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012년10월21일, 누가복음10:25-37(우리가 섬겨야 할 이웃은 누구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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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옆에 있는 귀한 지체들과 함께, 이렇게 고백합시다.
우리 영혼의 건강을 위해,
말씀을 사모합시다. 말씀에 순종합시다. 영적 싸움에 지지말고, 반드시 승리합시다.
당신의 영혼이 건강하여, 당신의 하는 모든 일들도 잘 되고,
또 형통하기를 예수님 안에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지난10월16일(화요일),
세르비아 출신의 세계적인 프로테니스 선수 노박 조코비치(Novak Djokovic)와
일본의 유니쿠로(ユニクロ)가 공동으로 10억 엔의 기금을 만들어,
세계의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유니쿠로는 2012년도 대표적 秋冬상품인,
「ヒ-トテック」와「ウルトラライトダウン」의 수익금을 기금으로 내놓기로 했고,
노박 조코비치 선수는 이 일의 홍보에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금을 사용할 곳은,
인터넷을 통해 세계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하마드 유누스, 세계적 건축가 安藤忠雄,
그리고 조코비치 선수, 柳井유니쿠로 사장 등 네 사람이 엄정하게 심사하여,
세계 언론에 정식으로 발표한다고 합니다.
정말 마음이 훈훈해 지는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코비치는 1987년5월22일, 세르비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때부터 테니스를 시작한 조코비치는
열 살도 되기 전부터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테니스 영웅 옐레나 젠치치가 조코비치의 재능을 극찬하며
스스로 조코비치를 가르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코비치에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1992년 발발한 보스니아 내전으로 인해, 조코비치의 나라는 잿더미로 변했고,
조코비치의 집 역시 폭탄을 맞아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조코비치와 가족들도 3개월이 넘도록 지하실에 피신해 있었는데,
집은 완전히 부서졌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코비치의 아버지는 테니스에 재능이 있던 조코비치를 위해,
독일로 테니스 유학을 보낼 것을 결심했고,
결국 온 가족이 독일로 이민을 해 조코비치를 뒷바라지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0년 간의 독일생활은,
매일 매일 온 가족에게 정말 힘겹고 고생스러웠던 날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코비치는 세계적 테니스 선수가 되었습니다.
조코비치는 말합니다.
"나는 보통 어린이들보다 매우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은 오히려 나에게 많은 경험과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나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나는 이제 그 감사를 갚으며 살 것입니다."
조코비치는 지금 세르비아 유니세프의 홍보대사로서
세계의 어린이들을 힘껏 일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들의 아픔을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작년 東日本大震災가 일어나자마자,
미국 플로리다에서 福島의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세계 스포츠 스타들의
축구대회가 열리게 하는데 온갖 힘을 기울였고,
또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습니다.
현재 나이25세의 노박 조코비치,
그는 성공한 테니스 선수뿐 아니라,
훌륭한 봉사자로서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 준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우리는 본문의 이야기가,
예수님을 향한 한 율법교사의 질문에서 시작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본문25절, "(예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그렇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 율법교사는 율법을 요약하면,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교사에게는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연 누가 나의 이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나름대로 자신의 영생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자신이 섬겨야할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 !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과연 누가 나의 이웃인가 ?"하는 율법교사의 생각은 옳은 것입니까 ?
아니면 옳지 않은 것입니까 ?
그렇습니다.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끼리만 이웃인 것입니까 ?
아니면 같은 나라사람이어야 이웃인 것입니까 ?
아니면 알고 지내야만 이웃입니까 ?
아닙니다.
알고 지내든지 모르고 지내든지, 교회에 다니든지 다니지 않든지,
그리고 그가 어느 나라 어느 지방 출신이든지 우리의 이웃입니다.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인 것입니다.
옆 사람이 아무리 얄미워도 우리의 이웃입니다.
앞사람이 아무리 아니꼬워도 우리의 이웃입니다.
뒷사람이 아무리 나쁘고 악한 사람이어도,
우리들이 마땅히 섬겨야할 우리의 이웃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 온 율법교사의 생각들,
즉 율법의 행위를 통해 구원받겠다는 생각도 크게 잘못된 것이었고,
또한 이웃을 구별하려는 생각도 매우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찾아온 율법교사와 우리 모두에게,
올바른 이웃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져서 거의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해 지나간 후에,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갑니다.
