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2월17일, 마태복음13:24-30, 36-43(主님께서는 왜 우리 옆에 가라지를 두실까 ?) > 主日説教原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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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日説教原稿

2013 2013년2월17일, 마태복음13:24-30, 36-43(主님께서는 왜 우리 옆에 가라지를 두실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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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者 박성철
コメント 0件 照会 12,432回 日時 13-02-18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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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 옆에 있는 귀한 지체들과 함께 이렇게 고백합시다.
  사랑하는 당신 !
  우린 절대로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삶을 살지 맙시다.
  하루를 시작할 때도, 일을 시작할 때도, 예수님을 항상 앞에 모십시다.
  1년 계획을 세울 때도, 평생 계획을 세울 때도 主님을 앞에 모십시다.
 
  성도여러분 !
  여러분은 '천국(天國)'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십니까 ?
  평강, 영원한 안식, 풍요, 찬란한 빛, 낙원, 행복, 생명수, 희락 .......
  그렇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우리가 주님과 영원히 동거할 곳이며,
  죽음, 눈물, 슬픔은 없고, 영원한 안식과 희락이 있는 곳입니다.
  이 천국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들어갈 우리들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같은 천국이 아닌, 또 다른 천국도 말씀합니다.
  위의 천국이 성취될 천국이라면, 또 다른 천국은 성취된 천국입니다.
  그리고 위의 천국이 앞으로 우리들이 들어가야 할 천국이라면,
  또 다른 천국은 우리들 대부분이 이미 들어가 살고 있는 천국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대개의 경우 통치의 개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나라의 주권(主權)이 누구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면, 그 나라는 국민의 나라입니다.
  지금의 한국, 일본, 미국 등이 그러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주권이 왕에게 있으면, 그 나라는 왕의 나라입니다.
  옛날의 朝鮮, 高麗, 江戶, 淸나라 등이 바로 왕이 주인인 나라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권이 하나님께 있으면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반대로 주권이 사단에게 있으면, 그 나라는 사단의 나라입니다.
  한 마디로 이 천국이 의미하는 것은 공간적, 미래적 개념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경험되어지는 통치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즉, 主되시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이면 그 어디나 다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가 들어간 천국, 우리에게 이루어진 천국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사는 지금 우리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먼 훗날 천국에 들어갈 것이지만,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6:31-33,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물론, 여기에서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말합니다.
  즉,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왕이 되셔서,
  이 땅에서도 나를 다스려 주옵소서 !"하는 말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13장에는,
  예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신, 천국에 대한 여러 비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씨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감추인 보화 비유, 진주 장수의 비유,
  물고기 그물 비유 등입니다.
  자 ! 여러분, 이 비유들은 두 천국 중 어떤 천국에 대한 비유일까요 ?
  물론입니다.
  성취된 천국, 이 땅에 이미 이루어진 천국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오늘 진짜 중요한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통치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괴롭히는 가라지는 여전히 내 삶 속에 있고, 또 나를 괴롭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요, 우리가 꼭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어둠의 세력과 결탁이 돼서, 몰라서,
  죄악 가운데 있어서, 그랬다 치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잖아요.
  이제는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따릅니다.
  그 분의 다스림 받기를 사모해서, 날마다 기도하고, 날마다 예배드리는데,
  왜 여전히 내 삶의 가장 가까운 곳의 가라지는 없어지지 않느냐 이겁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나눌 말씀의 핵심입니다.
 
  자 ! 본문을 보겠습니다.
  종(從)들이 주인에게 묻습니다.
  본문27절,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대답합니다.
  본문28절,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이에 종들이 다시 주인에게 묻습니다.
  본문28절,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
  이에 주인이 대답합니다.
  본문29절, "가만 두어라"
  본문30절,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가라지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을 아시면 서도, 그것을 가만 두라고 하십니다.
  사실 여러분 ! 우리들의 대부분의 기도의 제목들이 무엇입니까 ?
  그렇습니다. "이 가라지를 뽑아 주세요. 저 가라지를 없애 주세요"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매일 드리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때마다 뭐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까 ?
 "가만 두어라 !" "가만 두어라 !" "가만 두어라 !" .......
  그러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기도의 모습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뽑아버릴까요 ?" -> 하나님, "가만 두어라 !"
  우리, "처리해 버릴까요 ?" -> 하나님, "가만 두어라 !"
  우리, "끝장내 버릴까요 ?" -> 하나님, "그대로 가만 두라니까 !"
 
