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012년5월13일, 로마서16:1-2, 13(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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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옆에 계신 지체들과 함께 이렇게 고백해 봅시다.
우리도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 의심하지 않는 마음, 작은 일에도 만족하는 마음을 가져,
천국의 샘플이 되는 성도가 됩시다.
어린아이나 연약한 형제를 섬기는 것은,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예수님을 섬겨 봅시다.
1903년,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웹스터라는 마을에
자비스(Jarvis)라는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린아이들을 무척 좋아해서,
마을의 어린이들을 자기의 친자식처럼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웹스터 마을의 어린이들에게는 어머니가 둘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특히 그녀는 그 마을의 웹스터 교회에서 26년 간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했는데,
항상 "어머니 아버지를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비스가 병에 걸렸는데, 많은 어린이들과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그녀의 가르침을 항상 가슴에 새겼던 여러 제자들이,
자비스 부인의 '어린이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 추도식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추도식 날,
미국 곳곳에 흩어져 살던 자비스 부인의 제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비스 부인의 딸 안나는
생전 어머니의 '어린이 사랑'을 회고한 후, 카네이션 꽃을 고인의 단에 드렸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비스 부인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고,
결국 그 날을 '어머니의 사랑을 기리는 날'로 정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자비스의 제자들은, 어머니 날 운동을 미국 전역에 전했고,
이 뜻을 귀하게 여긴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가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비스의 죽음으로부터 11년 뒤인 1914년,
미국 국회는 매년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정하여 기념일로 지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흐른 후,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역할 또한 중요함이 강조되면서,
그 명칭이 어버이 주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도 1930년부터 어머니 주일을 지키기 시작했고,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은 매년5월8일을 '어머니 날'로 공포했으며,
1974년 한국 정부는 '어머니 날'을 '어버이 날'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항상 효(孝)를 귀중히 여기는 우리들이지만,
이번 한 주간 더욱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 ! 모두 함께 오늘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본문13절, "主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오늘 본문인 로마서16장에는, 위대한 복음 전도자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동역자들을 소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여기에서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로 소개합니다.
도대체 바울에게 있어서 루포의 어머니는 과연 어떤 분이었기에,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의 어머니로 소개할까요 ?
자 ! 우선 루포는 누구일까요 ?
마가복음15장에 그 답이 있습니다.
마가복음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시몬이 시골에서 와서
지나가는 로마 군병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라 하는 해골의 곳에 이르니라"
그렇습니다. 바울이 내 어머니라고 말한 루포의 어머니는,
다름 아닌 예수님을 대신해 십자가를 졌던 그 구레네 시몬의 아내였습니다.
한편, 구레네 시몬의 두 아들인 알렉산더와 루포는
로마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큰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마가를 통해 마가복음을 기록할 때,
로마 성도들이 잘 알고 있었던 알렉산더와 루포의 이름을 말한 것입니다.
실제로 마가복음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이 루포의 어머니와 만나게 되었을까요 ?
우선, 루포의 가족은 본래 구레네에 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이 루포의 아버지를,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의 중요한 도시로서,
오늘날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로부터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고원지대입니다.
예수님 당시,
구레네에는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에 구레네 출신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 보더라도,
구레네 출신 유대인들은 세력도 컸고 힘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시몬은 바로 그러한 구레네 출신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시몬이 구레네가 아닌 예루살렘에서 살게 되었을까요 ?
이에 대해 여러 학자들은, 경건한 유대인이었던 구레네 시몬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성전 중심의 삶을 가르치기 위해, 이사했다고 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시 시몬이 구레네에 다녀오는 길에 십자가의 행렬을 목격하게 되었고,
평소 경건한 삶을 살았던 그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귀한 일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루포의 가정은 그렇게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루포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을까요 ?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다소 출신 유대인입니다.
다소는 지금의 터키 남부지역의 지방으로서, 유대의 예루살렘과는
무려 700km이상 떨어진 먼 곳이었습니다. 당시로는 20일 거리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보면, 그런 다소출신의 바울이,
유대 땅 예루살렘에 있는 가브리엘 문하(門下)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은 당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공부할 때,
루포의 집에서 하숙(下宿)을 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루포나 바울이나 같은 디아스포라(외국에 살던 유대인)였으므로,
서로 많은 것을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구레네 시몬의 아내이자, 루포의 어머니는,
유학생 바울을 자기의 친아들처럼 사랑으로 보살폈던 것 같습니다.
