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019年2월17일, 역대하 26:1-5(主 안에서 형통했던 웃시야는 왜 실패자가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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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말씀을 생각하며, 함께 한 귀한 지체들과 이렇게 고백합시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여 주시고,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가정과 본향교회와 학교와 직장과 일터와 이 東京에 우리를 남겨두신 이유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 우리 ! 이 땅에서 [디도]와 같은 신앙인이 됩시다.
그래서, 세상 욕망을 위해 살아가는 영적(靈的) 그레데와 같은 이곳에서,
문제와 상처를 치유하고, 부족함을 채우는, 신실한 헌신자가 됩시다.
제가 청년학생 때에 신앙 생활하던 교회에, 이(李) 권사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20년 가까이 그 교회를 섬겼고, 그 교회에서 처음 세 분의 권사님이 임직할 때,
그중 한 분에 속할 정도로 교회에서 인정받는 분이었습니다.
이 권사님은 특히 전도와 봉사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主日, 이 권사님이 주일예배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료 권사님들이 심방을 했더니, 이 분이 말하기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더랍니다.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었더니, 좀처럼 말씀하지 않던 그분이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습니다.
몇일 전 새벽예배 때 헌금을 드렸는데, 목사님이 자기 것만 빼놓고 축복기도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목사님이 자신에게만 축복기도를 안 해준 이유는,
자신이 드린 헌금 액이 다른 성도보다 적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동료 권사님들과 목사님, 여러 성도들이 "그것은 오해한 것이라"고 해도,
이 권사님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 이 권사님이 갑자기 쓰러졌고,
결국 신앙을 회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안타까운 이야기를 일본에서 전해 들은 저는, 참 충격이었습니다.
"아 ! 신앙이라는 것이 이렇게 될 수도 있구나 !"
그런데 여러분 ! 이러한 예는, 비단 신앙뿐만이 아닙니다.
잘 하던 직장생활이 이렇게 하루 아침에 파탄이 날 수도 있고,
잘 하던 가정생활, 학교생활, 일본생활이 하루 아침에 이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 이 시간 각자의 마음에 질문해 보십시오.
"나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도, 혹은, 나의 환경이 급박(急迫)하게 변하더라도,
나는 내 믿음을 지킬 수 있는가 ?"
"내 삶이 생각처럼 되지 않고, 경제생활, 가정생활, 학교, 직장생활이 송두리째 흔들려도,
하나님을 향한 내 믿음은 변하지 않을 수 있는가 ?"
"예수님을 따라감으로 인해, 혹 교회 생활로 인해, 내 삶에 큰 손해가 있고,
또 신앙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욕을 당하더라도,
여전히 성도로서, 혹은 사명자로서 흔들림 없는 신앙생활을 이어 갈 수 있는가 ?"
또한, 평안했던 가정생활에 어느 날 갑자기 부부간에 생각의 차이가 깊어지고, 함께 했던 목표가 어긋나고,
부모 및 자녀 혹은 배우자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어긋나도, 나는 가정을 지킬 수 있는가 ?
혹은, 직장생활, 학교생활이 나의 생각과 다르게, 나의 원하던 것과 다르게 움직여도,
나는 여전히 내가 섬기던 직장과 학교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가 ?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베드로전서5:8-9, "근신하라 ! 깨어라 !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
베드로후서1:5-7, 10,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10. .......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와 예배드린다 해서, 우리의 인격이 팍팍 변화되어,
예수님의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힘껏 따라갈 때,
비로소 우리 마음과 얼굴에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찬송가430장(주와 같이 길 가는 것 2절)
어린아이 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하나, 주의 손에 이끌리어 생명 길로 가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예수님과 함께하며, 항상 그 뒤를 따라가,
실족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오늘 본문을 통해,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50년 간을 잘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실족해서 망한, 참으로 끝이 불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남 유다의 열 번째 왕이었던 웃시야입니다.
웃시야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능력’입니다.
역대기서를 보면, 통일 왕국시대의 사울, 다윗, 솔로몬 왕과
분열 왕국시대의 유다의 20명의 왕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왕들은 대략 세 부류로 분류됩니다.
그것은 아주 선한 왕, 선한 왕, 그리고 악한 왕입니다.
다윗과 요시야 정도가 아주 선한 왕이고, 그냥 선한 왕이라고 하면 여호사밧,
그리고 악한 왕에는 아하스나 므낫세 등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할 웃시야는 어디에 포함시켜야 할지가 좀 애매합니다.
왜 그러한가를 지금부터 설명하겠습니다.
그는 16세에 왕위에 올라, 무려 52년 간을 왕위에 있던 사람입니다.
므낫세 왕(55년) 다음으로 유다의 왕들 중에, 왕위에 오래 있었습니다.
더구나 웃시야는 자기 이름 뜻대로, 생애 대부분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유다 왕국을 강하고 부한 나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시야가 선한 왕에 포함되기가 참 어려운 것은,
그의 끝이 참으로 좋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 웃시야 왕의 끝은 과연 얼마나 나빴을까요 ?