사마리아인은 죽어 가는 사람을 정성을 다해 보살핍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자신의 이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본문의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베푼 친절과 섬김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는 분명 무엇인가 중요한 일로 길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내용을 보면,
주막 주인에게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기름과 포도주를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에 붓고 싸매는 등 최선의 치료를 했으며,
또 자기의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갔고, 후속 조치까지 완벽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이 사마리아 사람은,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을 그토록 정성껏 보살필 수 있었을까요 ?
그런 감동적인 행동을 하게 된, 근본적인 에너지는 무엇일까요 ?
본문33절에 그 실마리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본문33절,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영어성경KJB, "when he saw him, he had compassion on him."
일본어 개역성경, "彼を見てかわいそうに思い."
그렇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베푼 선행의 원동력은,
어떤 종교적인 의무감이나, 높은 윤리의식, 혹은 자기 이익을 계산한 자선이 아니라,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그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의 원동력이었고,
강도 만난 사람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주었던 내적 동기였습니다.
영어성경KJB에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compassion'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compassion'은 'cum'과 'passion'의 합성어인데,
'passion'의 어원은 라틴어 'paitor'입니다.
그 뜻은 '함께 겪고, 함께 아파하고'입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기자신이 강도 만난 사람의 입장에 되어,
함께 두려워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피 흘렸던 것입니다.
한국의 어떤 목사님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병원에서 검사한 결과 뇌종양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목사님들과 성도님들이 문병을 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정말로 간절히 기도를 해 주셨는데,
그 중에 한 젊은 목사님의 기도와 위로가 가장 가슴 깊이 와 닿았다고 합니다.
뇌종양 말기 진단을 받은 어머니도, 모인 가족들도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큰 위로와 용기와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몇 일 후, 문병을 받았던 목사님이 그 젊은 목사님에게 감사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 날 목사님의 위로의 말씀과 기도가 우리 모두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그 젊은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날 목사님의 어머니를 뵙자마자, 병으로 돌아가신 제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기도하는데,
그때 마치 제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젊은 목사님의 기도와 위로가 큰 힘이 되었던 것은,
같은 입장이 되어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이웃을 진정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은, 공감(compassion)
즉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겪어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오늘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선행을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공감(compassion)의 마음이 있으면,
첫째, 나귀에서 내려, 어려운 이웃을 향해 가까이 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나귀에서 내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진 것들을 모두 동원하여 응급조치를 행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한 울타리,
그리고 누리고 있는 기득권, 또한 쾌적한 안전지대를 포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남이 자신의 자리로 들어오는 것도, 좀처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공감하여, 같은 입장에 서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느끼면,
주저 없이 그 누군가를, 자기 자신의 공간으로 받아들입니다.
둘째,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공감의 마음이 있으면,
나의 나귀에 어려운 이웃을 태워줍니다. 나는 나귀에서 내리고 말입니다.
예 ! 나귀는 작은 동물이어서 누군가를 태우면 나는 거기에 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태우면 나는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함께 아파하고, 함께 느끼면 우리는 나귀에서 내려와 즐겁게 걸을 수 있습니다.
셋째, 공감의 마음이 있으면, 상처 입은 사람을 끝까지 책임집니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자신의 나귀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려가 완전히 회복될 때가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습니다.
대충 하는 척만 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책임졌습니다.
비용도 충분히 지불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 어떻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 수 있었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그것은 강도 만난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함께 힘들어했기 때문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인도 사람들의 가난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나귀에서 내렸고,
자기 삶이라고 하는 나귀에 그들을 태웠으며, 끝까지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한국의 손양원목사님도 한센병자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즉시 버렸습니다. 나귀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 역시 한센병자가 되어 평생동안 그들을 섬겼습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
그 분은 죄와 절망의 사슬에서 헤매는 모든 인류의 불행한 삶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 보좌라는 나귀에서 뛰어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사랑의 나귀에 태우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를 향한 깊은 공감(compassion)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들도 이 땅의 이웃들을 향해, 예수님이 가지신 그 공감의 마음,
즉 compassion의 마음을 가집시다. 그 마음 갖기를 간절히 구합시다.
그들과 같은 입장이 되어,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합시다.
사실 누군가의 아픔과 상처, 외로움을 진실로 공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공감일 때,
그 공감의 마음은 나 자신을 바꾸고,
네 주위를 바꾸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감의 마음을 방해하는 큰 장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은밀한 함정 같아서 처리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 장애물은 바로 '동정과 연민'입니다.
동정이나 연민은 공감과 겉모습이 아주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동정이나 연민은 불쌍한 마음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공감과 비슷하지만,
사실은 불쌍한 마음 저변엔 그들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교만한 우리의 눈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감은 나도 그도 모두다 연약하다는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결코 그 대상을 열등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하게 여깁니다.