부모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왔던 청년 바울,
그는 여러 면에 있어서 외롭고 힘들었지만,
루포의 어머니를 통해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루포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나의 어머니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이곳 일본에 살아가고 있는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저는 우리들이 루포의 어머니처럼, 외롭고 힘들지만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 땅의 또 다른 바울과 같은 사람의 스폰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비록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보다 더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기까지는,
루포의 어머니와 같은 여러 협력자들의 사랑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 사람들을 하나 하나 소개하는 것이, 바로 로마서16장인 것입니다
실제로, 본문 로마서16장1절에 보면, 뵈뵈집사님이 등장합니다.
로마서16:1-2,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主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뵈뵈 女집사님은, 고린도 남쪽에 있는 겐그리아에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바울은 물론 여러 사람들의 보호자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특히 여기서 '보호자'라는 말은, 헬라어 '프로스타티스'로서,
이 말은 당시 법적인 책임을 담당할 수 있는, 남자들에게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뵈뵈 女집사님에게 이 단어가 쓰인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인데,
그것은 그녀가 법적인 책임을 대신 질 수 있을 정도의 실력 있는 여인이었다는 것이고,
또한 그녀가 나그네와 연약한 자들을 끝까지 지켜 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5월10일 字, 한국 동아일보에 실린, 한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기사제목 -
"21살 한국 처녀에게 情을 나눠주던 곳 ....... 나는 후쿠시마(福島)를 잊을 수 없었다"
日 대지진 겪고도 두 달만에 돌아가 정착한 주미선 씨
나는 스물 두 살이다. 여자다. 결혼도 해야 하고 애도 낳아야 한다.
그런 내가 후쿠시마(福島)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불과 50km 떨어진
고리야마(郡山) 市에 산다.
남들은 후쿠시마의 '후'자만 들어도 겁을 내는 원자력발전소 사고 지역 부근이다.
아침마다 신문을 펼쳐보며, 오르락내리락하는 방사능 수치에 안도와 불안이 교차한다.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건물을 흔들어대는 지진은 공포 그 자체다.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 자신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친구들도 나를 보면 미쳤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
나를 여기에 붙잡아두는 이 힘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 !
일본 사람조차 후쿠시마를 떠나는 마당에 후쿠시마로 다시 돌아온 이유에 대해
주 씨는 "인간에 대한 예의 때문"이라고 말했다.
"머리로는 잊으려 해도 몸이 기억하고 있나 봐요.
(지진이 일어나) 조금만 흔들려도 1년 전 그 공포가 떠올라요."
지난해 3월11일 福島縣 いわき市에 있는 東日本國際大學 기숙사.
이제 몇 일이 지나면 경제정보학부 졸업반이 되는 주미선 씨는,
개학을 앞두고 취업 이력서를 작성 중이었다.
오후2시46분, 느닷없이 휴대전화에서 요란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그 순간에도 주 씨는 그 경보음이 앞으로 닥칠 대재앙의 전주곡임을 짐작조차 못했다.
그로부터 1, 2분이 지났을까, 기숙사가 통째로 휘청거렸다.
책상을 잡고도 서 있을 수 없는 격렬한 흔들림이 이어졌다.
끝났나 싶으면 계속되는 지진이 10여 분이나 계속됐다.
일본 생활 3년, 웬만큼 지진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후다닥 책상 밑으로 몸을 피했다.
책장의 책들이 쏟아졌고, 침대 위의 스탠드가 바닥으로 떨어져 이리저리 뒹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책상 밑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을 수밖에,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지진이 잦아들자 주 씨는 재빨리 건물 밖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다.
당시 기숙사에 남아있던 학생 150여 명의 얼굴빛은 사색이었다.
대부분 혼자서 공포에 떨다 나와서 그런지, 서로 부둥켜안은 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겨우 살았구나 싶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 시간 후 쓰나미가 몰려왔다.
