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010년9월26일, 에베소서4:22-32(성도는 성화되어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이경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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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계신 지체들을 이렇게 축복합시다.
지난 한 주간, 당신의 신앙을 개혁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은혜를 받아,
우리 교회와 세계교회의 보배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을 하면,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무엇인지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 때문에",
"본인의 의도보다는, 평생 예수님을 믿은 부모님 강권에 의해" 등등
여러 가지 대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대답을 하는 말은
"천국에 가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옳은 말입니다.
올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천국 가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믿음의 심령의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까 ?
성도들은 보통 믿음생활을 너무 간단히 생각을 합니다.
예배참석을 열심히 하고, 각종 봉사에 열심히 참여하고,
헌금을 많이 내고, 기도를 많이 하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천국을 가기 위해 꼭 필요한 믿음 또는 심령의 상태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온전히 사로잡혀
생활전반에 적용됨으로 점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은 새 사람을 입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23-24절,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성도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해서 하나님 나라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구원의 서정'이라고 하는데,
'소명(벧전2:9), 중생(요3:1-8), 회개(고후7:10), 신앙(요3:16-18), 칭의(롬3:23-24),
수양(롬8:14-16), 성화(레11:45, 20:8, 26), 견인(시23:1-6), 영화(고후3:18)' 등의
아홉 가지의 단계가 있습니다.
2. 그 중에서 오늘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은 성화로써,
이는 거룩하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맨 처음 사람, 아담을 만들 당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창1:26-27).
이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성품,
또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하나님의 속성 중에는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가지고 있는 공유적 속성,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 비공유적 속성이 있습니다.
공유적 속성에는 '사랑(요일4:7-16), 거룩(레11:44,45, 20:26)' 등이 있고,
비공유적 속성에는 '영원(시90:2), 자존(출3:14), 전능(창35:11), 불변(야1:17),
무소부재(시139:9)'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으로 지으심을 받은 아담은 마귀의 유혹에 의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불순종한 결과 하나님의 형상이 크게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상태의 사람을 '하나님과의 원수의 상태'(롬5:10, 롬8:7),
'영혼이 죽은 상태'(엡2:1-8)로 말씀하고 있으며,
모든 인간은 그 때부터 하나님의 실존을 거부하며(시14:1),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사는 것이 편함을 느끼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의 편에서는 악인이 되고 죄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죄인을, 그대로 두면
영원한 고통에 처할 수밖에 없기에,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의 화목제물이 되게 하시기까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면서 까지(롬5:6-8).
죄인의 성품으로 가득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점점 변화하는 성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의 마음은 바로 '스스로 의인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란 무슨 말입니까 ?
그것은 자신의 양심의 기준에 의한 의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양심의 기준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극히 정상으로 인식되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죄로 인식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의 심령은 각종 추하고 더러운 죄로 물들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를 지은 자가 잘못했다고 회개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이 점점 거룩해지는 변화를 위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벧후3:9).
그런데 어떤 사람들(불신앙인 포함)은
성도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대단한 큰 문제로 여기고
시험에 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나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천사같이 좋은 사람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닌다고 모두가 좋은 믿음을 가진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믿음이 좋아질 가능성을 갖고 있는, 그러면서 때로는 서로에게 실망을 끼치며,
마음에 상처를 주는 영적으로 철없는 어린애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성화의 삶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본문22-24절에서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습은 불신 때의 생활방식을 의미하며,
옛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을 의미하므로,
이는 불신 때의 생활을 되풀이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없애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뿐 아니라 오랜 기간 신앙생활을 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면 매우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삶이 현실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업을 하는 성도들 중에
자기가 있는 그 곳에서 예배드리기를 사모하고 진리의 빛을 밝히려 하면,
직장에서는 외톨이가 되기 쉽고,
원활한 사업의 협력을 위해 필요한 인맥을 형성하기가
매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와 불신자 사이에는 '생각하거나 추구하는 관심'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대화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때 가장 넘어지기 쉬운 것이 바로 '적당'이란 단어와 타협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도 그런 자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또한 쉬운 예로 주일성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주간의 성도들의 삶은 너무도 힘들고 지친 가운데,
휴일을 맞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유로운 휴식도 취할 겨를이 없이 교회에 오면
각종 프로그램에 의해 다시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쁜 것이 사실이며,
그렇게 주일을 섬기다 돌아가는 시간이 되면
다시 파김치가 되어 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은 주일이면 각종의 취미 생활이나 여가활동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보며,
믿음이 약해 하나님의 말씀을 그다지 중요히 여기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던 시절이나,
신앙생활을 안 할 때의 향수에 젖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약 아니라고 하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갈라디아 4:8-9절에서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하느냐"며,
불신 때를 향해 향수에 젖는 성도들의 심령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삶보다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런 예가 확인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기록한 출애굽기에서
'광야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 생활의 향수에 젖는 모습을 통해',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는 은혜를 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기전,
출14:9-12절,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친데 미치니라
바로가 가까워 올 때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음으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홍해를 건넌 후 신 광야에서,
출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에서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럼에도 우리는 성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화, 하나님의 형상, 새 사람을 입기 위해 필요한 것들).
