> 혹시 인격적 사귐을 포기하고
높은 담을 쳐 놓고 홀로 외로워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
예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친구를 인정하셨습니다.
요한복음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들과 딸로 인정하사
자신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본향의 성도들은 손을 내밀고 여러분의 손이 주머니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4> 혹시 가정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사명을 잃어버린 것 아닙니까 ?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지쳐 쓰러져 있는 광야의 싸리나무 밑으로
엘리야를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시원한 생수와 따뜻한 떡을 먹여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 이 시간 엘리야가 체험한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이 시간, 이번 한 주간 지쳐있는 여러분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늘의 새 힘 받아서 힘과 활력을 회복하는 한 주간 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당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내가 합심하여 기도하여, 큰 응답을 받읍시다.
인도 사람들에게 전해내려 오는 옛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고양이만 보면 너무나 무서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떠는 작은 쥐 한 마리를 어떤 마술사가 보았습니다.
그 쥐가 얼마나 불쌍해 보였든지 마술사는 그 쥐를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고양이가 또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나운 개가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마술사는 그 고양이를 개로 변신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개로 변한 고양이는 금방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번에는 호랑이가 무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모습도 불쌍히 여긴 마술사는 이번에도 그 개를 호랑이로 변신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
호랑이로 변신한 개는, 이제는 사냥꾼의 총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마술사가 이렇게 그 호랑이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너를 도와주어도 너의 두려움이 끝나지 않는구나 !
너는 별 수 없는 쥐로 구나. 다시 쥐로 돌아가라."
이 이야기는 많은 인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담대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움과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자들의 통계에 의하면 현대인의 열 명 중 한 명은
어떤 형태로든 자기연민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자기연민과 우울증은 대표적인 마음의 장애입니다.
육신이 아닌 마음이 병이 든 것입니다.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자기연민, 우울증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초라하고 비참한 존재라고 느낀다고 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가끔씩 슬픔과 좌절감이 마음에 밀려오면서
금방 마음이 침체되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쉽게 흥미와 의욕이 저하되고 무기력감에 빠진다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상실하고 삶의 의욕을 잃는다고 합니다.
의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자기연민, 우울증 증세에 시달리는 사람은
암에 걸릴 확률이 마음이 건강한 사람보다 2배 이상 높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은 몸의 면역체계 중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은 어떻습니다.
혹 자기 자신이 불쌍하거나 혹은 가끔씩 삶이 두렵고,
또 가끔씩 좌절감과 슬픔에 빠지곤 하지 않습니까 ?
윌리암 미첼 박사는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그의 책에서 '메뚜기的 사고방식에 빠진 자'로 혹평합니다.
왜 메뚜기로 비유했느냐 하면,
모세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을 정탐했던 12명 중 10명이 이렇게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3:32-33,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열 명의 정탐꾼은 자신들을 메뚜기와 같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여러분 ! 이 열 명의 정탐꾼에 대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듭니까 ?
첫째, 어찌하여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 !
둘째, 정말로 이해가 된다.
셋째, 어쩌면 그렇게 나와 똑 같으냐 !
성경에는 메뚜기的 사고방식에 빠진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믿음의 조상 사라가 그랬습니다.
"이 나이에 어찌 아들을 낳습니까 ?"
모세도 그랬습니다. "다른 이를 보내소서"
요나도 그러했습니다.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그러나, 여러분 !
이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생각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메뚜기的 사고방식에 빠진 사람이 오늘 본문에도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야는 탁월한 영성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자기연민과 우울증에 빠져있습니다.
그는 분명 갈멜산의 대적들과의 싸움에서는 이겼으나,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힘없이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넋두리합니다.
열왕기상19:4,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
왜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믿음의 사람들조차 자기연민, 우울증,
즉 메뚜기적 사고방식에 빠질까요 ?
첫째, 내 앞의 현실을 지나치게 크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불과 얼마 전, 바알 우상을 섬기는 850명과의 영적 대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엘리야를 왕후 이세벨이 협박합니다.
열왕기상19:2,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그런데 이 협박에 엘리야의 마음이 크게 흔들립니다.
열왕기상19:3,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또한 자기연민에 빠집니다.
열왕기상19:4,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그렇습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답지 않게, 자신 앞에 다가온 현실에 대해,
너무나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세벨의 협박을 지나치게 과대 해석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떱니다.
여러분 ! 정말로 지금 이세벨에게 엘리야를 죽일 마음과 힘이 있다면,
사람을 미리 보내, 준비시키는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
바로 병사를 보내서 엘리야를 잡겠지요.
여러분 !
지금 이세벨에게는 엘리야를 잡을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자신 앞의 현실을 지나치게 과대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은 자신의 걸음을 주님이 친히 주장하심을 믿으십니까 ?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삶 속에 함께 하심을 믿으십니까 ?
자 ! 그렇다면 호들갑을 버리십시오. 잠잠히 믿고 기다리십시오.