다음 날엔 후쿠시마 원전 1호기가 폭발했고 3호기 2호기 4호기가 줄줄이 폭발했다.
학생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한 대학 측은,
13일 학생들의 긴급 소개(疏開)를 결정했다.
버스 5대를 급하게 빌려,
도쿄에 있는 다른 대학 기숙사를 물색해 피난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고속도로는 이미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도쿄에 가는 데 평소에는 2시간이면 충분했지만 이날은 무려 15시간이 넘게 걸렸다.
학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교수님과 학교 직원들은
다시 그 버스로 가족이 있는 福島로 향했다.
"나 몰라라 할 수도 있잖아요. 교수님들과 직원들도 돌봐야 할 가족이 있는데 .......
하지만 선생님들은 우리들을 먼저 챙겨주셨어요."
도쿄에 도착한 외국 학생들은 비행기표를 구하는 대로 하나둘 일본을 떠났다.
주 씨도 지진 엿새만에 가까스로 귀국에 성공했다.
혼자 도망쳤다는 죄책감
집으로 가면 편할 줄만 알았다.
그러나 '이젠 살았다'는 안도감은 하루도 가지 못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포근한 침대에 누워도,
무기력하고 허탈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답이 없는 질문들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대학 졸업도 못한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
'일본으로 돌아가 다시 대학에 들어가야 하나 ?'
정작 주 씨의 마음을 짓누른 건 진로문제가 아니었다.
'혼자 도망쳤다는 죄책감 .......'
모두들 위태롭게 살아가는 난장판에서
저 혼자 살겠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뜬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비겁한 자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일본의 知人들에게 부지런히 격려와 안부 전화를 돌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교수님, 친구들 그리고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로부터 되돌아오는 말은
한결 같았다.
"안전하게 피해 천만다행"이라는, "몸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다 또 만나자"라는 배려가
담긴 전화였다.
위로하려고 전화했다가 오히려 격려를 받는 꼴이 돼버렸다.
가족처럼 돌봐주던 후쿠시마(福島) 사람들
지난2008년3월, 미선은 기대와 설렘 속에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낯선 곳에서의 생활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멋진 유학생활을 하겠다는 의욕만큼은 넘쳐흘렀다.
하지만 썰렁한 기숙사에 들어섰을 때 몰려온 그 외로움과 막막함을
미선은 잊지 못한다.
뼛속까지 시린 을씨년스러운 추위와 낯선 시골의 대학 기숙사,
말 안 통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 .......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기만 해,
10대의 새내기 여대생이 감당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훈훈한 정을 느끼면서 꿋꿋하게 유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언제나 상냥하게 웃으며 먹을 것을 챙겨주던 기숙사 앞 상점 아줌마,
장학금을 주고 정기적으로 집으로 초대해
가족처럼 돌봐준 지역 로터리클럽의 아줌마 아저씨,
행여 외로울세라 기꺼이 말동무를 자처했던 여러 친구들.
지난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원화 가치가 폭락했을 때,
학교 선생님들은 미선의 학비 부담을 함께 고민했다.
모든 게 빚이었고 은혜였다.
이런 분들을 등지고 떠났다는 배신감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주미선 씨의 어머니, "차라리 되돌아가라."
멍하니 창 밖만을 바라보며, 점점 웃음을 잃어 가는 딸의 모습을 보다 못한 엄마는,
결국 미선의 일본행을 허락했다.
그분들에게 진 빚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선뜻 되돌아갈 용기도 없던 미선을, 엄마가 먼저 나서서 이끌어 준 것이다.
지난해5월22일, 미선은 '피난생활' 2개월만에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친구들은 "다들 못 나와서 안달인데 미친 것 아니냐"며 만류했지만,
미선은 '이렇게 해야만 한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찾은 기숙사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겨우 몸만 빠져나오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학교로 되돌아온 친구들은 절반도 안됐다.
단짝이던 같은 과 한국 친구 2명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크고 작은 여진이 하루에도 수십 차례 이어졌고,
방사능 수치도 높아 숨쉬는 것도 겁이 났다.
처음 한 달은 도저히 기숙사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도쿄의 친구 집에 머물며 수업이 있는 날에만 통학을 했다.