  그런데 여러분 ! 지금 두 고집이 맞붙어 싸웁니다. 누가 이길까요 ?
  물론입니다. 하나님입니다.
  사실이 이렇다면, 우리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하나님 뜻에 굴복하는 게 신상에 이롭습니다.
 
  사실 저에게도 가라지가 있습니다.
  그 동안 본향을 섬기면서 저를 괴롭히던 가라지가 적지 않았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저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가라지 때문에 매일 상처받고 괴로워하면서,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었던 것이
  저나 여러분이나 어디 한두 번이었습니까 ?
  그렇다면 여러분 !
  왜 하나님은 우리 옆에 가라지를 있게 하실 까요 ?
 
  첫째,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담긴 배려입니다.
 
  가라지를 뽑아버리느냐 하고 묻는 종들에게 주인은 대답합니다.
  본문29절, "가만 두라 !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그렇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이 다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말 그대로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이 다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말씀드린 것처럼, 장호원의 한 목사님이 크게 다치셨습니다.
  빙판이 된 길에서 넘어져, 얼굴 광대뼈가 깨져 일곱 조각이 났습니다.
  손가락도 골절되고, 갈비뼈도 몇 대나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얼굴 광대뼈를 맞추는 수술을 할 때, 한 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눈 밑 너무 깊은 곳에 그 뼛조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뼛조각을 꺼내 맞추려 하다가, 다른 중요한 것을 다치게 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우리의 직장과 가정, 그리고 교회 또한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사단이 심어놓은 가라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뽑으려 하다가 알곡인 우리가 다칠 수 있습니다.
  조금 다칠 것 같으면, 당장 뽑아 내버리면 되는데, 심각하게 다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본향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가라지와 같은 지체가 몇 있었습니다.
  오래 전 어떤 이는, 우리 본향의 신실한 지체에게 붙어서,
  그 지체의 마음, 물질, 젊음, 情 등 참으로 많은 것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마치 흡혈귀와도 같았고, 박쥐와도 같았습니다.
  저와 사모는, 그 가라지를 뽑아내기로 뜻을 정하고,
  어떨 때는 기도로, 어떨 때는 설득으로, 또 어떨 때는 강한 권면으로 그를 흔들었습니다.
  마침내 그 가라지는 그 신실한 지체에게서 뽑혀,
  저와 함께 입국관리국에 가서 신고하여 귀국했지만,
  남겨진 본향의 그 신실한 지체가 받은 상처와 아픔은, 상당 기간동안 지속되었었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지금 자신 속에 있는, 혹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라지 때문에,
  괴롭고 아파하는 분이 계십니까 ?
  그 가라지를 뽑아내기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하지만,
  여전히 든든히 박혀서 자신을 괴롭히므로 인해, 어찌할 바 몰라하는 분이 계십니까 ?
  그것은, 아직 우리가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가라지가 우리에게서 뽑혀나갈 때, 우리에게 줄 상처를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강하고 담대해질 때까지(그 아픔을 이겨낼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라지가 뽑혀나갈 때의 아픔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장성해질 때까지
  우리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오늘 이후 여러분들에게 가라지가 보이거들랑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빨리 장성해질 테니, 그때는 이 가라지를 뿌리 채 완전히 뽑아주세요."
 
  본문29절,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의 두 번째 의미는,
  우리에게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우리는 겉만 보고 판단하는 우(愚)를 너무 자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늘 얕습니다.
  중심을 잘 못 헤아립니다.
  그저 겉만 봅니다.
  그래서 알곡인 것을 '가라지'라 그러고, 가라지인 것을 '알곡'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
  그런 우리들에게 가라지를 뽑는 권한을 주면, 얼마나 많은 알곡이 다치겠습니까 ?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이 가라지를 뽑는다 하다가, 곡식까지 뽑을까봐 그냥 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
  어떤 무엇이 여러분에게 가라지 중에 가라지처럼 느껴지십니까 ?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알곡일 수 있습니다.
  고로, 뽑아달라 구하지 마시고, "내게 유익이 되게 하소서"라고 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히려 가라지도 우리에게 유익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둘째, 가라지를 두게 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믿지 않는 자에 대한 主님의 배려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
  그렇습니다. 기다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지만, 본문에서 주인의 시각과 종의 시각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종이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 그랬더니 주인이 "가만 두어라" 그럽니다.
  아마 종들은 재차 물었을 것입니다.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가만 두어라"
 "뽑아야 되는데요"
 "가만 두어라"
 "글쎄 ! 뽑아 버려야 됩니다"
 "가만 두래도 !"
 
