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010년12월12일, 사도행전3:1-10(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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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옆에 계신 복스러운 지체들을 축복합시다.
당신을 통해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이, 천국을 얻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번 12월과 내년에는, 하늘과 땅의 복을 가득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사도행전은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또 부흥되고 성장했으며,
복음이 어떻게 온 세계로 퍼졌는가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가 형성된 후, 처음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살펴보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교회에 속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때에 있었던, 가장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한낮의 햇살을 받으며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을 향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려면 이방인의 뜰을 거쳐 동쪽의 가장 큰 문을 지나야 하는데,
그 문에는 미문(美門, 아름다운 문)이란 별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에 도착할 즈음에, 발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한 앉은뱅이를
사람들이 메고 와 美門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곧 바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바로 앞까지 갔을 때,
그는 다른 이에게 한 것처럼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앉은뱅이는 이 사람들에게도 허탕이구나 실망할 그 순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두 사람에게서 강한 시선(視線)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곧장, 그들로부터 이런 말이 앉은뱅이에게 들려왔습니다.
본문4절, "우리를 보라"(わたしたちを見なさい.)
사실 이 앉은뱅이는 이제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의 손만 보았을 뿐,
눈을 본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라'(見なさい)고 합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혹 무엇을 얻을까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바라 본 그들의 눈은 참으로 뜻했고,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다시 이 앉은뱅이에게 그들로부터, 작지만 놀라운 말이 들려옵니다.
본문6절,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리고 그들 곧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에게 손을 내밉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 앉은뱅이에게, 일어나라는 말이나 걸으라는 말은
이해는 하는 말이었지만, 이미 죽어버린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진실했고 무엇보다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 손을 내밀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그 손은 따뜻했고 힘이 있었습니다.
순간 놀라운 힘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발목이 뜨거워지면서 발에 피가 도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맡겨진 손을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서 보았습니다.
걸어 보았습니다. 걸어졌습니다.
뛰어 보았습니다. 뛰어졌습니다.
이것이 오늘 앉은뱅이와 두 제자 사이에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선 교회의 본질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우선 고침 받기 전의 앉은뱅이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사람에게 이런 불행이 찾아오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가운데도,
타고 난 핸디캡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핸드캡은 육체적인 것도 있고 정신적인 것도 있습니다.
과거의 정신의학은, 어릴 적 성장기 때의 여러 가지 아픈 경험들이,
핸디캡을 가지게되는 결정적 영향을 준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정신의학은, 날 때부터 갖게 된,
즉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핸디캡이 더 크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쪽이 옳든 간에,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핸디캡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또한 괴로워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왜 자꾸 허무함에 빠지곤 할까 ?'
'나는 왜 이토록 외로움을 잘 탈까 ?'
'나는 왜 이토록 의지가 약하고, 쉽게 욕망에 사로잡히고 말까 ?'
'나는 왜 이러한 모습으로 태어났을까 ?' 등입니다.
왜 이런 문제가 우리 안에 찾아왔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혹 원죄(原罪)의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는 바로 그런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혹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핸디캡이 있지 않습니까 ?
둘째, 또한 그는 '다른 사람에 떠메어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많은 현대인들은 똑똑하고 현명하고 자기 정체성이 뚜렷한 것 같지만,
사실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의 인생의 목표가 놀랍게도 '남들처럼'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삶의 목표를 물으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남보란 듯이 살려고 이렇게 고생합니다 !"
그러나 이러한 삶은, 자유롭게 사는 것 같으나 자유롭지 못하고,
내가 살고 있으나 내가 없고,
열심히는 사는 것 같으나 허무하며,
내 스스로 살고 있지만, 마치 누군가에 떠밀려 사는 것 같은 삶입니다.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는 바로 그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혹 우리들도 '다른 사람에 떠메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닙니까 ?
셋째, 또한 그는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만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미문(美門)은 성전을 향하는 중요한 문이었습니다.
비상구나 쪽문이 아니라 主 출입구였습니다.
더구나 이 문은 그 美門이라는 별명답게 아주 아름답고 예쁜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문 앞에서, 초라한 거지 행색의 앉은뱅이가 구걸을 합니다.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
더구나 여러분 !