그러던 미선은 문득 '너무 호들갑을 떨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묵묵히 자기 생활을 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분들을 배신하는 것이 싫어서 돌아와 놓고 ....... 이건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미선은 도쿄 통학을 포기하고 완전히 이와키 주민이 되기로 했다.
똑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생활하면서 완벽히 그들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후쿠시마 방송 입사
"미선, 일본에서 슈카츠(就活)를 다시 시작해 보는 게 어때 ?"
후쿠시마에 다시 돌아온 지 한 달쯤 지난 6월 어느 날,
미선은 지도교수님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미선의 학교생활과 학업을 돌봐주며 멘토 역할을 해온 교수님이,
일본 기업 취업을 제안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보통 대학교 3학년2학기부터 취업활동에 돌입한다.
미선도 3학년부터 슈카쓰에 들어갔지만 지진 이후 포기했던 터였다.
'그래 다시 해보는 거야 ! '
온라인 채용사이트에 접속해 취업정보를 모으고,
구미가 당기는 회사 수십 곳에 이력서도 넣었다.
취업 준비생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에도 빠짐없이 참가했다.
그러던 중 매스미디어에 관심이 많던 미선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7월 후쿠시마 방송에서 채용공고가 난 것.
하지만 외국인이 일반 회사도 아닌 방송사에 취직한다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2명 채용에 전국에서 2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그러나, 서류심사 필기시험 그리고 3차례의 면접 끝에
미선은 지난해 9월 당당히 합격통지서를 거머쥐었다.
福島방송이 외국인을 채용한 것은 개국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신입사원 채용을 총괄한 사토우 요시무네(佐藤吉宗) 총무부장은 미선에 대해
"밝고 긍정적이다.
일본 학생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면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온라인, 컴퓨터 시대라고 해,도 방송은 사람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이 기본.
미선은 상대를 이해하고 설득시키는 대인관계 면에서 탁월한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
평가위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고 한다.
미선은 지난4월부터 후쿠시마 방송사 영업부에서 일하고 있다.
지방 방송사는 종합직으로 채용한 직원이 여러 부서를 경험하게 한다.
미선도 보도본부와 방송제작 등을 거칠 예정이다.
"일본에도 물론 나쁜 사람이 많아요.
위안부 할머니의 아픈 과거를 못 본 체하려는 비양심적인 사람도 있고,
이웃나라를 침략한 과거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대표적이죠.
그런 사람을 보면 한국인으로서 '욱'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일본에는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에요.
한국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
식민지시대 한국인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고 반성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한국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東日本 대지진 때 '방사능이나 실컷 마셔라'며 철없는 글을 올린 사람도 있지만,
이웃나라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고 도우려는 사람이 더 많았던 것처럼 말이에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린 미선의 꿈은 소박하다.
"밖에서는 위태롭게 보이는 후쿠시마(福島)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이분들과 고통을 함께 하며 같이 아파하는 외국인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게 정(情)이고 의리(義理)인 것 같아요."
고리야먀 = 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예루살렘에서 외롭게 공부하던 바울에게,
루포의 어머니가 베푼 따뜻한 사랑과 정(情이) 있었듯이,
주미선 양에게는 福島사람들의 따뜻한 사랑과 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情은 그에게 있어서 또 다른 '어머니의 情'이었던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을 맞아, 조금은 다른 측면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버이의 사랑과 은혜는 당연히 감사하며 갚아 가야 하는 것이고,
오늘은 우리들도 루포의 어머니처럼 또 다른 어머니가 되어
어버이의 사랑을 베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낳아 준 부모뿐 아니라,
또 다른 어머니들의 은혜도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실제로 처음 어머니 주일이 생기게 된 것도,
나를 낳아 준 어머니의 사랑에 감사하자는 것도 있었지만,
낳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처럼 사랑을 주신
'버지니아 주 웹스터 마을의 자비스 부인'을 기리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닙니까 ?
본문에서 바울도 힘주어 말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여러분들도 뵈뵈 여집사님과 같은 실력 있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하나님께 큰복을 받아 크게 성공하십시오.