1) 마음의 분노와 성질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엡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엡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40년 간이나 200만 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갖은 고난을 당하며 가나안을 향해 왔던 모세,
그러나 그는 단 한 번의 분노한 마음을 표출함으로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신32:49-52, 민27:12-14).
더불어 우리가 이해해야 될 것은 모세가 분노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
그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분노한 마음을 절제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성도들에게 하나의 좋은 예로 사용될 뿐인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단 한번 분노와 단 한번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것이
그렇게도 엄격하게 다뤄져야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하나님의 법을 다 순종했다 하더라도
그 중에 하나라도 불순종하면 그는 '모두 범한 자'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줌으로
사소한 행동 자그마한 것까지도 주의를 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약2::10-12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2) 자신의 행동이 잘못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철저한 회개의 돌이키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죄악 된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생활의 터전이 여전히 마귀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세상에 있고,
그 심성에 여전히 죄악 된 심성이 자리하고 있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위험에 항상 놓여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해져 가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행동이 죄악된 행동인지를 깨달았을 때,
그 행동에 대해 철저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회개의 - 원어의 의미는 '새 행실로 돌아가다'로,
이는 머리로써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악 된 행동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전인격적인 생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는 잘못을 뉘우침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아픔이 있어야 하고,
완전히 돌이켜 같은 죄를 반복하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회개를 했다 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을 깨달은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죄를 짖지 않는 것도 쉽지 않는 일이고,
자신의 행동에 '죄의식이 없는 행동'이 여전히 남아 있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전히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것이며,
성령의 도움으로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을 때 점점 거룩(성화)해져 가는 것입니다.
3) 세상적인 성공이나 물질을 추구하는 마음,
무엇인가 하고 싶어하는 행동의 절제가 필요합니다.
세상적인 성공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
그것은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를 점령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서
복음에 근거한 빛 된 삶으로 선한 영향력을 통하여
영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에 부응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두가 최고의 위치에 오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상은 노벨상으로,
각각의 년도에 최고의 위치에 오른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하여 시상합니다.
수상자의 경쟁률은 60억대 일로, 60억 분의 일이라는 가능성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정작 우리가 이 세상에서 놓쳐서는 안 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에
소홀히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은 또 뭡니까 ?
이 물질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도 하고 불안하게도 합니다.
이 물질은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기도 합니다.
이 물질은 최고의 질 놓은 삶을 보장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이 물질을 모으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렇지만 정작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에는
소홀히 하게 하는데 한몫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 매우 중요합니다. 물질을 모으는 것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또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6:7-9)
솔로몬은 말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30:7-9)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13:5)
가룟 유다도 물질에 넘어갔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물질에 넘어갔고,
수많은 성도들이 물질에 넘어갔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5.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옛날 한국의 반상계급은, 양반은 특별한 사회적 지위와 권세를 누리며 살게 했고,
상놈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게 했습니다.
상놈들은 족보도, 이름도 없었기에 그저 "개똥아 말똥아"하며 불렀고,
길 가다가 나이 어린 양반을 만나도 '허리를 굽신거리며'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나이 어린 양반에게 존댓말을 써야 했습니다.
