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020년7월5일, 누가복음 17:11-19(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맥추감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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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한 귀한 지체들과 이렇게 고백합시다.
성도님 !
사람의 몸이 서로 떼려야(뗄레야)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有機的 關係)인 것처럼,
교회는 유기적 공동체(有機的 共同體)입니다.
성도(聖徒)는 연약한 성도(聖徒), 다친 성도를 온전하게 해야 합니다.
성도(聖徒)는 다른 성도(聖徒)가 봉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 성도들이 속한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일본에서 가장 많이 출하(出荷)되는
대표적인 두 과일(果物)이 무엇과 무엇인지 아십니까 ?!
예 ! 귤(みかん)과 사과(りんご)입니다.
2017년 작황조사(作況調査, さっきょうちょうさ)에 따르면,
출하량(出荷量, しゅっかりょう) 1위는 귤(みかん, 66만1300톤)이었고,
2위는 사과(りんご, 65만5800톤)였는데, 3위인 배(なし, 22만6600톤)보다 약 3배가 많았습니다.
귤(みかん)의 대표적인 산지(産地)는 1위 愛媛県 2위 和歌山県 3위 静岡県이고,
사과(りんご)는 1위 青森県 2위 長野県인데,
특히 靑森縣은 2위 長野県보다 3배 이상 사과를 출하하는 대표적인 사과 산지(産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1991년(平成3年) 9월28일 새벽, 사과가 한창 익어가고 있을 때,
초대형 태풍19호가 아오모리현(靑森縣)을 덮쳤습니다.
초속 53.9m(시속 194km)의 무지막지(無知莫知)한 바람이,
추수하기 직전인 사과나무들을 사정없이 뒤흔들었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강했던지, 수많은 전봇대가 다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풍작을 눈앞에 두던 과수원 농부들에게, 큰 재앙이 내린 것입니다.
그 태풍으로, 대부분의 사과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과 농가(農家)들은 하늘을 원망하며 낙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망연자실하던 그때, 靑森縣藤崎町의 한 농부가,
아직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과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어차피 태풍에 떨어진 사과를 보고 원망을 해도, 그 사과를 시장에 내다 팔 수도 없으니,
떨어진 사과를 보고 원망하기보다, 도리어 매달린 사과를 보며 감사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감사하는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대학 입시, 취업 경쟁에 나서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시속 194km의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은 사과,
즉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사과(絶對に落ちないリンゴ)]를 소개하여,
일본 곳곳에 그 사과를 알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
물론입니다. 일본 각지의 사람들이 그 광고를 보고,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사과]를 앞다투어 주문했고,
그로 인해,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사과]의 가격이 급등하여,
그 농부는 그해 큰 이익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과수원은 지금도 [落ちないリンゴ]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http://www.ochinairingo.com/commpany.html
사랑하는 여러분 !
아무리 비참한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기적의 문은 열립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패하고 고생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本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애가3:32-33.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主の慈しみは深く ....... 人の子らを苦しめ悩ますことがあっても/それが御心なのではない。)
우리 본향성도들의 지난22년의 삶을 돌아 볼 때,
‘잘되는 사람’과 ‘잘 안 되는 사람’은 대개, 한 가지에서 차이가 납니다.
여러분 ! 그것이 무엇일까요 ?
그렇습니다. 그것은 [감사할 줄 아느냐, 감사할 줄 모르느냐]입니다.
특히 우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오늘 이 시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과 입에서 감사가 사라지면,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내리막길 인생, 잘 안 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우리의 마음과 입에 감사가 자주 나타나면,
우리의 삶은 점점 더 풍요로워지고, 우리의 지경 또한 점점 넓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접경지역은 조용한 날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지방 사람들이 서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간에 크고 작은 싸움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접경지역(接境地域)의 마을은, 서서히 사람들이 떠나가,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모두가 싫어하는 그 접경지역 마을에 병든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바로 한센병(문둥병) 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병 때문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쫓겨나,
가족을 뒤로하고 홀로 도망해 온 것이었습니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그곳에서의 그들의 삶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답답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믿기 어려운 소문이 그들에게 들려왔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그분은 하늘나라의 말씀을 전하시며,
병들고 아파 고통 하는 사람들을 큰사랑과 능력으로 고쳐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분은 자신들과 같은 병에 걸렸던 사람을 고치셨으며,
심지어 죽었던 사람도 놀라운 능력으로 살리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이,
지금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자신들이 머무는 그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열 명의 한센병 환자가 예수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일행을 보고, 멀리 서서 소리 높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본문13절. 예수 선생님이여 !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イエスさま、先生、どうか、わたしたちを憐れんでください)
그들의 간절한 외침은 예수님 일행을 멈춰 서게 했습니다.