훼더릭 펄스라는 심리학자는,
동정이나 연민은 자신을 드러내는 생색내기의 일종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낌으로써,
자신과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심리적으로 강조하며,
자기 우월감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이들이 행하는 자선사업의 심리적 동기가 여기에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아무리 못된 자식일지라도 끝까지 사랑합니다.
자기 몸에서 난 자식에 대한 끊을 수 없는 공감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형수 아들을 둔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절대 사형수로 여기지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 마음이 동정이나 연민이겠습니까 ?
아닙니다. 세상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아들에 대한 깊은 공감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 모두에게는 다 이런 공감의 능력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내 아들 딸 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들과 딸에게도,
또한 내 부모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부모에게도
이런 깊은 공감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기적이 일어날까요 ?
그리고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게 변해갈까요 ?
귀하신 성도여러분 !
가볍고 이기적인, 그리고 피상적인 동정과 연민을 버리고,
진실하고 사려 깊고 자기를 다 주는 사랑 깊은 공감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동경에는 참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이곳 긴시쵸에도 여러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마다 특성이 다 있는데,
저는 우리 교회가 크지 않지만 우리 모든 지체들이 누구에게나 공감해 줄줄 하는,
진실된 사랑의 사람들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선교나 구제까지 다 잘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먼저는 무엇보다 공감의 영성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공감은 착한 사람들, 섬세한 사람들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의 능력입니다.
이 공감의 영성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해야 합니다.
테니스 선수 노박 조코비치에게 그 공감의 영성이 충만한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우리들의 삶의 구석구석에서도, 공감의 영성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녀가,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교회 안에서,
회사 안에서,
기업에서,
채권자와 채무자가,
부자와 가난한 자가,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이,
바로 나와 너 사이에 공감의 은혜가 나타날 때,
우리 하나님은 정말 기뻐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거기서,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던 태초의 인간의 모습이,
우리 속에서 회복되어 가는 것을, 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우리의 삶은 더더욱 아름답고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공감의 능력을 우리들의 삶에 가득 채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우리 영혼의 건강을 위해,
말씀을 사모합시다. 말씀에 순종합시다. 영적 싸움에 지지말고, 반드시 승리합시다.
당신의 영혼이 건강하여, 당신의 하는 모든 일들도 잘 되고,
또 형통하기를 예수님 안에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지난10월16일(화요일),
세르비아 출신의 세계적인 프로테니스 선수 노박 조코비치(Novak Djokovic)와
일본의 유니쿠로(ユニクロ)가 공동으로 10억 엔의 기금을 만들어,
세계의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유니쿠로는 2012년도 대표적 秋冬상품인,
「ヒ-トテック」와「ウルトラライトダウン」의 수익금을 기금으로 내놓기로 했고,
노박 조코비치 선수는 이 일의 홍보에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금을 사용할 곳은,
인터넷을 통해 세계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하마드 유누스, 세계적 건축가 安藤忠雄,
그리고 조코비치 선수, 柳井유니쿠로 사장 등 네 사람이 엄정하게 심사하여,
세계 언론에 정식으로 발표한다고 합니다.
정말 마음이 훈훈해 지는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코비치는 1987년5월22일, 세르비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때부터 테니스를 시작한 조코비치는
열 살도 되기 전부터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테니스 영웅 옐레나 젠치치가 조코비치의 재능을 극찬하며
스스로 조코비치를 가르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코비치에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1992년 발발한 보스니아 내전으로 인해, 조코비치의 나라는 잿더미로 변했고,
조코비치의 집 역시 폭탄을 맞아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조코비치와 가족들도 3개월이 넘도록 지하실에 피신해 있었는데,
집은 완전히 부서졌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코비치의 아버지는 테니스에 재능이 있던 조코비치를 위해,
독일로 테니스 유학을 보낼 것을 결심했고,
결국 온 가족이 독일로 이민을 해 조코비치를 뒷바라지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0년 간의 독일생활은,
매일 매일 온 가족에게 정말 힘겹고 고생스러웠던 날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코비치는 세계적 테니스 선수가 되었습니다.
조코비치는 말합니다.
"나는 보통 어린이들보다 매우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은 오히려 나에게 많은 경험과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나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나는 이제 그 감사를 갚으며 살 것입니다."