양반은 소나기가 와도 모시적삼에 두루마기를 입은 채 옷이 다 젖어도
팔자걸음을 걸어가곤 했으며, 상놈들은 그냥 냅다 뛰어가곤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게 평생의 한이었던 부자 상놈이
양반이 되고 싶어서
자기에게 빚을 지고 갚지 못하는 가난뱅이 양반에게 평생을 먹고살고도 남을 만큼의
재산을 주고, '잃어버린 친족'이라는 이유를 만들어
양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고 양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더운 여름날 상놈들과 함께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자 다른 상놈들은 모두 자기 집으로 달려가는데,
새롭게 양반이 된 그는 전과 같이 달려가지 못하고
서툰 팔자걸음에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이 다 젖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하며 뛰어감으로
본래 상놈의 기질을 숨길 수 가 없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반면에 주후 300년부터 390년까지 90세를 살았던
이집트 출신의 수도사 '마카리우스'는
우리와 똑같은 '죄의 성품'을 가진 자였지만,
어릴 때 친구들과 함께 남의 무화과를 훔쳐먹은 것을 일생동안 통회할 정도로
청결하고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였으며,
젊은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수도사로써 고행의 삶을 살던 초기에
'부정임신을 한 처녀의 아이를 갖게 한 상대가 자신'이라는 거짓말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육체적인 고통을 당 할 때, 변명 없이 침묵하였으며,
고통을 당하게 한 처녀를 돕기까지 하는 등의 사랑의 성품을 행하였으며,
다시 그 처녀가 '마카리우스'가 아이 아버지가 아니라고 밝힘으로,
그를 괴롭혔던 마을 사람들이 용서를 구하자 명예회복을 거부하고
동굴에서 은거생활을 할 정도로 겸손과 거룩한 성품을 잃지 않은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의 고통에 내어주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아담 이후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성도들의 영원한 천국의 삶을 보장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마음의 분노와 성질을 잘 관리하고
자기가 한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죄악된 생활에서 돌이키며,
세상적인 성공이나 물질을 추구하는 마음, 행동의 절제를 함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한 주간, 당신의 신앙을 개혁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은혜를 받아,
우리 교회와 세계교회의 보배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을 하면,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무엇인지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 때문에",
"본인의 의도보다는, 평생 예수님을 믿은 부모님 강권에 의해" 등등
여러 가지 대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대답을 하는 말은
"천국에 가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옳은 말입니다.
올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천국 가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믿음의 심령의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까 ?
성도들은 보통 믿음생활을 너무 간단히 생각을 합니다.
예배참석을 열심히 하고, 각종 봉사에 열심히 참여하고,
헌금을 많이 내고, 기도를 많이 하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천국을 가기 위해 꼭 필요한 믿음 또는 심령의 상태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온전히 사로잡혀
생활전반에 적용됨으로 점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은 새 사람을 입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23-24절,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성도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해서 하나님 나라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구원의 서정'이라고 하는데,
'소명(벧전2:9), 중생(요3:1-8), 회개(고후7:10), 신앙(요3:16-18), 칭의(롬3:23-24),
수양(롬8:14-16), 성화(레11:45, 20:8, 26), 견인(시23:1-6), 영화(고후3:18)' 등의
아홉 가지의 단계가 있습니다.
2. 그 중에서 오늘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은 성화로써,
이는 거룩하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맨 처음 사람, 아담을 만들 당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창1:26-27).
이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성품,
또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하나님의 속성 중에는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가지고 있는 공유적 속성,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 비공유적 속성이 있습니다.
공유적 속성에는 '사랑(요일4:7-16), 거룩(레11:44,45, 20:26)' 등이 있고,
비공유적 속성에는 '영원(시90:2), 자존(출3:14), 전능(창35:11), 불변(야1:17),
무소부재(시139:9)'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으로 지으심을 받은 아담은 마귀의 유혹에 의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불순종한 결과 하나님의 형상이 크게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상태의 사람을 '하나님과의 원수의 상태'(롬5:10, 롬8:7),
'영혼이 죽은 상태'(엡2:1-8)로 말씀하고 있으며,
모든 인간은 그 때부터 하나님의 실존을 거부하며(시14:1),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사는 것이 편함을 느끼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의 편에서는 악인이 되고 죄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죄인을, 그대로 두면
영원한 고통에 처할 수밖에 없기에,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의 화목제물이 되게 하시기까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면서 까지(롬5:6-8).