그 후 그들의 소원을 아시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14절.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祭司たちのところに行って、体を見せなさい)
구약 율법에 의하면,
한센병에서 치유된 사람은 반드시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병으로부터 완치되었음을 증명해 줄 때,
비로소 그 사람은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은,
그 병이 치료되었음을 선포하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열 명의 병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주저 없이 제사장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믿고 출발한 그들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제사장을 향해 가던 도중, 놀랍게도 한센병으로부터 완전한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
고름이 흐르고 피가 줄줄 흐르던 흉측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희고 깨끗한 얼굴과 피부가 되었습니다.
열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너무나 놀랍고 기쁜 일이어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그리고 그중 아홉 사람이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제사장에게서 확인을 받고 가족들에게 돌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사마리아 출신의 사람,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가던 걸음을 돌이켜, 예수님이 계신 곳을 향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15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その中の一人は、自分がいやされたのを知って、大声で神を賛美しながら戻って来た。)
그 사람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 정말 고맙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본문16절.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헬라어, 유카리스테오=감사하다) 그는 사마리아인이라
(そして、イエス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感謝した。この人はサマリア人だった。)
이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17절.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清くされたのは十人ではなかったか。ほかの九人はどこにいるのか。)
본문18절.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この外国人のほかに、神を賛美するために戻って来た者はいないのか。)
이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
두 주일 전,
데살로니가전서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どんなことにも感謝しなさい。
これこそ、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神があなたがた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です。)는 말씀을 전하며,
고무다리 선교사 쿠퍼를 소개했었는데, 지난 두 주간 많이 감사하셨습니까 ?!
지난 6월29일 월요일, 한국 언론을 통해
[스스로 교단(敎壇)을 떠나는 명예퇴직 교사(敎師)가 증가한다]는 뉴스가 들려왔습니다.
스스로 교사직을 버리는 이유는,
[학생 생활지도 붕괴]와 [학부모, 학생들의 교권침해(敎權侵害)]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은,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 학생들은 선생님이 주는 교훈과 권면을 잔소리로 취급합니다.
학생의 인권은 점점 강조되지만, 도리어 선생님의 교권(敎權)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통해 너무나 많이 짓밟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왜 현대인들에게서 감사가 사라져 갈까요 ?
그것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너무나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잘 되는 모든 일이 자기 탓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그 정도 대접받을만해서, 자기가 그동안 열심히 했기에 .......
헨리 와드 비쳐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자신이 마땅히 가져야 할 만큼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코 감사할 줄 모른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두 주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감사는 우리들이 해야 할 가장 귀중한 것 중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감사가 없으면, 우리는 온전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밀런에서 태어난 토머스 앨바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년2월11일-1931년10월18일)은
무선 전신기, 활동사진기, 축음기, 백열전구 외에도 수많은 기계와 발명품을 발명하여,
인류에 크게 공헌한 대발명 가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발명하기 전, 벌써 젊은 날에 청각장애인(귀머거리)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행에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인류의 삶에 크게 공헌한 위대한 발명가가 되었습니다.
에디슨은 고백합니다.
“참으로 귀머거리가 된 것을 감사하는 것은,
연구에 몰두할 때, 어떤 잡음도 들리지 않아,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모든 것을 감사히 받으려는 사람에게는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고,
또한 그런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또,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감사를 표현하기를 원하십니다.
가족 간에, 성도 간에, 친구 간에, 적극적으로 감사를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이번 한 주간, 하나님께는 물론,
서로에게도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자 ! 그렇다면 여러분 ! 감사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
그렇습니다.
당연히 감사해야 할 것을 감사한 것뿐인데,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본문19절.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立ち上がって、行きなさい。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감사한 그에게 영원한 천국, 아름다운 하늘나라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렇듯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더 감사할 일이 생기는 줄로 믿습니다.
따라 합시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더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감사하느냐 감사하지 않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약 10년 전에 소개했던,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1950년대 초, 한국 전라남도의 한 마을에서 예쁜 여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최명숙이었습니다.
귀엽고 총명한 명숙이는 주위의 사랑을 받으며 순조롭게 자라나,
어느덧 세 살이 되어서는 뛰어다닐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명숙이에게 큰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세 살이 지나, 네 살, 다섯 살, 아니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어도,
키는 물론 몸도 전혀 자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구루병(佝僂病)이란 진단이 나왔습니다.
구루병이란, 뼈의 발육이 좋지 못하여 척추가 꼬부라지는 병으로서,
비타민D가 부족할 때 나타나는 병이라고 합니다.
특히 이 구루병은 영아기(嬰児期)나 소아기(小児期) 때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당시 명숙이의 키가 70cm였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70cm의 키와 세 살 된 아이의 손과 발 몸은,
사춘기를 지나, 스무 살이 넘어도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 큰 키가 70㎝밖에 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창피하고 얼마나 상처가 많았겠습니까 ?!
이러한 명숙이었지만,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어릴 때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특별한 외모 때문에, 예배드리러 가는 것 자체도, 엄청난 고통이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몸은 세 살인데, 얼굴은 그렇지 않으니,
남들이 볼 때, 얼마나 우스꽝스러웠겠습니까 !!!