더구나 그는 무엇에 걸려 넘어졌을까요 ?
지금부터 그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자 ! 웃시야 왕은, 도대체 무엇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을까요 ?
첫째, 나태(懶怠)와 자만(自慢)에 빠져, 그만 교만(驕慢)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한 가지 묻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모습이 오늘 (이 모습)에 이르게 하기 위해,
언제 가장 간절히 기도를 했었나요 ?
일본에 처음 오실 때였습니까 ? 아니면 대학시험을 치를 때였습니까 ?
아니면 취업활동을 할 때였습니까 ? 아니면 몸이 아팠을 때였습니까 ?
결혼을 앞둘 때였습니까 ? 국가고시나 자격고시를 치를 때였습니까 ?
그렇다면 여러분 ! 혹, 그때의 간절함이 지금 여러분에게 남아 있습니까 ?
그때 그 구했던 것을 받았을 때의 감사와 결심이 아직 지속되고 있습니까 ?
오늘 웃시야 왕이 걸려 넘어진 첫 번째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웃시야는, 처음에는 너무나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범사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행하는 국가 사업마다 잘됐고, 펼치는 정책마다 성공했으며, 이웃 나라와 싸울 때마다 승리했습니다.
그 결과, 웃시야 왕 때의 유다는 그 어느 때보다 태평했습니다.
그토록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블레셋과 암몬을 쳐서 조공을 바치게 했고,
이웃 먼 나라에까지 웃시야 왕의 이름이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농업 기술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성(城)들도 건축하고,
새 무기를 제작해서 명실공히 부하고 강한 유다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성공과 평안의 시간들이 수십 년이나 계속됐습니다.
어떤 믿음의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긴 병(病)에 효자(孝子) 없고, 계속되는 형통(亨通)에 겸손(謙遜)한 자 없다”
그렇습니다. 웃시야 왕은 서서히 자만(自慢)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통과 평안을 주시는 이유가 뭐지요 ?
하나님께서 우리의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안정되게 하시고, 사업가로서 자리를 잡게 하시며,
어느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서게 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세우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지요 ?
신앙생활 잘했으니,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입니까 ?!
아닙니다. 우리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높이신 것입니다.
즉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지친 사람들을 섬기라고 우리를 높이신 것입니다.
역대하26:15절을 보십시오.
“그(웃시야)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하나님께로부터)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그렇습니다. 웃시야가 높아진 것, 그 이름이 멀리 퍼진 것,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그것은 우리도 웃시야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이 정도 살게 되고, 이만큼 높아진 것, 모두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 웃시야는 자신을 높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연약한 이웃을 섬기지도 않았고, 곤란 중에 있는 지체들을 돕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부(富)를 누리기에만 바빴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지금 우리들에게 조금 약간의 안정이 찾아왔습니까 ?
웬만큼 두 발 딛고 설 힘이 생겼습니까 ?
뭔가 조그만 목표를 이루셨습니까 ?
자 ! 그렇다면 이제 새 목표를 세우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새 비전을 세우십시오.
예배와 봉사, 섬김과 선교를 위한 영적 목표를 세우십시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자신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웃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의 꿈이, 나와 내 가족 내 나라에만 국한되기 시작하면,
자칫 우리는 웃시야처럼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아집니다.
그렇습니다. 나만 편하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괜찮고,
그저 누리는 것에만 만족하며 살다 보면, 자칫 자만의 죄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은 좋았으나, 끝은 망가진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웃시야를 보며, 경성하여,
받은 것에 감사하며, 더욱 섬기며 헌신하여,
더욱 귀한 은혜를 이어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웃시야 왕이 걸려 넘어진 또 다른 이유는, 자신 옆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5절,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렇습니다. 웃시야에게는 스가랴라는 참 좋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스가랴는 하나님의 묵시, 즉 하나님의 계시와 뜻을 잘 알고 분별하여,
웃시야 왕을 인도했던 참으로 귀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스가랴가 웃시야 옆에 있는 동안 웃시야는 스가랴의 가르침 따라 하나님을 찾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찾을 동안, 웃시야는 형통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웃시야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의 직분이 너무나 두려웠고,
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기에 영적인 스승 스가랴의 가르침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순탄히 성장하자, 그에게 이런 생각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어 ! 그래 이제부터는 혼자서 할거야 !”
이런 생각에 빠진 웃시야는, 이제 서서히 홀로서기(사실은 하나님 멀리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서서히 선지자, 제사장, 전능자의 자리에 자기를 세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다시 한번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 보시지요.
한 번 자신의 주위를 살펴보세요.
요즘 내가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
그 사람은 나의 신앙생활에, 나의 영적인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
혹 그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까 ?
더구나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 지게 하는, 그런 나쁜 사람은 혹시 아닙니까 ?!
사랑하는 여러분 ! 지금 내 옆에 [누가 있느냐]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들 옆에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는 것은 너무나 큰복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사명 감당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서로에게 용기와 힘과 그리고 좋은 자극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
우리들 곁에 술친구, 오락 친구, 세상 친구, 일 친구만 가득하다면,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될까요 ?