죄인의 성품으로 가득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점점 변화하는 성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의 마음은 바로 '스스로 의인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란 무슨 말입니까 ?
그것은 자신의 양심의 기준에 의한 의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양심의 기준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극히 정상으로 인식되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죄로 인식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의 심령은 각종 추하고 더러운 죄로 물들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를 지은 자가 잘못했다고 회개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이 점점 거룩해지는 변화를 위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벧후3:9).
그런데 어떤 사람들(불신앙인 포함)은
성도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대단한 큰 문제로 여기고
시험에 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나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천사같이 좋은 사람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닌다고 모두가 좋은 믿음을 가진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믿음이 좋아질 가능성을 갖고 있는, 그러면서 때로는 서로에게 실망을 끼치며,
마음에 상처를 주는 영적으로 철없는 어린애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성화의 삶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본문22-24절에서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습은 불신 때의 생활방식을 의미하며,
옛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을 의미하므로,
이는 불신 때의 생활을 되풀이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없애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뿐 아니라 오랜 기간 신앙생활을 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면 매우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삶이 현실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업을 하는 성도들 중에
자기가 있는 그 곳에서 예배드리기를 사모하고 진리의 빛을 밝히려 하면,
직장에서는 외톨이가 되기 쉽고,
원활한 사업의 협력을 위해 필요한 인맥을 형성하기가
매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와 불신자 사이에는 '생각하거나 추구하는 관심'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대화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때 가장 넘어지기 쉬운 것이 바로 '적당'이란 단어와 타협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도 그런 자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또한 쉬운 예로 주일성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주간의 성도들의 삶은 너무도 힘들고 지친 가운데,
휴일을 맞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유로운 휴식도 취할 겨를이 없이 교회에 오면
각종 프로그램에 의해 다시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쁜 것이 사실이며,
그렇게 주일을 섬기다 돌아가는 시간이 되면
다시 파김치가 되어 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은 주일이면 각종의 취미 생활이나 여가활동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보며,
믿음이 약해 하나님의 말씀을 그다지 중요히 여기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던 시절이나,
신앙생활을 안 할 때의 향수에 젖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약 아니라고 하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갈라디아 4:8-9절에서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하느냐"며,
불신 때를 향해 향수에 젖는 성도들의 심령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삶보다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런 예가 확인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기록한 출애굽기에서
'광야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 생활의 향수에 젖는 모습을 통해',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는 은혜를 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기전,
출14:9-12절,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친데 미치니라
바로가 가까워 올 때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음으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홍해를 건넌 후 신 광야에서,
출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에서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럼에도 우리는 성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화, 하나님의 형상, 새 사람을 입기 위해 필요한 것들).
1) 마음의 분노와 성질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엡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엡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40년 간이나 200만 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갖은 고난을 당하며 가나안을 향해 왔던 모세,
그러나 그는 단 한 번의 분노한 마음을 표출함으로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신32:49-52, 민27:12-14).
더불어 우리가 이해해야 될 것은 모세가 분노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
그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분노한 마음을 절제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성도들에게 하나의 좋은 예로 사용될 뿐인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단 한번 분노와 단 한번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것이
그렇게도 엄격하게 다뤄져야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하나님의 법을 다 순종했다 하더라도
그 중에 하나라도 불순종하면 그는 '모두 범한 자'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줌으로
사소한 행동 자그마한 것까지도 주의를 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약2::10-12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2) 자신의 행동이 잘못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철저한 회개의 돌이키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죄악 된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생활의 터전이 여전히 마귀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세상에 있고,
그 심성에 여전히 죄악 된 심성이 자리하고 있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위험에 항상 놓여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해져 가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행동이 죄악된 행동인지를 깨달았을 때,
그 행동에 대해 철저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회개의 - 원어의 의미는 '새 행실로 돌아가다'로,
이는 머리로써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악 된 행동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전인격적인 생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는 잘못을 뉘우침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아픔이 있어야 하고,
완전히 돌이켜 같은 죄를 반복하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회개를 했다 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을 깨달은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죄를 짖지 않는 것도 쉽지 않는 일이고,
자신의 행동에 '죄의식이 없는 행동'이 여전히 남아 있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전히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것이며,
성령의 도움으로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을 때 점점 거룩(성화)해져 가는 것입니다.