믿음의 조상 다윗을 기억해 봅시다.
다윗이 그 굉장한 골리앗을 넘지 못할 장벽으로 보았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골리앗을 있는 그대로 보았고, 자신 뒤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혹 지금 자기연민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
혹 우울하십니까 ? 혹 범사에 의욕이 없습니까 ?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여러분 앞에 펼쳐진 현실을 너무 확대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사람이나 환경을 크게 보지말고,
다윗처럼 주님을 크게 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둘째, 조급한 판단은 자칫 자기연민에 빠지게 합니다.
엘리야는 오늘 본문에서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기도중심으로 살아왔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충동적으로 행동합니다.
이세벨의 말 한마디(협박)에 기운을 잃고 도망합니다.
그렇습니다.
대개의 경우 마음이 성급한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돌발적인 행동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어떤 상황 속에서도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기를 부탁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교훈을 했습니다.
"조급하면 이스마엘을 얻고, 기다리면 이삭을 얻는다."
제가 한동안 자주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려고 마음먹으시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을 내게 주신다."
물론 우리들이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살피며 주님보다 앞서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말을 잘합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후회할 것입니다."
물론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결판나지 않습니다.
심지가 굳은 자를 축복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끝까지 설득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계획하신 복을 누릴 자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성도여러분 ! 혹, 지금 우울하십니까 ? 불안하십니까 ?
분명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훨씬 앞서 나가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시는 자리로 돌아가시기를 부탁합니다.
셋째, 인격적 사귐이 없으면 자기연민, 우울증에 빠집니다.
혹, 지금 우울하십니까 ?
아마도 여러분은 믿음의 성도들과 혹은 가족의 구성원들과 직장 동료들과
사귐이 부족한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엘리야의 최대의 단점은 사귐의 부족이었습니다.
열왕기상19:3에 보면, 사환도 자기에게서 멀리 있게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과의 사귐까지도 일방적으로 깨뜨리려 했습니다.
열왕기상19:4, "내 생명을 취하소서"
엘리야의 기질은 혼자만의 고독을 즐기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함께 교제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갑작스런 인생의 위기 상황에서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숙의하며,
합심하여 기도했더라면 그는 절대로 자기연민이나 우울증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홀로 광야로 나갑니다.
그리고는 "오직 나 홀로 남았구나"하며 자신을 학대합니다.
자조적인 독백과 볼멘소리로 푸념합니다.
여러분 ! 누가 엘리야에게 혼자 있으라고 했습니까 ?
뉴우튼이란 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리를 놓는 대신 담을 쌓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다섯 이상의 가족을 친구로 가진 사람은 반드시 성공적인 가정생활을 하며,
더구나 십 년 이상 지속되는 다른 가정과의 우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의 가정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영국 시인 요한 돈네는 "인간은 누구도 각각 떨어진 외딴 섬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대륙의 한 부분이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혹 지금 우울합니까 ? 자기연민에 빠져있습니까 ?
그 이유는 스스로 고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찾아 올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믿음의 친구들에게 손을 내어 미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넷째,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잃으면 자기연민에 빠집니다.
삶의 목적과 사명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쉽게 피곤을 느끼며,
목적을 상실할수록 인생의 허무함을 느낍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얼굴이 밝지 못합니다.
바람 빠진 고무풍선처럼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꿈적하지 않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민족을 살려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으로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려 호렙산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오히려 광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사명을 잃으니까, 사명을 뒤로하니까 로뎀 나무라고 하는
싸리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아 처량한 자기연민에 빠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사명감으로 사는 사람은 스스로 체념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 여러분은 어떤 목적과 사명감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
꿈과 비전이 뚜렷한 사람은 결코 자기연민에 빠질 틈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활력과 기상이 넘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맥없는 삶이 아니라,
힘차게 달려가는 역동적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
사도행전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디모데후서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者에게니라"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 혹 지쳐있습니까 ? 우울합니까 ?
무엇이 여러분을 그렇게 힘들게 했습니까 ?
1> 혹시 눈앞의 현실을 너무 과대 해석한 것은 아닙니까 ?
2> 혹시 조급하고 충동적인 판단으로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닙니까 ?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인내하십시오.
3> 혹시 인격적 사귐을 포기하고
높은 담을 쳐 놓고 홀로 외로워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
예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친구를 인정하셨습니다.
요한복음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들과 딸로 인정하사
자신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본향의 성도들은 손을 내밀고 여러분의 손이 주머니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4> 혹시 가정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사명을 잃어버린 것 아닙니까 ?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지쳐 쓰러져 있는 광야의 싸리나무 밑으로
엘리야를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시원한 생수와 따뜻한 떡을 먹여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 이 시간 엘리야가 체험한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이 시간, 이번 한 주간 지쳐있는 여러분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늘의 새 힘 받아서 힘과 활력을 회복하는 한 주간 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