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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日説教原稿

2023 2024년4월21일, 요한복음 6:22-27 (나를 찾는 것은,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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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者 박성철
コメント 0件 照会 1,353回 日時 24-04-21 22:24

本文

  지난 주일 말씀을 생각하며, 함께 한 지체들과 이렇게 고백합시다.


  성도님 ! 가족과 이웃, 그리고 본향 성도와 대화하는 우리가 됩시다.

  성도님 !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인자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다정하고 편안한 대화부터 시작해 봅시다.

  성령 하나님의 감동, 성경 읽기, 설교 등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합시다.


  여러분 ! 하나님과의 대화를 위해, 지난 주간 성경 읽어보셨습니까 ?!

  성경을 읽은 분들에게 묻습니다.

  성경을 읽는 동안 어떠하셨습니까 ?!

  하나님의 뜻이 두 눈에 보이고, 가끔 성령님의 은혜도 내리던가요 ?!

  예 ! 몇몇 성도들은 이런 은혜를 체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절대로 교만해지지 마십시오.


  또한, 몇몇 성도들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선 어렵고, 그러다 보니 지루하고, 그러다 보니 졸리지 않던가요 ?! 

  예 !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 마음의 밭이, 아직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인내하면서 꾸준히 성경을 읽으면, 분명 성령님 은혜 누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은혜 가운데 성경을 읽다 보면,

  처음에는 위로와 용기를 많이 얻습니다.

  성경은 위로의 성령님이 기록하신 것이니까요 !!!

  그런데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말씀을 통해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성경 말씀이, 우리의 속마음을 그대로 들춰내서,

  마치 우리의 마음이 벌거벗겨진 듯한 느낌이 들게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히브리서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神のことばは生きていて、力があり、両刃の剣よりも鋭く、

      たましいと霊、関節と骨髄を分けるまでに刺し貫き、

      心の思いやはかりごとを見分けることができます。)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神の御前にあらわでない被造物はありません。神の目にはすべてが裸であり、

      さらけ出されています。この神に対して、私たちは申し開きをするのです。)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검보다도 예리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벌거벗겨진 것 같이 드러나게도 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 대표적인 예(例)가 되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을 설명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열심히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의 앞뒤를 뚝 떼어놓고, 본문의 내용만을 본다면,

  이 사람들은 참 바람직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평생 예수님을 위해 살며, 그 은혜를 갚아야만 했을 사람들이,

  아무런 감사의 말도 없이, 예수님을 떠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나병 환자 중 아홉 명이 그랬고,

  베데스다 연못에 있다가 고침을 받았던 38년 된 병자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들은, 예수님을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배까지 동원해서, 갈릴리 호수의 이쪽저쪽을 살펴보았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가 해서요.

  그러다가, 가버나움에 계시지 않을까 해서, 그쪽을 향해 나아갑니다.

  본문24절.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群衆は、イエスも弟子たちもそこにいないことを知ると、自分たちも

  それらの小舟に乗り込んで、イエスを捜がしにカペナウムに向かった。)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도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간절히 소망하기를 축원합니다.


  배를 타고 가버나움에 도착한 사람들은, 마침내 그곳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25절. 랍비여 !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先生、いつここにおいでになったのですか。)

  이런 뜻입니다.

 “선생님, 우리가 선생님을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세요 ?!

  그러나 이렇게 만나니 너무 좋습니다. 언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


  그런데 여러분 ! 본문을 보면, 이 장면 다음이 조금 이상합니다.

  항상 자상하시던 예수님이, 평소와는 달리 매우 냉정하십니다.

  그리고는 찾아온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26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捜しているのは、しるしを見たからではなく、

  パンを食べて満腹したからです。)


  본향성도여러분 !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 헤매던 바로 전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예 ! 예수님이 갈릴리의 한 넓은 들에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5천 명을 포함해,

  약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식사를 해결하셨습니다.

  더구나 먹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었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26절 말씀의 뜻은 이것입니다.