3) 세상적인 성공이나 물질을 추구하는 마음,
무엇인가 하고 싶어하는 행동의 절제가 필요합니다.
세상적인 성공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
그것은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를 점령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서
복음에 근거한 빛 된 삶으로 선한 영향력을 통하여
영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에 부응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두가 최고의 위치에 오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상은 노벨상으로,
각각의 년도에 최고의 위치에 오른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하여 시상합니다.
수상자의 경쟁률은 60억대 일로, 60억 분의 일이라는 가능성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정작 우리가 이 세상에서 놓쳐서는 안 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에
소홀히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은 또 뭡니까 ?
이 물질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도 하고 불안하게도 합니다.
이 물질은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기도 합니다.
이 물질은 최고의 질 놓은 삶을 보장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이 물질을 모으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렇지만 정작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에는
소홀히 하게 하는데 한몫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 매우 중요합니다. 물질을 모으는 것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또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6:7-9)
솔로몬은 말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30:7-9)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13:5)
가룟 유다도 물질에 넘어갔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물질에 넘어갔고,
수많은 성도들이 물질에 넘어갔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5.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옛날 한국의 반상계급은, 양반은 특별한 사회적 지위와 권세를 누리며 살게 했고,
상놈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게 했습니다.
상놈들은 족보도, 이름도 없었기에 그저 "개똥아 말똥아"하며 불렀고,
길 가다가 나이 어린 양반을 만나도 '허리를 굽신거리며'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나이 어린 양반에게 존댓말을 써야 했습니다.
양반은 소나기가 와도 모시적삼에 두루마기를 입은 채 옷이 다 젖어도
팔자걸음을 걸어가곤 했으며, 상놈들은 그냥 냅다 뛰어가곤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게 평생의 한이었던 부자 상놈이
양반이 되고 싶어서
자기에게 빚을 지고 갚지 못하는 가난뱅이 양반에게 평생을 먹고살고도 남을 만큼의
재산을 주고, '잃어버린 친족'이라는 이유를 만들어
양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고 양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더운 여름날 상놈들과 함께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자 다른 상놈들은 모두 자기 집으로 달려가는데,
새롭게 양반이 된 그는 전과 같이 달려가지 못하고
서툰 팔자걸음에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이 다 젖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하며 뛰어감으로
본래 상놈의 기질을 숨길 수 가 없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반면에 주후 300년부터 390년까지 90세를 살았던
이집트 출신의 수도사 '마카리우스'는
우리와 똑같은 '죄의 성품'을 가진 자였지만,
어릴 때 친구들과 함께 남의 무화과를 훔쳐먹은 것을 일생동안 통회할 정도로
청결하고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였으며,
젊은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수도사로써 고행의 삶을 살던 초기에
'부정임신을 한 처녀의 아이를 갖게 한 상대가 자신'이라는 거짓말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육체적인 고통을 당 할 때, 변명 없이 침묵하였으며,
고통을 당하게 한 처녀를 돕기까지 하는 등의 사랑의 성품을 행하였으며,
다시 그 처녀가 '마카리우스'가 아이 아버지가 아니라고 밝힘으로,
그를 괴롭혔던 마을 사람들이 용서를 구하자 명예회복을 거부하고
동굴에서 은거생활을 할 정도로 겸손과 거룩한 성품을 잃지 않은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의 고통에 내어주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아담 이후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성도들의 영원한 천국의 삶을 보장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마음의 분노와 성질을 잘 관리하고
자기가 한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죄악된 생활에서 돌이키며,
세상적인 성공이나 물질을 추구하는 마음, 행동의 절제를 함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