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022년12월18일, 시편 119:103-105(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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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의 메시지를 잠시 돌아보며, 지체들과 함께 고백해 봅시다.
성도님 ! 대강절(待降節)은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절기입니다.
깊이 파인 [신앙적 무관심]의 골짜기를 메우면서, 대강절을 보냅시다.
산(山)과 같이 높고 교만한 마음을 낮추면서, 올 대강절을 보냅시다.
꼬이고 비뚤어진 것들을 풀고 곧게 펴면서, 올 대강절을 보냅시다.
용서하지 못하는 험한 마음을 평탄하게 하면서, 올 대강절을 보냅시다.
여러분 ! 일본에 개혁교회(プロテスタント教会) 선교사가 처음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163년 전인 1859년입니다.
<참고> 카톨릭교회 선교사가 일본에 처음 들어온 것은 1549년입니다.
(프란시스코 자비엘)
1859년 5월, 미국의 존 리긴스(J. Liggins)를 시작으로, 6월, 채닝 윌리엄스(C. M. Williams),
그리고 10월, 제임스 헵번(J. C. Hepburn)이
개신교(プロテスタント教会) 선교사로 일본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일본인을 향한 선교(宣敎)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일본선교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헵번은 横浜 成仏寺(じょうぶつじ)에 머물면서, 강 건너편의
宗興寺(そうこうじ)에 진료소(診療所)를 설치하고, 의료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제임스 헵번의 전문 분야는 [뇌외과(脳外科)]였는데,
헵번은 뇌수종(脳水腫) 수술은 물론 백내장(白內障) 수술, 등창(背中のおでき切開) 수술,
치질(痔疾) 수술 등으로 많은 일본 분들을 아픔에서 건져냈습니다.
더구나 헵번은 일본인들의 병(病)만 고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인재들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근대의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렇습니다.
헵번 선교사는 일본 근대의학(近代醫學)의 기초를 쌓은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에 横浜 주민들을 중심으로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마음을 모아,
宗興寺(そうこうじ) 경내(境內)에 헵번의 공적비를 세웠습니다.
절(寺) 안에 기독교 선교사의 기념비가 세워진 것입니다.
한편, 헵번의 섬김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의학(醫學)은 물론 어학(語學)에도 재능이 있던 헵번은,
곧 일본인 선교가 허락될 것을 믿고, [일본어 성경 번역]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성경 번역을 위해, 1867년,
우선 일본 최초의 일영사전(和英辭典)인 [和英語林集成]을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1872년, 마가복음과 요한복음 번역하고, 1973년 마태복음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1888년, 마침내 일본 최초 [日本語 新舊約聖書]를 완성합니다.
그 결과, 당시 일본 개혁교회(プロテスタント教会)는,
성경 중심의 바른 신앙관을 일본 각지에 전하게 됩니다.
또한, 헵번 선교사와 그의 아내는 성경 번역을 하는 도중,
[헵번숙(ヘボン塾)]을 만들어,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 [헵번숙(ヘボン塾)]은 오늘의 明治學院(現 明治大學)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헵번 선교사는 明治學院의 초대학장입니다.
이렇듯, 제임스 헵번 선교사는 일본의 교회와 일본인들은 물론,
일본의 의학계, 그리고 일본의 교육계 등에 큰 헌신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본을 사랑하사 일본에 보내신, 정말 귀한 분이었습니다.
1911년 9월 21일, 헵번은 96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제임스 헵번 선교사님처럼, 이 땅 일본과 이 땅의 사람들과 이곳 일본의 각 분야를 위해,
크게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께서 일본에 보낸 귀한 선교사가 헵번이라고 한다면,
한국에도 하나님의 보내신 귀한 선교사 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 Thomas)입니다.
1840년9월7일, 영국 웨일즈에서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는,
어려서부터 가진 꿈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 전도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863년 그의 나이 23세 때, 토마스는 학교에 찾아온 선교사의
설교를 통해 큰 은혜를 받고, 중국 선교사로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4일, 그의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7월 21일,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중국(청나라)을 향합니다.