 [내가 행한 표적을 본 후, 나를 그리스도로 믿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를 찾아왔구나 !]


  그렇습니다. 여러분 !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마음을, 벌거벗겨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 찾아다니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인가요 ?!

  오늘 본문 당시, 갈릴리 지역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당시 가장 큰 잔치 중 하나였던 혼인 잔치에서,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만 보더라도, 경제 사정이 참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참고> 가나의 혼인 잔치(요한복음 2장)


  더구나 당시 갈릴리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수확의 25∼33%를

  세금으로 빼앗겼으니, 분명 먹고 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럴 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장정만 5천 명

 (어린이와 여인들까지 합하면, 약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식사를 해결했으니,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 왕으로 세우려 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요즘도 세계 각국이 먹고사는(경제)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대통령이나 수상으로 뽑지 않습니까 ?!

  아마도, 예수님을 찾아,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면, 적어도 굶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적용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살다 보니, 스트레스받는 일 많고,

  그렇다고 가족이나 친구가 그 스트레스를 해결해 주지도 않고,

  그래서 교회에나 나가 위로받고, 하나님께 기도해

  소원성취까지 하면 더 좋고, 교회에나 다녀 볼까.

  그래서, 예수님 한 번 믿어 보기로, 교회에 다녀 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매우 차갑게 대하셨습니다.

  여러분 ! 예수님은 약하고 불쌍한 그들을, 왜 차갑게 대하셨을까요 ?!


  묻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몰랐을까요 ?!

  아니오 ! 예수님도 가난의 설움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30년 가까이 가난한 목수로 사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배도 고파보셨고,

  가족의 굶주림으로 인한 마음의 아픔도 경험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아신다면,

  찾아온 사람들에게 좀 더 자상하셔야 했지 않았을까요 ?!

  도대체 예수님은, 왜 그들을 그렇게 차갑게 대하셨을까요 ?!

  오늘 본문에 그 답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본문27절.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なくなってしまう食べ物のためではなく、いつまでもなくならない、

  永遠のいのちに至る食べ物のために働きなさい。)


  그렇습니다. 여러분 !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그들을 차갑게 대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일들은 전부 무시하라]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일과 노동은,

  어떠한 것이라도 신성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노동은 에덴에 있던 아담에게도 주어진 몫이었습니다.


  창세기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

「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

  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예수님 자신도 30년 가까이, 가족을 위해 목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것은, 노동(일)이 아니라,

  영혼은 소홀히 여기면서, 육체에만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 !

  그저 먹고 사는 것과 눈앞 세상의 일에만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뜻과 영원한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 !

  먹기 위해 사는 인생, 인생의 대부분을,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는 그런 비참한 삶을 살지 맙시다.


  지금도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나그네처럼 왔다가,

  어느 날 홀연히 세상을 떠납니다.

  본향성도여러분 !

  그들 중에 삶다운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

  예 ! 썩을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소중히 여긴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그랬고, 바울과 도마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일생을 가난한 사람으로 살았지만,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돌보았던 마더 테레사는,

  사실은 가장 부유하게 산 사람이었고,

  슈바이처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열악한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을 섬기며,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 모든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

  예 ! 훌륭하게,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았던 것 말고도,

  이 사람들 모두는,

  물질에 대해서 어떤 부족함도 느끼지 못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시시때때로 채워 주셨으니까요 !!!

  더구나 그들은 많든 적든, 항상 만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았으니까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태복음 6:31-33절의 말씀을 듣고 또 듣습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31.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何を食べようか、何を飲もうか、

      何を着ようかと言って、心配しなくてよいのです。)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異邦人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です。あなたがたにこれらの

      ものすべてが必要であることは、あなたがたの天の父が知っておられます。)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まず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なさい。

      そうすれば、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それに加えて与えられます。)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이 말씀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이 말씀대로 사는 신앙인은 얼마나 될까요 ?!

