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018年2월25일, 사도행전 3:1-10(오른손을 잡아 일으켜주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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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말씀을 생각하며, 함께 한 귀한 지체들과 이렇게 고백합시다.
십자가는 우리가 당할 고통을 主께서 대신 당하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당할 수치를 主께서 대신 당하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것처럼, 사도행전은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또 부흥했으며,
복음이 어떻게 온 세계로 퍼졌는가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 교회가 세워진 후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살펴보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 교회에 속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때에 있었던, 가장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한낮의 햇살을 받으며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을 향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려면 성전동쪽의 가장 큰 문을 지나야 했는데,
그 문에는 미문(美門, 아름다운 문)이란 별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에 거의 도착할 무렵,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한 앉은뱅이를, 사람들이 메고 와 美門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곧 바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바로 앞까지 갔을 때, 그는 다른 이에게 한 것처럼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첫 개시부터 허탕이구나 실망할 그 순간,
앉은뱅이는 자기 앞을 떠나지 않고 서 있는 두 사람의 강한 시선(視線)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곧장, 두 사람으로부터 이런 말이 그에게 들려왔습니다.
본문4절, "우리를 보라"(わたしたちを見なさい.)
사실 이 앉은뱅이는 이제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의 손만 보았을 뿐, 눈을 본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라'(見なさい)고 합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얼굴을 들고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두 사람의 눈빛은 따뜻했고, 사랑과 위로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들로부터 앉은뱅이에게, 참으로 놀라운 말이 들려옵니다.
본문6절,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金や銀はないが, 持っているものをあげよう.
ナザレ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立ち上がり, 步きなさい.)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앉은뱅이는, 일어나라 혹은 걸으라는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은 죽어버린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진실했고 무엇보다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더구나 놀라운 말을 한 그들이, 앉아있는 자신에게 손을 내밉니다.
이에 그도 오른손을 내밀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손을 꽈왁 잡아주었습니다.
베드로의 손은 참 따뜻했고 힘이 있었습니다.
순간 놀라운 능력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발목이 뜨거워지면서 발에 피가 도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베드로의 손을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서 보았습니다. 일어서졌습니다.
걸어 보았습니다. 걸어졌습니다.
뛰어 보았습니다. 뛰어졌습니다.
이것이 오늘 앉은뱅이와 두 제자 사이에 있었던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 누리는 우리 모두 되기를, 예수님 안에서 축복합니다.
즉,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서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은혜의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선 고침 받기 전의 앉은뱅이를 살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참 비슷한 것이 많거든요.
첫째,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사람에게 이런 불행이 찾아오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 가만히 생각해 보면,
타고 난 핸디캡(불리한 조건, 장애)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핸드캡(장애)은 육체적인 것도 있고 정신적인 것도 있습니다.
과거의 정신의학은, 어릴 적 성장기 때의 여러 가지 아픈 경험들이,
사람이 핸디캡을 가지게되는 결정적 원인이 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정신의학은, 날 때부터 갖게 된,
즉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핸디캡이 더 크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쪽이 옳든 간에,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핸디캡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또한 괴로워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왜 이렇게 끈기가 없을까 ?!'
'나는 왜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 할까 ?!'
'나는 조금만 먹어도 왜 이렇게 살이 잘 찔까 ?!'
'나는 왜 어렵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을까 ?!'
'나는 왜 사람들이 무서운가 ?!'
'나는 왜 모든 일에 비판적일까 ?!'
'나는 왜 쉽게 낙심하고 말까 ?!'
등등의 핸디캡입니다.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는 걷지 못하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 우리들에게도 이런 핸디캡이 혹 있지는 않습니까 ?
둘째,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 현대인들은, 모두 똑똑하고 현명하고 자기 정체성이 뚜렷한 것 같지만,
사실은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참으로 많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인생의 목표가 '남들처럼'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인생의 목표를 물으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남들만큼은 살려고 이렇게 노력합니다 !"
"남들 사는 집 만한 것 저도 갖는 것이 꿈이구요. 남들 타는 차 정도 가지는 것이 꿈이구요.
남들 만큼 우리 자녀들이 자라나 주었으면 좋겠구요. 남들 만치 배우고, 남들 만치 입으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 사실 이러한 삶은, 자유롭게 사는 것 같으나 자유롭지 못하고,
내가 살고 있는 것 같으나 내가 없고, 열심히는 사는 것 같으나 허무하며,
내 스스로 살고 있지만, 사실은 누군가에 떠밀려 사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는 바로 그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혹 우리들도 주님의 안에서의 분명한 목표도 없이, 그저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 살아가는 사람'은 아닙니까 ?