아무리 문이 아름다워도 門은 門일 뿐입니다.
門이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그 문을 통해 목적지로 가는 것입니다.
이 미문 역시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최종 목적지는 그 문(美門)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본문의 앉은뱅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성전에 들어가는 문 앞에 있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그렇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핸디캡을 가진 이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떠메어, 다른 사람을 의지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토록 다른 사람을 의지만 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무리 아름다운 문 곁에 있을지라도,
더 큰 아름다움이 있는 문안까지 결코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행복을 위해 밤낮 없이 뛰지만 결코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사랑을 위해 산다고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결코 나누지 못합니다.
어떤 신앙인들은 익숙한 교회생활로 아름다운 성전 문을 수없이 드나들긴 하지만,
좀처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이루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
그러나, 더욱 더 우리의 존재를 슬프게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해,
다른 사람에 의해 메어 움직이고,
결국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이 사람이
그토록 구하려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
그렇습니다. 한 푼이었습니다. 한 푼의 돈이었습니다.
자기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를, 결코 해결해 주지 못하는 그 한 푼 !
자신의 인생을 전혀 변화시킬 수 없는 그 한 푼 !
결코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그 한 푼을 그는 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걸고 얻으려는 것이 큰 성공이고, 큰 명예고, 큰 물질인지 몰라도
그것은 오늘 이 앉은뱅이가 구했던 '한 푼'일지도 모릅니다.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고 능력과 열정을 다 쏟아 얻으려고 하는 그 숱한 노력들이,
어쩌면 '앉은뱅이의 구걸'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구하는 그것이 내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또한 그것이 우리를 가장 중요한 하나님 처소로 데려다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 푼을 구하며 인생을 소모하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혹 우리들의 삶이 혹 한 푼을 구걸하는 인생이 아닙니까 ?
이러한 삶을 사는 앉은뱅이에게 오늘 베드로와 요한은 외칩니다.
본문6절,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그에게,
남에게 떠메어 움직이던 그에게,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만 있던 그에게,
더구나 의미 없는 한 푼만을 구하던 그에게, 전혀 다른 새 것을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앉은뱅이는 그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받아들였습니다.
더구나 이제까지의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가졌을 때,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면서부터 가졌던 문제,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함 받았습니다.
남에게 떠메어 움직이던 그가 자기 발로 걷고 뛰게 되었습니다.
문 곁에만 앉아 있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 발로 하나님 성전, 그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런 놀라운 변화가, 우선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를 통해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또한 우리는 오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우리가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 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될 대상은 앉은뱅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즉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베드로와 요한의 행적을 더듬어 보면
그들은 참 철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급하고 충동적이며 감정적이었습니다.
도무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
그렇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첫 열매는 바로 사랑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변화되기 전, 그들에게 앉은뱅이는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가진 그들에게 앉은뱅이는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전부터 앉은뱅이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진심으로 만난 까닭입니다.
성도여러분 !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면, 예수님의 눈이 머무는 곳에 우리 눈이 머물고,
예수님 발이 머무는 곳에 우리 발이 머뭅니다.
여러분 !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앉은뱅이가 보이십니까 ?
우리의 사랑과 섬김이 필요한 지체가 보이십니까 ?
그런 사람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닐 것이고,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심장(心臟)을 가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둘째, 우리는 세상을 향해 '우리를 보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우리들은, 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본향의 성도들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환한 빛을 내면서
결코 요동하지 않는 방향이 되고,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본래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했었고, 또 잘못된 욕망을 좇았었습니다.
그들 역시 제 힘으로는 아무 것도 못했던 앉은뱅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를 보라 !'고 담대히 말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그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외칩니다.
"약했었지만 강해진,
앉은뱅이였지만 굳게 선,
졸장부였지만 대장부가 된,
육에 속했었지만 이제는 영에 속한, 우리를 보라."
더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단순히 보라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 역시 앉은뱅이를 깊이 주목했습니다.
주목하다는 원문 헬라어는 '아테니사스'입니다.
