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017년3월26일, 요한복음5:1-9(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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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말씀을 생각하며, 함께 한 귀한 지체들과 이렇게 고백합시다.
자녀양육(혹은 영적인 자녀양육)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가장 귀한 사명입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처럼, 우리 자녀를 간절한 기도로 키웁시다.
록펠러의 어머니처럼,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웁시다.
여운학장로처럼, 우리의 자녀들에게 본(本)을 보이는 부모가 됩시다.
우리 본향의 가정들도 가정예배를 드립시다.
미국 볼티모어에 있는 세계 최고의 병원인 존스 홉킨스 병원 재활의학과에 들어서면
아주 특별한 의사 한 명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휠체어를 타고 병동을 누비는 한국인 의사 Robert Lee(이승복)입니다.
Robert Lee보다 이승복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그는,
미국 내 단 두 명뿐인 사지마비 장애인 의사 중 한 사람입니다.
휠체어를 타는 그의 모습은, 환자들에게 희망의 심벌(상징)이며,
그와 환자들간에는 다른 의사들과는 다른 특별한 유대감이 있다고 합니다.
이승복 박사가 미국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973년(여덟 살 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온 가족과 함께 미국이민을 선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승복이의 가족이 처음 도착한 곳은 뉴욕이었습니다.
그런데 승복이의 이민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얼굴보기 힘들 정도로 바빴고, 이에 승복은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아직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에 말입니다.
당시 부모님의 따스한 사랑이 갈급 했던 승복은 애정결핍에 시달렸고,
더구나 친구들의 놀림과 따돌림은 승복이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승복이는 다니던 교회 옆에 있던 YMCA에서, 멋지게 운동하던 체조선수들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승복이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느껴졌습니다.
승복은 체조선수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열심히 체조를 배워, 올림픽 금메달을 따,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자"
그렇게, 체조 무료 청강생으로부터 시작한 승복은
1979년(14세) 마루운동 부문 뉴욕 챔피언,
1981년 10학년 때 전국연합챔피언십 종합3위,
11학년 때는 국제 주니어 대회 종합3위,
1982년(18세) 전미대회 마루운동 부문 금메달, 도마 은메달,
1983년(高校 3년)에는 올림픽 예비 최고선수에 뽑혔습니다.
그러자 코치들로부터 미국 국가대표 추천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미국의 국기(성조기)를 달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승복 그는 오직 한국인이기를 원했습니다.
한편 그 해 승복이는, 미시간 대, UCLA, 펜실베니아 주립대, 스탠포드 대, 웨스트포인터 군사학교 등
유명 체조 팀을 운영하는 거의 모든 대학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당시 승복의 미래는 참으로 밝았고,
올림픽 금메달을 통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는 꿈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의 인생을 바꾼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1983년7월5일, 더욱 더 많은 연습을 하고 싶었던 그는, 그만 코치의 말을 어기고, 혼자서 마루를 향해 뛰어 올랐고
목을 쭉 늘인 상태에서 턱으로부터 땅을 박고 떨어졌습니다.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사고였습니다.
성공과 환희가 기다리고 있는 그의 밝은 미래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는 안타까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일곱 번째 경추 아래의 끊어진 신경들이 다시 붙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결국 평생 휠체어에서 일어설 수 없고, 평생 온전히 구부러지지 않는 손가락,
온전히 쥘 수 없는 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19세 때였습니다.
승복의 모든 꿈은 깨졌습니다.
그에게 더 이상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체조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분노만이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이승복 그는 거기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 속에서 타오르는 분노를, 자기 앞에 놓여진 현실, 즉 재활훈련에 쏟아 부었습니다.
물리치료 시간이 되면, 모든 힘과 마음을 집중해 쏟아 부었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승복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혼자서 병원을 산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루 종일 침대에서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병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의학 공부에 대한 큰 소망을 느꼈습니다.
그는 손으로 글씨조차 쓰기 힘들었지만, 뉴욕대를 목표로 삼아 최선을 다했고, 결국 합격했습니다.
그 후 콜럼비아 대학 석사학위, 의학 명문 다트머스 의대를 거쳐,
하버드 의대에 합격해 인턴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님과 조국을 위해 1등으로 살고 싶었어요 !!!"