하노버 교회는, 웨일즈에서도 특히 작은 마을인 클라노바에 있는 교회로서,
클라노바는 50여 가구에 전체 인구가 150명 정도였습니다.
그토록 작은 마을의 교회에서 파송을 받은 토마스는,
약1개월 후인 1863년8월 드디어 중국 상하이(上海)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평소 몸이 약했던 아내 캐롤라인이, 긴 여정 및 임신, 그리고
그로 인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선교사 토마스에 닥친, 참으로 커다란 시련이었습니다.
토마스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많은 날을 헤매어 보았지만,
좀처럼 하나님을 향한 그의 분노와 원망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음의 아픔을 이겨내지 못한 토마스는, 런던선교회에
선교사 사직서를 제출하고, 중국 세관(稅關)에 통역관으로 취직합니다.
세관에 취직한 그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하여 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토마스는 조선인 ‘동지사’ 즉, [조선 시대 때에
동지(冬至)를 전후하여 중국에 공물을 가지고 갔던 사신(使臣) 일행]을 만나서,
조선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심한 핍박과 수난에 대해 듣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분명합니다.
그로 인해 토마스의 마음속에,
다시금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이 회복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스코틀랜드 출신인 윌리암슨 선교사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윌리암슨 선교사는 토마스 선교사에게, 신앙의 박해 때문에
조선에서 도망쳐 온, 김좌평과 최선일 두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김좌평과 최선일을 통해, 당시 조선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에는 그 무엇보다도, 성경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1865년9월4일, 그의 나의 25세 때, 마침내 토마스 선교사는
많은 양의 성경을 배에 싣고 제1次 조선 선교 길에 오릅니다.
아내 캐롤라인이 세상을 떠난 후, 2년이 채 안 된 때였습니다.
이렇게 조선에 온 토마스는, 조선에 온 개혁교회 첫 선교사였습니다.
일본의 개신교 선교사 헵번(1859년)보다 6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한편, 그들은 10일 만에 황해도 창린도 자자리 군포에 도착합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백령도 부근의 섬을 2개월 반 동안 돌면서, 섬 주민들에게
성경을 나눠주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렇게 백령도 부근의 전도를 마친 토마스 선교사 일행은,
이번에는 한양(서울)을 향하기 위해 배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한편, 당시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鎖国)정책이 극에 달해,
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도, 중국으로 돌아온 토마스 선교사는, 다시금 조선을 향하기 위해
기도와 함께 성경을 모으는 등 여러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66년 8월 9일,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의
통역관으로, 제2차 조선 선교의 길에 오르게 됩니다.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8월 21일 대동강 하류에 있는 포리에 도착합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그곳에서 500여 권의 성경을
조선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 후 제너럴 셔먼호가 포리를 떠나 석호정 그리고 만경대에 이르자,
조선군과 제너럴 셔먼호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너럴 셔먼호의 미국인 선장이, 조선인 이익현을
협상하는 것처럼 속여 배로 유인한 다음, 그를 그만 억류하고 맙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이러한 선장의 부정직한 행동에 강하게 항의했지만,
선장은 토마스 선교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 조선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너럴 셔먼호가 가진 대포 등의 화력(火力)이 힘을 발휘하여,
조선군이 수세에 몰렸지만,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 모래에 좌초되는
순간부터는, 일방적인 조선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선군의 수많은 불화살이 제너럴 셔먼호를 향했고,
배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대다수 사람이 불에 타죽거나 화살에 죽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그 와중에서도 한 손에 백기를 들고,
또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조선 군인과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성경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군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당시 평양감사는, 토마스 선교사를 참수하도록 박춘권에게 명합니다.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박춘권이 칼을 들어 토마스를 참수하려는 순간,
눈을 감고 기도하던 토마스 선교사가, 박춘권에게 무엇인가를 내밀었습니다.