그 뜻은 '진지하고 강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바라보았다'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바라보라고만 외치지 말고,
계속해서 '아테니사스' 즉,
진지하고 강렬하게 사랑을 가지고 묵묵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연약한 자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주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진정한 교회이자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본향교회와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교회는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합니다.
본문6절,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가 가진 물질이나 지식 또는 신분이,
상처받고 앉아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은 다릅니다.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베드로는 어쩌면, 앉은뱅이에게 자기의 과거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내 과거를 아십니까 ?
나의 실패와 좌절과 절망을 아시냐 말입니다.
나의 고독과 외로움을 아십니까 ?
나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끝나버린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을 변화시킨 그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어떤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라 할지라도,
남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미문 앞의 초라한 인생일지라도 말입니다."
"당신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내 삶을 변화시킨 그 분이 바로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실 분입니다.
그 분을 나는 당신에게 증거합니다.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의 인생을 참으로 변화시키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 아무리 심한 상처와 고통을 가진 사람도, 예수님은 변화시켜 주십니다.
우리 본향교회는
바로 그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가지고,
그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앉은뱅이와 같은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이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그 예수의 이름을 전해야합니다.
교회가 할 일이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하고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그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일에 선봉장이 되십시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이 땅 일본에 가득 차게 합시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걸식성단'을 만들어 교황청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교황을 찾아갔습니다.
걸식성단이란 가진 것 없이 그저 얻어먹으면서 전도하고 다니는 전도단체입니다.
지금도 어느 선교단체에서는 이것을 본받아 '거지전도'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 프란시스를 만난 교황은 그가 하는 일이 너무 우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많은 보화가 가득한 창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것을 다 보여준 후에 성 프란시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말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소. !"
그러자 잠시 후 프란시스가 조용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칠 능력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 교회와 우리들만큼은, 비록 은과 금을 가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예수의 이름만은 영원히 간직합시다.
그래서 바로 그 이름으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찬미하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가 간직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전합시다.
우리 본향교회에 제2의 베드로, 요한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또한 그들을 통해 영적, 육적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이
우리 본향교회에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당신을 통해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이, 천국을 얻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번 12월과 내년에는, 하늘과 땅의 복을 가득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사도행전은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또 부흥되고 성장했으며,
복음이 어떻게 온 세계로 퍼졌는가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가 형성된 후, 처음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살펴보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교회에 속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때에 있었던, 가장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한낮의 햇살을 받으며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을 향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려면 이방인의 뜰을 거쳐 동쪽의 가장 큰 문을 지나야 하는데,
그 문에는 미문(美門, 아름다운 문)이란 별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에 도착할 즈음에, 발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한 앉은뱅이를
사람들이 메고 와 美門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곧 바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바로 앞까지 갔을 때,
그는 다른 이에게 한 것처럼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앉은뱅이는 이 사람들에게도 허탕이구나 실망할 그 순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두 사람에게서 강한 시선(視線)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곧장, 그들로부터 이런 말이 앉은뱅이에게 들려왔습니다.
본문4절, "우리를 보라"(わたしたちを見なさい.)
사실 이 앉은뱅이는 이제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의 손만 보았을 뿐,
눈을 본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라'(見なさい)고 합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혹 무엇을 얻을까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바라 본 그들의 눈은 참으로 뜻했고,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다시 이 앉은뱅이에게 그들로부터, 작지만 놀라운 말이 들려옵니다.
본문6절,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리고 그들 곧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에게 손을 내밉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 앉은뱅이에게, 일어나라는 말이나 걸으라는 말은
이해는 하는 말이었지만, 이미 죽어버린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진실했고 무엇보다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 손을 내밀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그 손은 따뜻했고 힘이 있었습니다.
순간 놀라운 힘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발목이 뜨거워지면서 발에 피가 도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맡겨진 손을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서 보았습니다.
걸어 보았습니다. 걸어졌습니다.
뛰어 보았습니다. 뛰어졌습니다.