그래서 청소년기 시절에는, 자신을 그토록 저주받은 모습으로 태어나게 한
부모님과 하나님을 한없이 원망하기도 했다 합니다.
이런 명숙이가 스물여덟 살 되던 어느 날,
찬송가 305(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찬양하던 중,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눈과 마음에서 흘러내렸고,
비로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명숙씨는 원망 가운데 살았던 자신의 삶을 버리고,
대신 감사의 삶, 감사를 고백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1985년, 그녀의 나이 33살 때부터 장애인 선교를 시작했고,
1991년 신학교를 졸업하여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전라북도 군산에 베데스다 교회를 세우고,
지금까지 장애인 섬김 사역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최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 참 위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로 인해, 많은 사람에게 도리어 희망을 품게 해주었지요.”
“저는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를 잊은 적이 없어요 !”
“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깨달으면 감사가 보입니다.”
최 목사님의 신앙철학은 ‘무조건 감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최 목사님의 ‘무조건 감사’신앙은,
어느 날 건강한 한 남성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었고,
드디어 최 목사님은 그 남성으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았습니다.
프러포즈를 한 분은 다름 아닌, 최 목사님의 사역을 도왔던, 황반석 전도사님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프러포즈했다고 합니다.
“최 목사님의 모든 조건에 항상 감사하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목사님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여 두 분은 2004년 결혼을 했습니다.
이것이 결혼식 사진입니다.
http://cafe.daum.net/samarian/74ZJ/50?q=%EB%B2%A0%EB%8D%B0%EC%8A%A4%EB%8B%A4+%EC%B5%9C%EB%AA%85%EC%88%99&re=1
최 목사님이 쓴, 한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축구의 뜨거운 열기가 일어날 때는, 스포츠에는 문외한(門外漢)인 나도
가끔은 기쁜 마음으로 열렬하게 박수를 보냅니다.
열심히 뛰는 선수들의 모습, 골키퍼들이 들어오는 공을 받아 내거나 차내는 모습들이 통쾌하지만,
때로는 놓쳤을 때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볼 때, 공놀이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세 살 적에 구루병으로 인해 찾아온 팔, 다리 왜소증(矮小症)은,
멀리 있는 것이나 높은 곳에 손이 미치지 못하는 외에도,
손 자체가 작으므로, 공을 가지고 놀 때는 늘 놓치기를 잘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체적인 약점(弱點)은, 공이나 물건뿐만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들을 잡지 못하고 놓쳐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젊은 날의 꿈도, 낭만도, 사랑도 잡지 못하고 놓치기만 했던,
그래서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한(恨)은 그대로 제 가슴에 앙금으로 쌓였습니다.
무더운 여름철에 여자들의 가볍고 편한 차림이 부러웠고,
아무리 긴 머리라도 건강하고 긴 팔로 살짝 비틀어서 정수리까지 올려 핀으로 고정하면
목덜미가 시원하게 정리되었지만,
제 경우에는 아무리 덥고 답답해도 머리를 시원스럽게 틀어 올리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한여름에도 한복이나 긴치마로 발끝까지 길게 가리고,
그래도 발이 보일까 봐 양말을 신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휠체어에 오르고 내리지만,
힘든 것을 느끼기보다는 자칫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실수하게 되지는 않을지
늘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궁금해집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과연) 그 건강함과 자유로움을 (감사로) 느끼고 있는지.......
그러나, 저의 삶에 하늘이 열리고, 불편했던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며,
모든 아픔과 절망으로부터 해방함을 입었던 그때부터,
사랑하는 소중한 이들을, 상처받은 이들을,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졌습니다.
그러나, 제 육신의 작은 품과 팔로는 그들을 품어주기에는 역부족이기에,
저는 마음으로 그들을 안아주면서, 짓밟히고 억눌린 이들을,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와 격려와 칭찬으로 안아주는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결혼하여 보니, 비장애인 남편 역시,
겉보기에는 내가 그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에게도 안길 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몸이 건강한 그도, 따뜻하고 포근한 품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해와 위로와 사랑과 격려의 품이 말입니다.
우리가 비록 신체적으로 열악한 여건일지라도,
신체적인 품보다 더 큰 품으로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을, 그리고 온 우주를 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큰 사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요 ?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무리 비참한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기적의 문은 열립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실패하고 고생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本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애가3:32-33.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主の慈しみは深く ....... 人の子らを苦しめ悩ますことがあっても/それが御心なのではない。)
그러므로 여러분 !
감사할 수 없는 것, 감사하기 어려운 것도 감사합시다.
그리하여, 靑森縣藤崎町의 사과 농부처럼, 곤란 중에 도리어 큰 은혜를 누립시다.
가족들끼리, 성도들끼리, 친구들끼리도 적극적으로 감사를 표현합시다.
감사를 생활화하여 멋진 프러포즈도 받고, 결혼도 하고, 자녀의 복도 받읍시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처럼, 주님께 감사를 드려 영원한 생명도 누립시다.
감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