그래서 뵈뵈집사님처럼 큰 배포로,
또한 루포의 어머니가 가진 잔잔한 사랑과 情으로,
이 땅의 많은 연약한 사람들을 섬겨,
그들을 바울처럼 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우리도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 의심하지 않는 마음, 작은 일에도 만족하는 마음을 가져,
천국의 샘플이 되는 성도가 됩시다.
어린아이나 연약한 형제를 섬기는 것은,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예수님을 섬겨 봅시다.
1903년,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웹스터라는 마을에
자비스(Jarvis)라는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린아이들을 무척 좋아해서,
마을의 어린이들을 자기의 친자식처럼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웹스터 마을의 어린이들에게는 어머니가 둘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특히 그녀는 그 마을의 웹스터 교회에서 26년 간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했는데,
항상 "어머니 아버지를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비스가 병에 걸렸는데, 많은 어린이들과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그녀의 가르침을 항상 가슴에 새겼던 여러 제자들이,
자비스 부인의 '어린이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 추도식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추도식 날,
미국 곳곳에 흩어져 살던 자비스 부인의 제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비스 부인의 딸 안나는
생전 어머니의 '어린이 사랑'을 회고한 후, 카네이션 꽃을 고인의 단에 드렸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비스 부인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고,
결국 그 날을 '어머니의 사랑을 기리는 날'로 정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자비스의 제자들은, 어머니 날 운동을 미국 전역에 전했고,
이 뜻을 귀하게 여긴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가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비스의 죽음으로부터 11년 뒤인 1914년,
미국 국회는 매년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정하여 기념일로 지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흐른 후,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역할 또한 중요함이 강조되면서,
그 명칭이 어버이 주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도 1930년부터 어머니 주일을 지키기 시작했고,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은 매년5월8일을 '어머니 날'로 공포했으며,
1974년 한국 정부는 '어머니 날'을 '어버이 날'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항상 효(孝)를 귀중히 여기는 우리들이지만,
이번 한 주간 더욱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 ! 모두 함께 오늘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본문13절, "主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오늘 본문인 로마서16장에는, 위대한 복음 전도자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동역자들을 소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여기에서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로 소개합니다.
도대체 바울에게 있어서 루포의 어머니는 과연 어떤 분이었기에,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의 어머니로 소개할까요 ?
자 ! 우선 루포는 누구일까요 ?
마가복음15장에 그 답이 있습니다.
마가복음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시몬이 시골에서 와서
지나가는 로마 군병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라 하는 해골의 곳에 이르니라"
그렇습니다. 바울이 내 어머니라고 말한 루포의 어머니는,
다름 아닌 예수님을 대신해 십자가를 졌던 그 구레네 시몬의 아내였습니다.
한편, 구레네 시몬의 두 아들인 알렉산더와 루포는
로마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큰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마가를 통해 마가복음을 기록할 때,
로마 성도들이 잘 알고 있었던 알렉산더와 루포의 이름을 말한 것입니다.
실제로 마가복음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이 루포의 어머니와 만나게 되었을까요 ?
우선, 루포의 가족은 본래 구레네에 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이 루포의 아버지를,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의 중요한 도시로서,
오늘날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로부터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고원지대입니다.
예수님 당시,
구레네에는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에 구레네 출신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 보더라도,
구레네 출신 유대인들은 세력도 컸고 힘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시몬은 바로 그러한 구레네 출신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시몬이 구레네가 아닌 예루살렘에서 살게 되었을까요 ?
이에 대해 여러 학자들은, 경건한 유대인이었던 구레네 시몬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성전 중심의 삶을 가르치기 위해, 이사했다고 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시 시몬이 구레네에 다녀오는 길에 십자가의 행렬을 목격하게 되었고,
평소 경건한 삶을 살았던 그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귀한 일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루포의 가정은 그렇게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루포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을까요 ?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다소 출신 유대인입니다.
다소는 지금의 터키 남부지역의 지방으로서, 유대의 예루살렘과는
무려 700km이상 떨어진 먼 곳이었습니다. 당시로는 20일 거리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보면, 그런 다소출신의 바울이,
유대 땅 예루살렘에 있는 가브리엘 문하(門下)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은 당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공부할 때,
루포의 집에서 하숙(下宿)을 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루포나 바울이나 같은 디아스포라(외국에 살던 유대인)였으므로,
서로 많은 것을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구레네 시몬의 아내이자, 루포의 어머니는,
유학생 바울을 자기의 친아들처럼 사랑으로 보살폈던 것 같습니다.