이것이 오늘 앉은뱅이와 두 제자 사이에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선 교회의 본질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우선 고침 받기 전의 앉은뱅이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사람에게 이런 불행이 찾아오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가운데도,
타고 난 핸디캡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핸드캡은 육체적인 것도 있고 정신적인 것도 있습니다.
과거의 정신의학은, 어릴 적 성장기 때의 여러 가지 아픈 경험들이,
핸디캡을 가지게되는 결정적 영향을 준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정신의학은, 날 때부터 갖게 된,
즉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핸디캡이 더 크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쪽이 옳든 간에,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핸디캡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또한 괴로워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왜 자꾸 허무함에 빠지곤 할까 ?'
'나는 왜 이토록 외로움을 잘 탈까 ?'
'나는 왜 이토록 의지가 약하고, 쉽게 욕망에 사로잡히고 말까 ?'
'나는 왜 이러한 모습으로 태어났을까 ?' 등입니다.
왜 이런 문제가 우리 안에 찾아왔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혹 원죄(原罪)의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는 바로 그런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혹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핸디캡이 있지 않습니까 ?
둘째, 또한 그는 '다른 사람에 떠메어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많은 현대인들은 똑똑하고 현명하고 자기 정체성이 뚜렷한 것 같지만,
사실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의 인생의 목표가 놀랍게도 '남들처럼'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삶의 목표를 물으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남보란 듯이 살려고 이렇게 고생합니다 !"
그러나 이러한 삶은, 자유롭게 사는 것 같으나 자유롭지 못하고,
내가 살고 있으나 내가 없고,
열심히는 사는 것 같으나 허무하며,
내 스스로 살고 있지만, 마치 누군가에 떠밀려 사는 것 같은 삶입니다.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는 바로 그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혹 우리들도 '다른 사람에 떠메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닙니까 ?
셋째, 또한 그는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만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미문(美門)은 성전을 향하는 중요한 문이었습니다.
비상구나 쪽문이 아니라 主 출입구였습니다.
더구나 이 문은 그 美門이라는 별명답게 아주 아름답고 예쁜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문 앞에서, 초라한 거지 행색의 앉은뱅이가 구걸을 합니다.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
더구나 여러분 !
아무리 문이 아름다워도 門은 門일 뿐입니다.
門이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그 문을 통해 목적지로 가는 것입니다.
이 미문 역시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최종 목적지는 그 문(美門)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본문의 앉은뱅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성전에 들어가는 문 앞에 있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그렇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핸디캡을 가진 이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떠메어, 다른 사람을 의지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토록 다른 사람을 의지만 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무리 아름다운 문 곁에 있을지라도,
더 큰 아름다움이 있는 문안까지 결코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행복을 위해 밤낮 없이 뛰지만 결코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사랑을 위해 산다고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결코 나누지 못합니다.
어떤 신앙인들은 익숙한 교회생활로 아름다운 성전 문을 수없이 드나들긴 하지만,
좀처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이루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
그러나, 더욱 더 우리의 존재를 슬프게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해,
다른 사람에 의해 메어 움직이고,
결국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이 사람이
그토록 구하려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
그렇습니다. 한 푼이었습니다. 한 푼의 돈이었습니다.
자기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를, 결코 해결해 주지 못하는 그 한 푼 !
자신의 인생을 전혀 변화시킬 수 없는 그 한 푼 !
결코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그 한 푼을 그는 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걸고 얻으려는 것이 큰 성공이고, 큰 명예고, 큰 물질인지 몰라도
그것은 오늘 이 앉은뱅이가 구했던 '한 푼'일지도 모릅니다.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고 능력과 열정을 다 쏟아 얻으려고 하는 그 숱한 노력들이,
어쩌면 '앉은뱅이의 구걸'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구하는 그것이 내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또한 그것이 우리를 가장 중요한 하나님 처소로 데려다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 푼을 구하며 인생을 소모하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혹 우리들의 삶이 혹 한 푼을 구걸하는 인생이 아닙니까 ?
이러한 삶을 사는 앉은뱅이에게 오늘 베드로와 요한은 외칩니다.