  이 말씀을 실제로 체험한 신앙인은 또 얼마나 될까요 ?!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본문27절.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なくなってしまう食べ物のためではなく、いつまでもなくならない、

  永遠のいのちに至る食べ物のために働きなさい。)


  사랑하는 여러분 ! 이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새깁시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의 손과 발에 이 말씀이 물들게 합시다.


  자 ! 우리 한번 외쳐봅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자

 (なくなってしまう食べ物のためではなく、いつまでもなくならない、

  永遠のいのちに至る食べ物のために働こう。)]


  사랑하는 여러분 !

  참된 기독교 신앙은, 많이 가져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얼마를 가지든지(혹은 받았든지)

  그것을 [충분하게(自足)]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

  많이 가지고, 전부 가져야 행복하다는 유혹에 절대 빠지지 맙시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적어도, 육체를 위해 일하는 것만큼,

  영혼을 위해서도 예수님을 열심히 찾읍시다.

  때로는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야곱처럼,

  우리도 기도로 하나님을 붙잡읍시다.


  괴테의 [파우스트]라는 작품을 간단히 소개하며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괴테의「파우스트」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습니다.


  주인공인 파우스트 박사가 사탄과 흥정을 합니다.

  흥정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탄은 앞으로 24년 동안 파우스트에게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고,

  그 24년이 지난 이후에는 사탄이 파우스트의 생명을 거두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과 파우스트가 맺은 계약의 내용입니다.

  사탄의 힘을 빌린 파우스트는, 24년 동안 온갖 명예와 부와 권력을 누리며 삽니다.

  그런데 시간이 그렇게 짧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 ! 24년이 쏜살같이 지나갔습니다.

  드디어 24년이 되던 날 밤,

  사탄이 자신의 졸개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명령합니다.

 "약속대로 파우스트의 생명을 가져오라 !"

  사탄의 졸개 메피스토펠레스가 와서 파우스트에게 말합니다.

 "오늘 밤 12시에서 1시 사이에 그대의 생명을 거두어 가겠다."

 

  이제 파우스트는, 이 세상의 모든 삶을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긴박한 상황을, 파우스트가 사는 마을 사람들이 느끼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이 파우스트의 집 앞으로 몰려왔는데,

  집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세상에 있는 뱀들이 모두 모여서, 똬리를 틀면서,

  서로 얽히고설켜서 울부짖는 소리와도 같았습니다.

  더구나 그 소리는 밤 12시가 넘어 절정에 이르렀고,

  마침내 새벽 1시가 되었습니다.

  순간, 집 안에서 파우스트의 커다란 비명이 들려왔습니다.

 "사람 살려 ! 사람 좀 살려 주시오 !"


  여러분 !

  괴테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세상 사람들은 24년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24년은 명예와 부와 권력과 쾌락을 누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24년이 지나면, 수많은 뱀들이 와서,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가져갑니다.

  그때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사람 살려 ! 사람 좀 살려 주시오 !"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는 파우스트와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즉, 부귀와 영화, 명예와 권력, 쾌락을 추구하는 삶 말입니다.

  또한, 먹고 사는 문제와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신앙 생활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본문27절.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なくなってしまう食べ物のためではなく、いつまでもなくならない、

  永遠のいのちに至る食べ物のために働きなさい。)

  아멘 !


  자 ! 그렇다면, 여러분 !

  예수님의 간절한 말씀에 예수님을 찾아온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

  아닙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더구나 그뿐이 아닙니다.

  이미 제자의 자리까지 올랐던 많은 무리들도, 그들과 함께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요한복음6:66.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こういうわけで、弟子たちのうちの多くの者が離れ去り、

  もはやイエスとともに歩もうとはしなくなった。)


  그러자 예수님께서 남은 12제자에게 묻습니다.

  요한복음6:67.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あなたがたも離はなれて行いきたいのですか)

  여러분 !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이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


  이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요한복음6:68.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主よ、私たちはだれのところに行けるでしょうか。

  あなたは、永遠のいのちのことばを持っておられます。)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베드로의 대답의, 일평생 우리의 대답이 되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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