부모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왔던 청년 바울,
그는 여러 면에 있어서 외롭고 힘들었지만,
루포의 어머니를 통해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루포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나의 어머니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이곳 일본에 살아가고 있는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저는 우리들이 루포의 어머니처럼, 외롭고 힘들지만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 땅의 또 다른 바울과 같은 사람의 스폰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비록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보다 더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기까지는,
루포의 어머니와 같은 여러 협력자들의 사랑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 사람들을 하나 하나 소개하는 것이, 바로 로마서16장인 것입니다
실제로, 본문 로마서16장1절에 보면, 뵈뵈집사님이 등장합니다.
로마서16:1-2,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主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뵈뵈 女집사님은, 고린도 남쪽에 있는 겐그리아에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바울은 물론 여러 사람들의 보호자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특히 여기서 '보호자'라는 말은, 헬라어 '프로스타티스'로서,
이 말은 당시 법적인 책임을 담당할 수 있는, 남자들에게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뵈뵈 女집사님에게 이 단어가 쓰인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인데,
그것은 그녀가 법적인 책임을 대신 질 수 있을 정도의 실력 있는 여인이었다는 것이고,
또한 그녀가 나그네와 연약한 자들을 끝까지 지켜 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5월10일 字, 한국 동아일보에 실린, 한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기사제목 -
"21살 한국 처녀에게 情을 나눠주던 곳 ....... 나는 후쿠시마(福島)를 잊을 수 없었다"
日 대지진 겪고도 두 달만에 돌아가 정착한 주미선 씨
나는 스물 두 살이다. 여자다. 결혼도 해야 하고 애도 낳아야 한다.
그런 내가 후쿠시마(福島)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불과 50km 떨어진
고리야마(郡山) 市에 산다.
남들은 후쿠시마의 '후'자만 들어도 겁을 내는 원자력발전소 사고 지역 부근이다.
아침마다 신문을 펼쳐보며, 오르락내리락하는 방사능 수치에 안도와 불안이 교차한다.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건물을 흔들어대는 지진은 공포 그 자체다.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 자신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친구들도 나를 보면 미쳤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
나를 여기에 붙잡아두는 이 힘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 !
일본 사람조차 후쿠시마를 떠나는 마당에 후쿠시마로 다시 돌아온 이유에 대해
주 씨는 "인간에 대한 예의 때문"이라고 말했다.
"머리로는 잊으려 해도 몸이 기억하고 있나 봐요.
(지진이 일어나) 조금만 흔들려도 1년 전 그 공포가 떠올라요."
지난해 3월11일 福島縣 いわき市에 있는 東日本國際大學 기숙사.
이제 몇 일이 지나면 경제정보학부 졸업반이 되는 주미선 씨는,
개학을 앞두고 취업 이력서를 작성 중이었다.
오후2시46분, 느닷없이 휴대전화에서 요란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그 순간에도 주 씨는 그 경보음이 앞으로 닥칠 대재앙의 전주곡임을 짐작조차 못했다.
그로부터 1, 2분이 지났을까, 기숙사가 통째로 휘청거렸다.
책상을 잡고도 서 있을 수 없는 격렬한 흔들림이 이어졌다.
끝났나 싶으면 계속되는 지진이 10여 분이나 계속됐다.
일본 생활 3년, 웬만큼 지진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후다닥 책상 밑으로 몸을 피했다.
책장의 책들이 쏟아졌고, 침대 위의 스탠드가 바닥으로 떨어져 이리저리 뒹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책상 밑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을 수밖에,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지진이 잦아들자 주 씨는 재빨리 건물 밖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다.
당시 기숙사에 남아있던 학생 150여 명의 얼굴빛은 사색이었다.
대부분 혼자서 공포에 떨다 나와서 그런지, 서로 부둥켜안은 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겨우 살았구나 싶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 시간 후 쓰나미가 몰려왔다.
다음 날엔 후쿠시마 원전 1호기가 폭발했고 3호기 2호기 4호기가 줄줄이 폭발했다.