한편, 승복이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특히 강한데,
어린 시절 한국어를 잊어 가는 동생들에게 고국어를 가르쳐 주었고,
또한 이름을 부르는 동생들이 '형'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놀아주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승복 박사의 이야기는 미국 전역에 소개되었고,
한국에서도 SBS에서는 그를 주인공으로 그린 '닥터챔프'라는 16부작 드라마로,
MBC에서는 '희망특강 파랑새'로, 그리고 KBS에서는 '인간극장'으로 소개했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여러분들도, 주님 은혜로 지금의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여,
하나님이 세워주시는 은혜, 귀히 쓰시는 은총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에 가셨습니다.
오래 전, 고고학자들이 이 베데스다 연못을 발굴했는데,
폭이 60m정도에, 길이가 100m정도 되는 상당히 큰 연못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 연못의 주위에는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못은 이따금 온천수가 솟아오르는 간헐 온천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이 솟구쳐 나올 때 몸을 담그면 여러 종류의 병이 나았던 것 같습니다.
지질학 조사에 의하면, 이 연못 밑에는 고온의 지하수가 흘렀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3절에 보면,
당시 연못 주위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손발이 마비된)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병든 지 38년이나 된 환자도 있었습니다.
아마 그는 중풍병자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불구자로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연못에서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의 불행했던 인생은 새롭고 놀라운 기쁨의 인생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예수님은 절망 중에 있는 우리들을 찾아오시는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본문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이 병자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의 병은 만성적인 고질병이었습니다.
병든 지 38년이나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38년 간이나 깊은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더구나 그 고통은 해가 갈수록 더욱 큰 무거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은, 분명 그의 마음과 영혼까지도 포기와 좌절, 실망으로 물들여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 이 모든 것은 우리 주 예수님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는 어떤 악조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 지금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
지난 몇 년 동안, 혹 수십 년 동안 여러분을 괴롭혀 온 큰 문제가 혹 있습니까 ?
사랑하는 여러분 ! 염려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불행했던 삶을 얼마든지 행복한 삶으로 바꾸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둘째, 이 병자에게는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본문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렇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있었으나 그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힘도, 물질도, 이웃도, 친구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그에게 예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연약하고 힘든 이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서양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인생의 밤이 깊어지면 하나님의 별은 더욱 밝게 빛난다"
우리에게도 이런 비슷한 격언이 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 임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들이 절망에 늪에 빠져 "나에게는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하며 한탄하며 슬퍼할 때
주님은 우리 곁에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능력의 오른손을 펼치십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자주 소개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 어린아이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길가 밭에는 옥수수가 한창 익어가고 있었고, 옥수수를 보호하기 위해 높은 울타리가 둘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걷던 아이가 울타리 맨 위를 보다 깜짝 놀라 멈춰 섰습니다.
거북이 한 마리가 울타리 꼭대기에 배를 댄 채, 마치 수영을 하듯 네 발을 세차게 젓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거북이의 표정은 너무나 밝았고,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창공의 바람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그 거북이가 어떻게 그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묻습니다. "거북아 네가 어떻게 그 높은 곳에 올라갔니 ?"
거북이가 답합니다. "어느 분이 나를 땅에서 집어 이 높은 곳에 올려 주셨어요 !"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높이 올려 주십니다.
사무엘상2:7-8에는 기도의 여인 한나의 멋진 고백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분명합니다. 여러분 !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더구나 우리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을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잠언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잠언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은 겸손하며, 여호와를 경외함이 특별하니,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 즉,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모두 얻으시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우리 예수님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의 누워있는 모습을 바라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의 병이 오래된 것을 알아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 주님은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아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본문6절, "네가 낫고자 하느냐 ?!"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이 병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본향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아시고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
"네가 얻고자 하느냐 ?!"
"네가 해결 받고자 하느냐 ?!"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인생의 난관에 때때로 부딪힙니다.
살다보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정말로 많습니다.
아무리 성공한 사람이라도 고난과 시련은 그를 완전히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이런 외부의 상황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고, 우리의 앞길을 막더라도 우리의 마음만큼은 담대해야 합니다.
마음을 사단에게 빼앗기지 않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부의 시련과 상황으로 마음까지 흔들리며 시험에 빠진 사람은,
작은 바람과 시련에도 끝없는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38년 된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8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리고 우리에게도 똑 같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오늘 이 시간 우리들에게도 새 출발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의 병자는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본문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수십 년 간 우리들을 힘들게 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복', '고침 받는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십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연약하고 힘든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본문8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
올 봄 ! 삶의 모든 부분에서,
새 출발과 새 역사를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 이승복 박사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 >>>
힘든 이민생활 속에서 체조와의 운명적인 만남
이승복 씨가 가족들과 미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여덟 살 때인 1973년이었다.
