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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日説教原稿

2015 2015년7월12일, 사도행전2:37-41(교인<教人>과 신자<信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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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者 박성철
コメント 0件 照会 10,994回 日時 15-07-24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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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 옆에 계신 귀한 지체들과 함께 이렇게 고백합시다.
  우리는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일터에서도 즉 우리가 속한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는 얼굴로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 밖에 나갔다 해서, 우리 얼굴이 세상 얼굴로 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곳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 아주 의좋은(仲むつまじい) 바보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둘은 한 처녀를 간절하게 사랑했습니다.
  아무리 의좋은 형제였지만, 사랑은 결코 양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바보 두 형제는 그 처녀를 제 각각 만나,

  자신들이 얼마나 간절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진실한 마음으로 고백했습니다.
  이에 난처한 처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결단을 내려 두 형제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해서, 그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두 형제를 불러 놓고 자기의 신랑이 되는 조건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간단한 테스트였습니다.

  내용인 즉, 형제 두 사람 중에서 더 높은 숫자를 말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는 둘 다 오랫동안 끙끙 앓다가 먼저 동생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萬) !"

  그러자 형의 얼굴이 빨갛게 물듭니다.

  그리고는 한참을 더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억 ! 내가 졌다 !"
  여러분 ! 결국 그 처녀는 누구와 결혼했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억(億) ! 내가 졌다 !"고 말한, 형과 결혼했습니다.
  너무 재미없는 썰렁한 이야기였습니까 ?!


  오늘은 수(數)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현대인들은 숫자에 무척 민감합니다.
  취업을 앞둔 학생들은 스팩(specification, 직장을 구하는 사람이, 학창시절 동안 자신이

  확보할 수 있는 외적조건의 총체로, 학력, 학점, 토익 점수, 해외 연수 등을 종합한 것을 이르는 말)

  점수에 민감합니다.
  정당들은 의석 수를 늘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대통령과 수상 등은,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많은 수단을 동원합니다.
  직장인들도 월급 명세서 숫자가 조금이라도 올라가는 게 소원입니다.
  한때 한국의 초등학교 학생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유행했었습니다.
 "너 학원 몇 개 다녀 ?"
  그리고, 다니고 있는 학원의 개수에 따라, 그 어린이의 위치가 결정되는,

  참 희한한 일들이 벌어졌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數에 대한 민감함은, 교회에까지 들어왔습니다.

  목사들의 모임에 나가도, 그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모여 예배드리느냐,

  혹은 예배당 평수가 크냐 작으냐에 따라, 그 교회의 급이 정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
  우리 앞에 나타나는 그 수(數)가, 정말 그 數만큼의 힘을 발휘합니까 ?
  스팩이나 토익점수가 높으면 그 만큼 일을 잘합니까 ?
  학교에서 등수가 높은 학생이, 훗날 사회에서도 더욱 성공합니까 ?
  많은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 아름답고, 더욱더 교회다운 일들을 감당합니까 ?

  꼭 그렇지는 않지요 ?!


  수학에서 말하는 數에는 자연수, 정수, 유리수 等등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범위를 포함하고 있는 數가 복소수(複素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소수는 실수(實數) 부분과 허수(虛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이런 모양입니다. 복소수 = a(실수 부분) + bi(허수 부분)
  이 중 실수는, 그 수를 서로 곱하면(즉 제곱하면) 반드시 0이상, 플러스(+)가 되는 수입니다.

  그러나 허수는 그와 반대로, 그 수를 서로 곱해도 여전히 마이너스(-)에 머물러 있는 수입니다.
  그래서 허수 부분의 숫자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복소수는 오히려 작아집니다.

  그야말로 허수는 허무한 수이며, 깎아먹는 수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이러한 허수(虛數)가 우리 주위의 삶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간절히 기도하며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던 성도들에게,

  불(火)과 같이 임했습니다.
  그 첫 번째 증거가,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제자들의 방언은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당시 그 곳에 모인 세계 각 국의 언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방언을 외국에서 온 여러 사람들이 알아들었습니다.
  이에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다가, 예배를 위해 잠시 예루살렘에 올라온 유대인들(디아스포라)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각 국의 방언을 말하는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한 번도 외국어를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들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사도 베드로가 그의 생애 첫 번째 설교를 합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것처럼, 당시 베드로는 무학(無學)인데다,

  이스라엘 內에서도 천대받던 갈릴리 사람이었고,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는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료했고, 단순했으며, 쉬웠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설교는 권위와 능력이 있었고,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첫 설교의 결론을 이렇게 맺었습니다.
  사도행전2:36,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우리의) 主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
  본문37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여기서 '찔려'라는 동사의 헬라어는 '카테뉘게산'인데,

  그 의미는 '격하게 찔러 관통하다', '실신시키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머라는 학자는 이 부분을, "당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말발굽으로 땅이 움푹 파인 것과 같았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 이 얼마나 대단한 충격입니까 ?