셋째, 이 사람은 '아름다운 문 곁에 그저 앉아만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미문(美門)은 성전을 향하는 가장 중요한 문이었습니다.
비상구나 쪽문이 아니라 중심 되는 입구였습니다.
더구나 이 문은 美門이라는 별명답게, 아주 아름답고 예쁜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아무리 문이 아름다워도 門은 門일 뿐입니다.
門이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그 문을 통해 목적지로 가는 것입니다.
본문의 미문(美門) 역시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최종 목적지는 그 문(美門)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본문의 앉은뱅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성전에 들어가는 문 앞에 앉았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핸디캡을 가진 이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 다른 사람만 의지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처럼 사람만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무리 아름다운 문 곁에 있을지라도,
더 큰 아름다움이 있는 문안까지는 결코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익숙한 교회생활로, 아름다운 성전 문을 수없이 드나들긴 하지만,
좀처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이루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과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
그런데 여러분 ! 더욱 더 우리를 슬프게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해, 다른 이에 의해 움직이고,
결국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구걸만 하던 이 사람이, 가장 얻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나요 ?
그렇습니다. 한 푼이었습니다. 한 푼의 돈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앉은뱅이가 구했던 한 푼의 그 돈이, 그의 인생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해 줍니까 ?!
그에게 참 행복을 줍니까 ?!
아니지요. 아무리 많은 재물을 얻어도, 그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걷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가장 큰 문제를, 결코 해결해 주지 못하는 그 한 푼 !
자신의 인생을 전혀 변화시킬 수 없는 그 한 푼 !
결코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그 한 푼을, 그저 매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이 앉은뱅이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참 비슷합니다.
우리들이,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얻으려는 성공, 명예, 재물 등이
어쩌면, 오늘 앉은뱅이가 구했던 '그 한 푼'일지도 모릅니다.
시간과 노력을 바치고 능력과 열정을 다 쏟아 얻으려고 하는 그것들이,
어쩌면 '앉은뱅이의 구걸'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것이, 우리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또한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한 푼' 때문에 귀한 인생을 허비하는 미련한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 우리의 삶이 한 푼을 구걸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앉은뱅이에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앉은뱅이에게 외칩니다.
본문6절,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金や銀はないが, 持っているものをあげよう.
ナザレ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立ち上がり, 步きなさい.)
예 !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그에게, 남에게 떠밀려 살아왔던 그에게,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만 있던 그에게, 더구나 의미 없는 한 푼만을 구하던 그에게,
참으로 놀라운 새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 그렇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참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은 나사렛 예수의 그 이름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던 그 때(하나님의 때)가 되었던 것이지요.
더구나 여러분 !
그가 이제까지의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받아 들였을 때,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 ! 나면서부터 가졌던 문제,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함 받았습니다.
남에게 떠밀려 움직이던 그가, 이젠 자기 발로 걷고 뛰게 되었습니다.
문 곁에만 앉아 있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 발로 하나님 성전,
그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우리가 마음 속에 받아들일 때,
그 이름을 우리가 부를 때,
우리도 우리들이 가진 모든 핸디캡과 장애를 고침 받아,
기뻐 뛰며 춤추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가, 우선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우리를 통해서,
우리의 가정에, 부모와 남편과 아내와 자녀에게,
그리고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
오늘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우리가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 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앉은뱅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즉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분들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베드로와 요한의 행적을 더듬어 보면,
그들은 참 철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급하고 충동적이며 감정적이었습니다.
도무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
그렇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첫 열매는 바로 사랑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변화되기 전, 그들에게 앉은뱅이는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이 된 그들에게, 앉은뱅이는 사랑과 섬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전부터 앉은뱅이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하고 섬겨야 할 그 사람이 보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온전히 만난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면,
예수님의 눈이 머무는 곳에 우리 눈이 머물고, 예수님 발이 머무는 곳에 우리 발이 머뭅니다.
여러분 ! 지금 우리 가정에, 우리 일터에 있는 앉은뱅이가 보이십니까 ?
또한 지금 이 자리에, 나의 사랑과 섬김이 필요한 지체가 보이십니까 ?