당시는 매년 2만 명에 이르는 한국인이 미국 본토로 쏟아져 들어갔던 가족이민의 시대였다.
이승복 씨의 아버지는 경희대 약학대를 졸업한 후 약국을 운영하던 엘리트였지만,
늘 약국 생활을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민을 가면 한국에서보다 더 잘살 수 있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이민을 결심하게 된다.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초기 한인 이주자들이 많이 정착했던 뉴욕 퀸스 구역의 플러싱(Flushing)이란 곳으로,
흑인이 많고 다분히 소란스런 지역이었다.
그때부터 힘든 이민생활은 시작되었다.
이민 온 지 몇 달 만에 부모님은 얼굴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일을 나가셨고
그는 어린 동생들을 모두 공부시켜가며 돌봐야만 했다.
어쩌다 만나는 엄마에게 달려들어 안기기라도 하면 힘들다며 귀찮아 하셨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부모님이 조금만 덜 바쁘고 덜 피곤하기를,
가족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웃으면서 저녁식사 할 수 있기만 바랐다.
그러려면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 부모님 고생을 덜어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돈도 많이 벌고 조국 한국의 이름을 빛낼 수 있는,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실 만한 큰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늘 다니던 한인교회 옆에 있는 YMCA를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가게 됐다.
거기서는 그 또래 아이들이 수영복 같은 옷을 입고 마루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처음 보는 신기한 운동들이었다.
몸을 비틀며 공중회전을 하는 아이, 링에 매달려 천천히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아이,
안장에서 하체를 쉼 없이 돌리고 비트는 아이, 새처럼 비행하여 착지하는 아이…
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미국에 온 후로 부모님의 애정에 굶주리며, 놀림과 낮섦 속에 하루하루 옴츠러들던 그의 가슴을
시원하게 뻥 뚫어주는 장면이었다.
체조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체조야말로 그가 해야 할 일이고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루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게 되었다.
어느 날 몰래 따라하는 그의 모습이 코치 눈에 띄었다.
코치는 그에게 다가왔고, 그는 잔뜩 얼어 아직 돈이 없어서 등록을 못했지만 꼭 배울 거라고 말했다.
코치는 한참을 노려보더니 나와서 체조를 배우라고 말했다.
드디어 무료 청강생 자격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온통 체조에 빠져들었다.
촉망받는 운동선수에서 사지마비 장애인으로
시간이 갈수록 그의 기량은 향상되었다.
뉴욕 Zone3의 시합에서 마루운동 부분 1, 2등을 했고 평행봉과 링에서도 상위성적을 냈는가 하면,
1979년 구역경기에서는 금메달을 땄고, 같은 해 마루운동 부분 뉴욕 스테이트 챔피언이 되었다.
그 후 코치의 권유로 그는 집을 떠나 펜실베이니아 주 앨런타운 체조훈련센터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하루 5시간의 맹훈련을 계속했고 집에도 자주 들리지 못했다.
곁에서 부모님과 동생들을 챙겨주지 못하는 것이 답답하고 속이 상했지만
올림픽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 부모님의 고생을 덜어드리기 위해 현재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체조, 그것만이 어떤 고통을 치르든 그가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착실하게 기량을 다져 나갔다.
1981년 여름, 10학년 때 전국연합챔피언십에 출전해 종합성적 3위를 기록,
그중 마루와 도마는 각각 1등과 2등을 차지하였다.
11학년 가을에는 국제친선 주니어대회에 참가해 종합성적 3위,
1982년 전미대회에서는 마루에서 금메달, 도마에서 금메달을 따서 종합순위 3위를 기록하였다.
코치들 사이에서는 서서히 미국 국가대표팀에 넣어보자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에겐 미국 성조기를 달고 마루에 설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오로지 한국 선수이기를 바랬다.
다음 해 그는 1983년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림픽 예비군단의 최고 선수로 인정받게 되었다.
미시간대, UCLA,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템플대, 스탠포드 대, 웨스트포인트 군사학교 등
유명 체조팀을 운영하고 있는 거의 모든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는 등
그의 미래는 창창했고,
올림픽 금메달의 꿈은 손만 뻗으면 가능할 것 같은 강한 현실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코치가 미국에서 열리는 인터내셔널 대회에 한국대표로 출전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그렇게 되면 1986년 아시안게임은 물론,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문제없이 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올림픽 한국대표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그의 얘기에 그는 기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체조에 대한 지나친 열정은 그의 인생을 한순간에 바꾸어놓았다.