그렇습니다. 그렇게 세상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다가,
아무런 면류관 없는 부끄러운 구원밖에 얻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특히 여러분들은 담임목사인 저와 깊은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로서, 양(羊)인 성도들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이 목자를 필요로 하듯이,
여러분들도 목자인 저와 더욱 깊은 교제를 이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스가랴와 함께 했던 웃시야가 받았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
옛날 선배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목사님이 꼴 보기 싫어진다.”
혹시, 제가 보기 싫은 분 있습니까 ? 영 부담되는 분이 있습니까 ?
그렇다면 그것은 커다란 신앙의 위기입니다. 하나님 은혜가 떨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만약 그와 같은 상황에 빠진 분이 계신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잠시라도 늦춰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체될수록 깊은 수렁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웃시야에겐 스가랴가 옆에 있을 때가 인생의 황금기였습니다.
다윗 역시 나단 선지자가 옆에 있을 때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또한 다니엘 역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은 [신앙 친구들]이 옆에 있을 때였습니다.
바울도 디모데, 실라, 누가가 옆에 있을 때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부디 하나님의 사람을 옆에 두시기 바랍니다.
웃시야의 실패는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 옆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웃시야가 걸려 넘어진 또 다른 이유는, 선(線)을 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 세상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한 복을 주셨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모든 움직이는 생물들도 전부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큼은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이,
우리 인간이 피조물임을 알도록 하시는 표시였고,
우리의 정체성을 알려 주는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오늘날에도, 우리가 넘어서는 안 되는 선(線)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넘으면, 우리는 교만해지고, 우리 자신을 신(神)으로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의 주인공 웃시야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왕들에게 무슨 일이든지 다 허용하셨지만,
절대로 허용하시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전과 예배에 관한 일들었습니다.
성전과 예배에 관한 일들은 오직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만이 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그 권리마저 왕에게 부여했다면, 왕들은 스스로 神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교만에 빠진 웃시야, 더구나 스승을 잃은 웃시야는,
그렇게 하나님이 금하신 성전과 예배에 관한 일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역대하26:16, “그(웃시야)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제사장 아사랴가 왕을 급히 따라가 간곡히 말립니다.
“왕이시여, 절대로 이 일은 왕이 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악한 범죄 행위입니다. 여기서 멈추십시오 !”
제사장의 간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웃시야는 악을 행하고 맙니다.
여러분 ! 그후 어떤 일이 일어나고 말았을까요 ?
본문19절,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그렇습니다. 선(線)을 넘고 만 웃시야는 나병(한센병, 문둥병) 환자가 되고 말았고,
결국 웃시야는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별궁에 갇혀 사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별궁에서 인생을 마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가 넘어서는 안 될 선(線)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 선(線)중에는 主日 성수의 線이 있고, 십의 일조의 線이 있으며,
또 우리 몸(體)의 線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몸을 나의 즐거움을 위해, 나의 자랑을 위해,
나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일도 마찬가지고, 십의 일조와 헌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웃시야가 말년에 넘어져 실족하고 말았던 것은,
이렇듯 하나님이 금(禁)하신 선(線)을 넘어가고 말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중에 우리와 꽤 오랫동안 함께 예배드리고 교제하고 헌신했던 지체들이,
어느 날 소리 소문없이 우리의 눈 앞에서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 한마디 없이, 그저 홀연히 공동체를 떠납니다.
그러한 분들을 가끔씩 보며, 먼저는 섭섭하기도 하지만,
다른 하나는 ‘끝 모습이 아름다워야 할텐데’라는 아쉬움이 참으로 마음 속 깊이 남겨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은 책 한 권, 또는 A4지 한 장의 분량으로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단 한 줄로 기억합니다.
성도여러분 !
우리 ! 처음보다 나중이 더 멋진 사람이 되어, 서로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는 귀한 신앙인들이 됩시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처음도 중요하지만, 끝이 더더욱 아름다워야 합니다.
잘 가던 믿음의 길, 신앙의 길에서, 결코 실족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
첫째, 작은 형통에 자만해 하지 말고, 항상 겸손을 잃지 않는 우리모두가 됩시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기이한 도우심을 통해, 현재의 복들을 주신 것은,
받은 은혜로 이웃과 교회를 섬기라 한 것을 결코 잊지맙시다.
둘째, 내 옆자리를 세상 욕망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속사람들로 채우지 말고,
우리의 옆자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채웁시다.\
셋째, 어떤 상황에서도 넘어서는 안 될 선(線)은 절대로 넘지 맙시다.
특히, 主日을 내 것으로 삼지 맙시다.
하나님의 것인 십의 일조를 내 것으로 삼지 맙시다.
또한, 내 몸은 내 것이 아님을 철저히 기억합시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처음보다 나중이 더욱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은혜에 은혜를 더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
처음보다 나중이 더욱 아름다운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