학생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한 대학 측은,
13일 학생들의 긴급 소개(疏開)를 결정했다.
버스 5대를 급하게 빌려,
도쿄에 있는 다른 대학 기숙사를 물색해 피난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고속도로는 이미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도쿄에 가는 데 평소에는 2시간이면 충분했지만 이날은 무려 15시간이 넘게 걸렸다.
학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교수님과 학교 직원들은
다시 그 버스로 가족이 있는 福島로 향했다.
"나 몰라라 할 수도 있잖아요. 교수님들과 직원들도 돌봐야 할 가족이 있는데 .......
하지만 선생님들은 우리들을 먼저 챙겨주셨어요."
도쿄에 도착한 외국 학생들은 비행기표를 구하는 대로 하나둘 일본을 떠났다.
주 씨도 지진 엿새만에 가까스로 귀국에 성공했다.
혼자 도망쳤다는 죄책감
집으로 가면 편할 줄만 알았다.
그러나 '이젠 살았다'는 안도감은 하루도 가지 못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포근한 침대에 누워도,
무기력하고 허탈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답이 없는 질문들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대학 졸업도 못한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
'일본으로 돌아가 다시 대학에 들어가야 하나 ?'
정작 주 씨의 마음을 짓누른 건 진로문제가 아니었다.
'혼자 도망쳤다는 죄책감 .......'
모두들 위태롭게 살아가는 난장판에서
저 혼자 살겠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뜬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비겁한 자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일본의 知人들에게 부지런히 격려와 안부 전화를 돌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교수님, 친구들 그리고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로부터 되돌아오는 말은
한결 같았다.
"안전하게 피해 천만다행"이라는, "몸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다 또 만나자"라는 배려가
담긴 전화였다.
위로하려고 전화했다가 오히려 격려를 받는 꼴이 돼버렸다.
가족처럼 돌봐주던 후쿠시마(福島) 사람들
지난2008년3월, 미선은 기대와 설렘 속에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낯선 곳에서의 생활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멋진 유학생활을 하겠다는 의욕만큼은 넘쳐흘렀다.
하지만 썰렁한 기숙사에 들어섰을 때 몰려온 그 외로움과 막막함을
미선은 잊지 못한다.
뼛속까지 시린 을씨년스러운 추위와 낯선 시골의 대학 기숙사,
말 안 통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 .......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기만 해,
10대의 새내기 여대생이 감당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훈훈한 정을 느끼면서 꿋꿋하게 유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언제나 상냥하게 웃으며 먹을 것을 챙겨주던 기숙사 앞 상점 아줌마,
장학금을 주고 정기적으로 집으로 초대해
가족처럼 돌봐준 지역 로터리클럽의 아줌마 아저씨,
행여 외로울세라 기꺼이 말동무를 자처했던 여러 친구들.
지난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원화 가치가 폭락했을 때,
학교 선생님들은 미선의 학비 부담을 함께 고민했다.
모든 게 빚이었고 은혜였다.
이런 분들을 등지고 떠났다는 배신감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주미선 씨의 어머니, "차라리 되돌아가라."
멍하니 창 밖만을 바라보며, 점점 웃음을 잃어 가는 딸의 모습을 보다 못한 엄마는,
결국 미선의 일본행을 허락했다.
그분들에게 진 빚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선뜻 되돌아갈 용기도 없던 미선을, 엄마가 먼저 나서서 이끌어 준 것이다.
지난해5월22일, 미선은 '피난생활' 2개월만에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친구들은 "다들 못 나와서 안달인데 미친 것 아니냐"며 만류했지만,
미선은 '이렇게 해야만 한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찾은 기숙사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겨우 몸만 빠져나오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학교로 되돌아온 친구들은 절반도 안됐다.
단짝이던 같은 과 한국 친구 2명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크고 작은 여진이 하루에도 수십 차례 이어졌고,
방사능 수치도 높아 숨쉬는 것도 겁이 났다.
처음 한 달은 도저히 기숙사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도쿄의 친구 집에 머물며 수업이 있는 날에만 통학을 했다.