1983년 7월 5일, 그는 코치의 말을 어기고 혼자서 마루를 향해 뛰어오른 것이다.
그는 목을 쭉 늘인 상태로 턱으로 땅을 박았다.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었다.
성공과 안락이 기다리고 있는 그의 밝은 미래가 그 찰라의 순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C7-C8 종결선언을 받았다.
그것은 일곱 번째 경추 아래로 끊어진 신경들이 다시 붙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평생 휠체어에서 일어설 수 없으며, 평생 잘 구부러지지 않는 손가락, 잘 쥘 수 없는 악력으로 살아야 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야 할 나에게 왜 이런 일이 ?
의사들의 종결선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올림픽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꿈이 깨진 순간, 모든 희망은 일순간에 사라졌고 오직 분노만이 그에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다시 체조를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분노로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인생의 두 번째 금메달을 향한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자신의 분노를 그 앞에 놓여진 현실, 재활훈련에 쏟아내었다.
희망이 에너지이듯 그의 분노 또한 에너지였다.
그는 재활훈련에 그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물리치료 시간이 되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다른 환자들과는 달리,
그는 일찌감치 먼저 일어나 앉아서 조무사들을 기다렸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나자 그는 혼자서 병원 곳곳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휠체어가 있음에 감사했다.
덕분에 하루 종일 침대에서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바라거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것에 대해 슬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슬픔을 느끼기 전에 튼튼한 두 발이 되어준 휠체어를 타고 먼저 세상을 찾아 나갔다.
물리치료를 한지 4개월에 이르자, 그는 가능한 근육들을 거의 모두 쓸 수 있었다.
C7-C8 환자 중에서 그처럼 재활속도가 빠른 환자는 처음 보았다며
의사들도 물리치료사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한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 여러 권의 의학서적들을 찾아 읽었다.
어느 날 조무사 한 명이 그에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하워드 러스크 박사의 자서전’이라는 책이었다.
다른 어려운 의학서적들과는 달리 쉽게 쓰여져 있던 그 책을 읽으며
그는 자신에게 행해졌던 모든 고통스런 재활훈련이 하나하나 의미가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의학의 많은 분야들이 육체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데 반해,
재활의학은 육체의 상처뿐만 아니라 정신적 상처, 생명의 양을 늘리는 문제,
그리고 질을 향상시키는 문제까지 두루 관여하는 학문이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꿈을 잃어버리고 텅 비어버렸던 그의 가슴에 새로운 설렘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뉴욕대(NYU)를 목표로 잡았다.
장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고 손으로 글씨조차 쓰기 힘들었지만,
불편한 손으로 아슬아슬 휠체어의 바퀴를 돌리며 체조선수에 쏟던 정열을 고스란히 학업으로 돌렸다.
그리고 5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마침내 SAT에서 총점 1320점을 획득, 뉴욕대에 입학했다.
뉴욕대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았을 때 그는 친구들과 교수들, 가족들에게 메디컬 스쿨 진학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상인들에게도 힘든 의학공부가 장애인인 그에게 어려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당당히 콜럼비아대학에 입학해 공중보건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명문 다트머스 의대를 거쳐 하버드 의대에 들어가 하버드 의대 인턴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 최고의 병원인 존스 홉킨스 병원의 재활의학 수석 전문의가 되었다.
그는 도전을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금 또다시 척수신경과를 공부하려고 하고 있다.
인생의 금메달을 향한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조국애와 가족애가 사라진 시대에 ‘자랑스런 한국인’!
“부모님과 조국을 위해 1등으로 살고 싶어요 ! 뭐든지 열심히, 1등으로.”
이승복은 88서울올림픽 대한민국 대표로 출전하기 위해
그의 가족들은 모두 미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국적조차 받지 않았을 정도로 애국심이 강했고,
사고 후 사지마비가 된 것보다, 어린 시절 그를 놀리던 미국 사람들과 부모님께 올림픽 메달을 드릴 수 없어
더 화가 났다고 말할 만큼 가족애 특히 부모에 대한 사랑과 효심이 두터웠다.
그가 체조를 선택하게 된 것도 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가 되어
밤낮없이 바쁘신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한국인의 자랑스러운 위상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그는 한국말을 잊어 가는 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자 했고,
이름을 부르는 동생들이‘형’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놀아주지 조차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