“잠깐만 이걸 받아 주십시오. 제가 드리는 마지막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토마스 선교사가 그토록 조선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싶었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조선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토마스는,
대동강변에서 박춘권의 칼에 목이 잘려, 안타깝게 순교합니다.
1866년9월3일, 26세의 젊은 나이로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는,
대동강의 백사장에서, 그렇게 순교를 피를 뿌리며, 세상 삶을 마쳤습니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1899년의 어느 날, 이제는 복음의 문이 열린 조선 땅에서,
선교 활동에 힘을 기울이던 마펫 선교사에게 한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마펫 선교사에게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습니다.
“마펫 목사님 ! 저는 이제 더는 이대로는 못 살겠습니다.
제가 바로 30년 전에 대동강에서 토마스 선교사님을 죽인 그 박춘권입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님이 제게 주었던 이 성경책을 읽고,
제 마음이 너무나 아파서, 이렇게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신앙을 갖게 된 박춘권은, 회개하고 훗날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그렇게 순교했지만, 그가 전한 성경은
조선의 귀한 영혼들을 영원한 생명과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할 때, 그것을 지켜보던 평양감청의 박영식은
몇 권의 성경을 주워와 자기 방의 벽지로 사용했습니다.
물론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집을 예배당으로 드렸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유명한 평양 널다리교회입니다.
당시 성경을 건네받은 최치량은 평양교회를 세운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홍신길은 후에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으며,
그의 동생도 예수님을 믿고 장로가 되었고,
김영섭 역시 장로가 되었으며,
황명대는 셔먼호가 불탈 때 “예수 믿으시오 ! 예수 믿어야 합니다”라는
토마스 선교사의 간절한 외침을 듣고, 평양교회의 초대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
26세의 영국 선교사 토마스의 헌신과, 그가 조선에 준 성경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저는 우리 본향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교회,
그리고 이 성경을 주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도행전의 베뢰아교회와 그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구하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그 말씀이 그러한가를, 성경을 읽으며
또 상고(詳考)하고 또 상고(詳考)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ベレアのユダヤ人は、....... 非常に熱心にみことばを受け入れ、
はたしてそのとおりかどうか、毎日聖書を調べた。)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 듣고, 하나님 말씀 배우기를 사모하고, 그 말씀이 그러한가를 살펴보고
또 살펴보는 교회야 성도야말로, 성경을 전하고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할 때, 하나님은 그 교회에 새로운 사람들을 보내주십니다.
사도행전17: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それで彼らのうちの多くの人たちが信じた。
また、ギリシアの貴婦人たち、そして男たちも少なからず信じた。)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지난 주일은 [성서주일(聖書主日)]이었습니다.
성서주일(聖書主日)은, '더 많은 사람에게, 생명의 말씀인 성경이
전달되고 읽힐 수 있도록, 기도와 헌신을 하는 주일'입니다.
1804년, 영국 교회가 처음으로 성서주일을 지켰고,
한국교회도 1899년부터 성서주일을 구별하여 지킵니다.
우리 본향교회도 몇 년 전부터, [토마스 성경헌금]을 통해, 이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 본향교회를,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교회,
그리고 성경을 많이 주는 교회로 만들어 나갑시다.
일본 곳곳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내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세상 곳곳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내는 교회가 됩시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먼저 성경을 사랑하며, 읽고 열심히 공부합시다.
우리도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됩시다.
본문103절.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あなたのみことばは、私の上あごになんと甘いことでしょう。
蜜よりも私の口に甘いのです。)
본문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あなたのみことばは、私の足のともしび、私の道の光です。)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며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본향교회를 하노버 교회처럼,
토마스 선교사와 같은 분들을 파송하는 교회가 되게 하실 것이며,
또한 우리 본향 성도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복음 전도자가 배출되도록 크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에 앞서 헌신하며,
든든한 기틀도 세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