  한편, 하나님 말씀을 통해 실신할 정도의 충격을 받아, "어찌할꼬 !"를 되풀이하는 무리들에게,

  베드로는 회복의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본문38절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렇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제시한 방법은 두 단계였습니다.
  먼저는 철저히 회개하라는 것이요,

  다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

  본문41절을 보겠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數)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늘어난 제자의 수가 몇이라고요 ?

  그렇습니다, 삼천입니다.
  더구나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4:4절을 보면, 삼천 명의 세례로부터 몇 날이 지나지 않아,

  다시 오천 명이 말씀을 듣고 돌이키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단 몇 일 동안에 8千명이라는 숫자가 회개하고 믿음을 가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8천명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수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 오늘 본문의 사건이 있을 당시의 예루살렘의 인구는 약8만 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성읍에서 무려 8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몇 일 사이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행전4:4절에 보면, 이 數는 成人 男子만을 센 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 있어 한 가정의 종교는 가장에 의해서 결정이 되었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의 8천 명의 수에, 포함되지 않은 여인들과 20세 미만의 어린이와 학생들, 그리고

  남자 가장을 통해 개종한 집안의 식구들까지 한다면, 그 수는 가히 3∼4만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것은 곧, 당시 예루살렘 인구의 40∼50%정도가 불과 몇 일만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부흥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여기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의 8천 명 회개 사건으로부터 30년 후,

  사도 바울이 세 차례의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은 극소수였습니다.
  더구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어서,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교인들이,

  유대교의 배신자인 바울을 잡아죽이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바울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바울을 지키려 했던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30년 전에 예루살렘 인구의 40∼50%정도가 그리스도인이었다면,

  30년이 지나서는 50∼60%정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어야 옳지 않습니까 ?
  그런데 그렇게 되기는커녕,

  30년 후 오히려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30년 전의 그 많던 군중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
  베드로의 설교에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던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요 ?


  물론 사도행전8장에 보면,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나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곳을 떠난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한 도시 인구의 절반이

  일거에 그 도시를 떠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이유가 있다면 어쩌면 이것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군중심리'(群衆心理)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시내산으로 올라 가 있는 동안,

  산 아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몇 사람이 주도했겠지만, 대다수 백성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군중심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가데스 바네아에 왔을 때,

  가나안에 정탐꾼을 보내 그 결과를 듣습니다.

  열 명의 정탐군들로부터, 자기들은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에 비하면

  메뚜기 같이 연약한 자라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들이 누구에 의해 애굽을 탈출했으며, 그들이 지금 어떻게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아무도 생각하려 들지를 않았습니다.

  그저 눈 앞의 현실에 우왕좌왕했습니다.

  역시 군중심리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길가에 서 있던 수많은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 이스라엘의 왕이여 !"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닷새 후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저주했습니다. 역시 군중심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오늘 본문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또 몇 일이 지나지 않아 오천 명이 돌아섰지만,

  그들 중  aks대부분은 어쩌면 군중심리에 휩쓸린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분위기와 감정에 쌓여서, 신앙의 본질은 무시하고, 세례의 형식만 취한 것입니다.
  그랬기에 성령께서 사도행전을 누가를 통해 기록하게 하실 때,

  (한글개역개정 성경은 '신도(信徒)'로 번역했음)

  이 무리(군중)들을 향해, '제자'라는 말의 '마테테스'나,

  혹은 형제라는 말인 '아델포스'를 쓰지 않고, '푸쉬케'라는 단어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41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렇습니다. 여기의 신도(信徒)의 원문 헬라어는 '푸쉬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여기에서 '푸쉬케'란 단어는 그 뜻이 신자(信者)나 성도(聖徒)가 아니라,

  그냥 살아있는 생명, 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렇게 '푸쉬케'란 단어를 사용한 성령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
  그렇습니다.