본문6절,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그에게,
남에게 떠메어 움직이던 그에게,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만 있던 그에게,
더구나 의미 없는 한 푼만을 구하던 그에게, 전혀 다른 새 것을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앉은뱅이는 그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받아들였습니다.
더구나 이제까지의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가졌을 때,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면서부터 가졌던 문제,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함 받았습니다.
남에게 떠메어 움직이던 그가 자기 발로 걷고 뛰게 되었습니다.
문 곁에만 앉아 있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 발로 하나님 성전, 그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런 놀라운 변화가, 우선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를 통해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또한 우리는 오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우리가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 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될 대상은 앉은뱅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즉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베드로와 요한의 행적을 더듬어 보면
그들은 참 철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급하고 충동적이며 감정적이었습니다.
도무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
그렇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첫 열매는 바로 사랑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변화되기 전, 그들에게 앉은뱅이는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가진 그들에게 앉은뱅이는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전부터 앉은뱅이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진심으로 만난 까닭입니다.
성도여러분 !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면, 예수님의 눈이 머무는 곳에 우리 눈이 머물고,
예수님 발이 머무는 곳에 우리 발이 머뭅니다.
여러분 !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앉은뱅이가 보이십니까 ?
우리의 사랑과 섬김이 필요한 지체가 보이십니까 ?
그런 사람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닐 것이고,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심장(心臟)을 가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둘째, 우리는 세상을 향해 '우리를 보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우리들은, 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본향의 성도들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환한 빛을 내면서
결코 요동하지 않는 방향이 되고,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본래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했었고, 또 잘못된 욕망을 좇았었습니다.
그들 역시 제 힘으로는 아무 것도 못했던 앉은뱅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를 보라 !'고 담대히 말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그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외칩니다.
"약했었지만 강해진,
앉은뱅이였지만 굳게 선,
졸장부였지만 대장부가 된,
육에 속했었지만 이제는 영에 속한, 우리를 보라."
더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단순히 보라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 역시 앉은뱅이를 깊이 주목했습니다.
주목하다는 원문 헬라어는 '아테니사스'입니다.
그 뜻은 '진지하고 강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바라보았다'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바라보라고만 외치지 말고,
계속해서 '아테니사스' 즉,
진지하고 강렬하게 사랑을 가지고 묵묵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연약한 자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주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진정한 교회이자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본향교회와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교회는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합니다.
본문6절,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가 가진 물질이나 지식 또는 신분이,
상처받고 앉아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은 다릅니다.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베드로는 어쩌면, 앉은뱅이에게 자기의 과거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내 과거를 아십니까 ?
나의 실패와 좌절과 절망을 아시냐 말입니다.
나의 고독과 외로움을 아십니까 ?
나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끝나버린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을 변화시킨 그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어떤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라 할지라도,
남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미문 앞의 초라한 인생일지라도 말입니다."
"당신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내 삶을 변화시킨 그 분이 바로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실 분입니다.
그 분을 나는 당신에게 증거합니다.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의 인생을 참으로 변화시키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 아무리 심한 상처와 고통을 가진 사람도, 예수님은 변화시켜 주십니다.
우리 본향교회는
바로 그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가지고,
그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앉은뱅이와 같은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이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그 예수의 이름을 전해야합니다.
교회가 할 일이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하고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그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일에 선봉장이 되십시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이 땅 일본에 가득 차게 합시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걸식성단'을 만들어 교황청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교황을 찾아갔습니다.
걸식성단이란 가진 것 없이 그저 얻어먹으면서 전도하고 다니는 전도단체입니다.
지금도 어느 선교단체에서는 이것을 본받아 '거지전도'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 프란시스를 만난 교황은 그가 하는 일이 너무 우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많은 보화가 가득한 창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것을 다 보여준 후에 성 프란시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말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소. !"
그러자 잠시 후 프란시스가 조용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칠 능력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 교회와 우리들만큼은, 비록 은과 금을 가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예수의 이름만은 영원히 간직합시다.
그래서 바로 그 이름으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찬미하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가 간직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전합시다.
우리 본향교회에 제2의 베드로, 요한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또한 그들을 통해 영적, 육적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이
우리 본향교회에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