  그렇다면, 주인의 생각은 무엇일까요 ?
  함께 말씀을 읽겠습니다.
  베드로후서3:9, ".......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자들에게 대한 우리 주님의 마음이십니다.
  언젠가는 심판하겠지만, 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겠지만,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하나님의 심정이 이러 하시다면, 우리 역시,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심정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 또한 그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우리 본향교회 공동체 안에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저게 없어져야 교회가 잘 될 텐데 ......." 혹 이런 마음이 드십니까 ?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회복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부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주님께서 기다려 주셨듯이 우리도 기다려 줍시다.
  관용을 보여주고, 품어주고, 포용하십시다.
  이 마음으로 가라지를 허용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깊이 깨닫고,
  그것을 배워 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가라지를 허용하시는 것은, 주님의 자신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30절,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여기에는 우리 주님의 확신이 있습니다.
  당당함과 자신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從)의 시각으로는 지금 안 뽑으면 농사를 망칠 것 같은데 괜찮다는 것입니다.
  자신 있으시다는 거예요. 나중에라도 언제든지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됩니까 ?
  내 생각에는, 저 가라지가 금방이라도 날 죽일 것 같은데, 저 사람 때문에 망할 것 같은데,
  그래서 당장이라도 뽑아야 할 것 같은데, 우리 주님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다 생각이 있으시다는 거예요. 결국은 승리케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자신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하나님서)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할렐루야 ! 아멘 !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훑어보세요.
  매 장마다 하나님의 자신감으로 꽉 차 있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왜 연약하고 유약한 아브람 옆에, 롯과 같은 사람을 두셨습니까 ?
  왜 요셉의 주위에는 그토록 배신과 유혹과 아픔이 있도록 하셨습니까 ?
  왜 다윗에게는 사울 왕이라고 하는 그토록 집요한 가라지를 두셨습니까 ?
  왜 엘리야선지자와 그 시대에는, 아합 왕이라고 하는 가라지를 두셨습니까 ?
  그렇습니다. 결국은 이기게 하실 자신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 있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때로 가라지를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가라지를 극복하실 수 있다고 믿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 가라지 때문에 우리가 변하고, 성장하고, 자라날 것을 믿기 때문이십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진주를 보십시오.
  조개에 작은 티끌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티끌은 연하디 연한 조개에게는 너무나 아프고 따가운 것입니다.
  그래서 조개는 그 티끌을 꺼내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온 진액을 다 쏟아 냅니다.
  그리고 그 진액과 몸부림은 아름다운 진주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라지로 인해 우리들이 흘리는 눈물과 고통의 진액은
  우리의 삶의 아름다운 진주로 오히려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주님의 그 자신감은 항상 우리를 뒤덮고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를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아름다운 진주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지치면 도와 주실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아니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2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러분 ! 이 얼마나 당당한 자신감입니까 !?
  우리들도 이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자신을 괴롭히는 가라지에 대해 관대해집니다.
  우리가 자신이 없기 때문에 가라지에 대해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토록 가라지가 없어지기만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 주시는 확신 가운데 자신감을 찾게 되면, 우리는 가라지에 대해 여유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허용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이 시간 이런 믿음과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 세상은 어차피 생선과 뱀이, 양과 염소가, 진주와 돼지가,
  그리고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가 섞여있는 세상입니다.
  좋은 것과 반대되는 것은 언제나 공존하는 법입니다.
  성공이 있으면 실패가 있고, 합격과 불합격이 공존하고, 미움과 사랑이 한 공간에 같이 있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쪽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좋은 쪽을 소망하며, 견디고 또 견뎌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 오는(또한 함께 있는) 가라지는,  우리에게 아픔과 연단을 같이 줍니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가라지 때문에 오는 아픔보다는,
  그것을 통과한 후의 성숙된 자기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 모두 감사와 행복의 안경을 씁시다. 그런 눈을 소망합시다.
  그러면 우리 눈을 통한 풍경과 사람과 일은 모두 감사와 행복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가라지마저 감사와 행복으로 바꿀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로마서8:28절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 ! 이제부터 가라지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 앞에 가라지 같은 사건이나 사람이 나타나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가라지님 고맙습니다. 저를 귀한 사람 만들려고 찾아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
  이렇게 우리 주님의 귀하신 배려를 깨닫고,
  새로운 시선으로 가라지를 맞이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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