  이들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완전히 변화된 것인가를, 좀더 지켜보겠다는 것입니다.
  얼마 후, 결국 본문의 이 삼천의 숫자는 허수(虛數)로 결판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신앙의 동기(動機)는 집단적일 수 있습니다.
  옆 사람이 혹은 옆 친구가 믿으니까, 나도 같이 믿어 볼 수 있습니다.
  군중심리가 신앙의 동기도 될 수 있습니다.
  분위기에 휩싸여 교회에 왔을 수도 있고, 또 세례도 받을 수 있고,

  성경공부나 기도 모임에도 나갈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군중심리로만은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그 質과 그 믿음은 철저히 개인적입니다.
  철저히 하나님과 일대일로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하루하루 쌓아 가는 숫자는 실수(實數)가 아니라 허수(虛數)로 밖에 남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했는가 하는 허수(虛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걸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의 인생을 허수(虛數, 물거품)가 아닌 실수(實數, 값진 인생)로 쌓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말발굽에 땅이 움푹 파일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 ! 베드로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양심을 사정없이 자극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그들 중에는,

  약40일 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했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죽이는데 직, 간접적으로 동조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을 향해, "그 예수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말했을 때,

  아무도 아니라고 말하거나,

  또는 그것이 빌라도와 대제사장의 책임이라고 말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깊은 충격을 받고 자신들을 향해 "어찌할꼬"하며 탄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그들의 양심은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데 머물지 말고,

  그 내 양심을 찔리는 그 가책에 대해, 결단한 나의 삶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허수(虛數)가 아닌 실수(實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양심의 가책에 반응하기보다는 그냥 지쳐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반복하다, 결국 날선 검과 같은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전혀 무감각한,

  죽어버린 양심으로, 자신의 양심을 전락시키고 맙니다.
  여러분 !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변함 없이 싱싱하게 살아 있느냐,

  아니면 시체처럼 썩어져 가느냐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찌할꼬"하며 탄식하는 무리들에게, 베드로는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이 회개의 원어인 '메타노이아'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에서 완전 유∼턴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 우리가 그렇게 결단하여 돌이키면, 主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 험한 세상, 유혹이 가득한 세상을 이길 힘도 주십니다.
  이 은혜를 항상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될 때 저와 여러분은 연약한 敎人에서, 진정한 信者로서 거듭날 것입니다.
  이 복이 오늘 이 시간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부분을 더 살펴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음에 찔림을 받고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이,

  왜 끝까지 믿음을 이어가지 못하고, 곧 그 믿음을 버리고 말았을까요 ?
  그렇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군중심리에 의해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고,

  그를 바탕으로 믿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런 군중심리(群衆心理)적 믿음에서,

  온전히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가끔은 철저한 고독(孤獨)의 자리에 서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 고립(孤立)과 고독(孤獨)은 다릅니다.
  고립은 내가 같이 있기를 원하는 대도, 타의에 의해서 소외당하는 것이지만,

  고독은 누군가가 나와 함께 있어주기를 원하는데도, 나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고립시키고 차단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수천 명의 군중보다, 한 사람의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을 찾으십니다.
  자기 자신을 상실하여 여기 저기로 휩쓸리는 군중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위해, 때로는 고독 속에 자기를 내 던지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군중들과 함께 하셨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참으로 고독한 자리에, 자주 나아가셨습니다.

  광야의 기도가 그렇고, 새벽마다 기도하신 것이 그러하며,

  또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그러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남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패션(fashion)도 아니고 이벤트도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때대로 고독 속에 나 자신을 빠뜨리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철저히 고독하셨습니다.
  지난3년 간,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떨리는 마음에 아랑곳없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마저도 침묵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고독 중에 하신 기도가 무엇입니까 ?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독은, 우리의 삶을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 ! 지나치게 겉으로 드러난 수(數)에 대해 민감하지 맙시다.
  오히려, 깨어있는 한 사람을 통해, 큰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으로 따릅시다.

  우리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주신 작은 것들로, 큰 기적을 베푸실 것입니다.


  저는 앞의 삼천, 팔천이라는 숫자에는 조금도 부러움이 없습니다.
  대신,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항상 수고하고 헌신하면서도,

  자기를 스스로 고독에 빠뜨려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하는

  그 삼십, 팔십의 신자를 저는 너무도 열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여러분 !

  여러분이 이런 신자(信者)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본향교회는 세상이 말하는 숫자적으로는 아직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허수(虛數)가 아닌 실수(實數)가 가득한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그저 분위기 따라 우왕좌왕하는 거짓된 교인(敎人)이 되지 말고,

  하나님이 깨우쳐 주시는 말씀에 즉각 반응하여 돌이켜 순종하고,

  예수님 가신 고난의 길을 기쁘게 따라 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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