그런 사람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닐 것이고,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여러분 ! 이 시간,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심장(心臟)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心臟)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둘째, 우리는 세상을(섬길 이웃을) 향해 '우리를 보라 !'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환한 빛을 내면서,
결코 요동하지 않는 방향이 되고,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 본래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했었고, 또 잘못된 욕망을 따랐었습니다.
그들 역시 자기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를 보라 !'고 담대히 말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그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담대히 외칩니다.
"약했었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는 강해진, 앉은뱅이였지만 이제는 굳게 선,
졸장부였지만 지금은 대장부가 된, 육에 속했었지만 이제는 영에 속한, 우리를 보라 !"
여러분 ! 우리도 우리의 가족을 향해, 섬길 지체들 향해 이렇게 외칩시다.
더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단순히 보라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 역시 앉은뱅이를 주목했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주목하다는 원문 헬라어는 '아테니사스'입니다.
그 뜻은 '진지하고 강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바라보았다'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연약한 사람들에게, '우리를 보라'고만 외치지 말고,
'아테니사스' 즉, 진지하고 강렬한 사랑을 가지고, 계속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사명이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본향교회와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바라보는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춤추게 될 줄 믿습니다.
셋째,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합니다.
본문6절,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金や銀はないが, 持っているものをあげよう.
ナザレ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立ち上がり, 步きなさい.)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가 가진 물질이나 지식 또는 신분이, 상처받고 앉아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은 다릅니다.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베드로는 어쩌면, 앉은뱅이에게 자기의 과거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내 과거를 아십니까 ? 나의 실패와 좌절과 절망을 아시냐 말입니다.
나의 고독과 외로움을 아십니까 ?
나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끝나버린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을 변화시킨 주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어떤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당신을 반드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라 할지라도,
남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미문 앞의 초라한 인생일지라도 말입니다."
"당신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내 삶을 변화시킨 그 분이, 바로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실 분입니다.
그 분을 나는 당신에게 증거합니다.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의 인생을 참으로 변화시키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 아무리 심한 상처와 고통을 가진 사람도, 예수님은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 본향교회는 바로 그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가지고,
그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주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만약에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본문6절,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金や銀はないが, 持っているものをあげよう.
ナザレ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立ち上がり, 步きなさい.)는 말로만 그쳤다면,
아마도 본문의 앉은뱅이는 결코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선포한 두 제자가,
곧 이어 행한 한 가지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7절,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そして, 右手を取って彼を立ち上がらせた)
그렇습니다. 여러분 !
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법을 압니까 ?!
아니,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날 용기가 있습니까 ?
아니요. 그럴 용기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으니까요 ?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그의 오른손을 꽉 붙잡습니다. 그리고 일으켜 세워줍니다.
그랬더니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
본문7-8절,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そして, 右手を取って彼を立ち上がらせた. すると, たちまち,
その男は足やくるぶしがしっかりして, 躍り上がって立ち, 步きだした.
そして, 步き回ったり躍ったりして神を贊美し, 二人と一緖に境內に入って行った.)
그렇습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더니, 그 순간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겼습니다.
예 !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겨, 그 힘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손을 잡아 일으켜 주니까,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겼고,
그러니까 걸었고, 춤도 추었고, 더구나
드디어 교회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오늘날 교회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말로만, 기도하세요. 말로만, 힘내세요. 그저 말로만,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세요.
여러분 ! 이것은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 본향교회는, 그리고 우리 본향의 지체들은, 연약한 사람들의 손을 붙잡고,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일어나도록 일으켜 세워주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수많은 말보다, 손을 내밀고,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2:14-17,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앉은뱅이와 같은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이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요한처럼 그 예수님의 이름을 전해야합니다.
교회가 할 일이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하고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일의 선봉장이 되십시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먼저는 우리 가정에, 일터에, 이 땅 일본에 가득 차게 합시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 교회와 우리, 은과 금은 넉넉히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의 이름은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 능력의 이름으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찬미하는 일이 이 땅에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가 가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전합시다.
또한, 전하는데 만 그치지 말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줍시다.
분명, 우리 본향교회에 제2의 베드로, 제2의 요한이 가득해질 것입니다.
또한 그리할 때,
영적, 육적 앉은뱅이의 자리에서 일어나, 기뻐 뛰며 춤추며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는 놀라운 일이, 우리 교회와 이 땅에 넘쳐 날 것입니다.
이 일에 쓰임 받는 아름다운 청지기가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