그러던 미선은 문득 '너무 호들갑을 떨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묵묵히 자기 생활을 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분들을 배신하는 것이 싫어서 돌아와 놓고 ....... 이건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미선은 도쿄 통학을 포기하고 완전히 이와키 주민이 되기로 했다.
똑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생활하면서 완벽히 그들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후쿠시마 방송 입사
"미선, 일본에서 슈카츠(就活)를 다시 시작해 보는 게 어때 ?"
후쿠시마에 다시 돌아온 지 한 달쯤 지난 6월 어느 날,
미선은 지도교수님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미선의 학교생활과 학업을 돌봐주며 멘토 역할을 해온 교수님이,
일본 기업 취업을 제안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보통 대학교 3학년2학기부터 취업활동에 돌입한다.
미선도 3학년부터 슈카쓰에 들어갔지만 지진 이후 포기했던 터였다.
'그래 다시 해보는 거야 ! '
온라인 채용사이트에 접속해 취업정보를 모으고,
구미가 당기는 회사 수십 곳에 이력서도 넣었다.
취업 준비생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에도 빠짐없이 참가했다.
그러던 중 매스미디어에 관심이 많던 미선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7월 후쿠시마 방송에서 채용공고가 난 것.
하지만 외국인이 일반 회사도 아닌 방송사에 취직한다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2명 채용에 전국에서 2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그러나, 서류심사 필기시험 그리고 3차례의 면접 끝에
미선은 지난해 9월 당당히 합격통지서를 거머쥐었다.
福島방송이 외국인을 채용한 것은 개국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신입사원 채용을 총괄한 사토우 요시무네(佐藤吉宗) 총무부장은 미선에 대해
"밝고 긍정적이다.
일본 학생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면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온라인, 컴퓨터 시대라고 해,도 방송은 사람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이 기본.
미선은 상대를 이해하고 설득시키는 대인관계 면에서 탁월한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
평가위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고 한다.
미선은 지난4월부터 후쿠시마 방송사 영업부에서 일하고 있다.
지방 방송사는 종합직으로 채용한 직원이 여러 부서를 경험하게 한다.
미선도 보도본부와 방송제작 등을 거칠 예정이다.
"일본에도 물론 나쁜 사람이 많아요.
위안부 할머니의 아픈 과거를 못 본 체하려는 비양심적인 사람도 있고,
이웃나라를 침략한 과거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대표적이죠.
그런 사람을 보면 한국인으로서 '욱'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일본에는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에요.
한국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
식민지시대 한국인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고 반성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한국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東日本 대지진 때 '방사능이나 실컷 마셔라'며 철없는 글을 올린 사람도 있지만,
이웃나라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고 도우려는 사람이 더 많았던 것처럼 말이에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린 미선의 꿈은 소박하다.
"밖에서는 위태롭게 보이는 후쿠시마(福島)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이분들과 고통을 함께 하며 같이 아파하는 외국인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게 정(情)이고 의리(義理)인 것 같아요."
고리야먀 = 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예루살렘에서 외롭게 공부하던 바울에게,
루포의 어머니가 베푼 따뜻한 사랑과 정(情이) 있었듯이,
주미선 양에게는 福島사람들의 따뜻한 사랑과 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情은 그에게 있어서 또 다른 '어머니의 情'이었던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을 맞아, 조금은 다른 측면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버이의 사랑과 은혜는 당연히 감사하며 갚아 가야 하는 것이고,
오늘은 우리들도 루포의 어머니처럼 또 다른 어머니가 되어
어버이의 사랑을 베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낳아 준 부모뿐 아니라,
또 다른 어머니들의 은혜도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실제로 처음 어머니 주일이 생기게 된 것도,
나를 낳아 준 어머니의 사랑에 감사하자는 것도 있었지만,
낳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처럼 사랑을 주신
'버지니아 주 웹스터 마을의 자비스 부인'을 기리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닙니까 ?
본문에서 바울도 힘주어 말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여러분들도 뵈뵈 여집사님과 같은 실력 있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하나님께 큰복을 받아 크게 성공하십시오.
그래서 뵈뵈집사님처럼 큰 배포로,
또한 루포의 어머니가 가진 잔잔한 사랑과 情으로,
이 땅의 많은 연약한 사람들을 섬겨,
그들을 바울처럼 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