조코비치는 지금 세르비아 유니세프의 홍보대사로서
세계의 어린이들을 힘껏 일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들의 아픔을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작년 東日本大震災가 일어나자마자,
미국 플로리다에서 福島의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세계 스포츠 스타들의
축구대회가 열리게 하는데 온갖 힘을 기울였고,
또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습니다.
현재 나이25세의 노박 조코비치,
그는 성공한 테니스 선수뿐 아니라,
훌륭한 봉사자로서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 준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우리는 본문의 이야기가,
예수님을 향한 한 율법교사의 질문에서 시작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본문25절, "(예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그렇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 율법교사는 율법을 요약하면,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교사에게는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연 누가 나의 이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나름대로 자신의 영생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자신이 섬겨야할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 !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과연 누가 나의 이웃인가 ?"하는 율법교사의 생각은 옳은 것입니까 ?
아니면 옳지 않은 것입니까 ?
그렇습니다.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끼리만 이웃인 것입니까 ?
아니면 같은 나라사람이어야 이웃인 것입니까 ?
아니면 알고 지내야만 이웃입니까 ?
아닙니다.
알고 지내든지 모르고 지내든지, 교회에 다니든지 다니지 않든지,
그리고 그가 어느 나라 어느 지방 출신이든지 우리의 이웃입니다.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인 것입니다.
옆 사람이 아무리 얄미워도 우리의 이웃입니다.
앞사람이 아무리 아니꼬워도 우리의 이웃입니다.
뒷사람이 아무리 나쁘고 악한 사람이어도,
우리들이 마땅히 섬겨야할 우리의 이웃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 온 율법교사의 생각들,
즉 율법의 행위를 통해 구원받겠다는 생각도 크게 잘못된 것이었고,
또한 이웃을 구별하려는 생각도 매우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찾아온 율법교사와 우리 모두에게,
올바른 이웃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져서 거의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해 지나간 후에,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갑니다.
사마리아인은 죽어 가는 사람을 정성을 다해 보살핍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자신의 이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
본문의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베푼 친절과 섬김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는 분명 무엇인가 중요한 일로 길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내용을 보면,
주막 주인에게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기름과 포도주를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에 붓고 싸매는 등 최선의 치료를 했으며,
또 자기의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갔고, 후속 조치까지 완벽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이 사마리아 사람은,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을 그토록 정성껏 보살필 수 있었을까요 ?
그런 감동적인 행동을 하게 된, 근본적인 에너지는 무엇일까요 ?
본문33절에 그 실마리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본문33절,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영어성경KJB, "when he saw him, he had compassion on him."
일본어 개역성경, "彼を見てかわいそうに思い."
그렇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베푼 선행의 원동력은,
어떤 종교적인 의무감이나, 높은 윤리의식, 혹은 자기 이익을 계산한 자선이 아니라,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그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의 원동력이었고,
강도 만난 사람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주었던 내적 동기였습니다.
영어성경KJB에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compassion'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compassion'은 'cum'과 'passion'의 합성어인데,
'passion'의 어원은 라틴어 'paitor'입니다.
그 뜻은 '함께 겪고, 함께 아파하고'입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기자신이 강도 만난 사람의 입장에 되어,
함께 두려워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피 흘렸던 것입니다.
한국의 어떤 목사님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병원에서 검사한 결과 뇌종양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목사님들과 성도님들이 문병을 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정말로 간절히 기도를 해 주셨는데,
그 중에 한 젊은 목사님의 기도와 위로가 가장 가슴 깊이 와 닿았다고 합니다.
뇌종양 말기 진단을 받은 어머니도, 모인 가족들도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큰 위로와 용기와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몇 일 후, 문병을 받았던 목사님이 그 젊은 목사님에게 감사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 날 목사님의 위로의 말씀과 기도가 우리 모두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그 젊은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날 목사님의 어머니를 뵙자마자, 병으로 돌아가신 제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기도하는데,
그때 마치 제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젊은 목사님의 기도와 위로가 큰 힘이 되었던 것은,
같은 입장이 되어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이웃을 진정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은, 공감(compassion)
즉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겪어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오늘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선행을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공감(compassion)의 마음이 있으면,
첫째, 나귀에서 내려, 어려운 이웃을 향해 가까이 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나귀에서 내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진 것들을 모두 동원하여 응급조치를 행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한 울타리,
그리고 누리고 있는 기득권, 또한 쾌적한 안전지대를 포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남이 자신의 자리로 들어오는 것도, 좀처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공감하여, 같은 입장에 서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느끼면,
주저 없이 그 누군가를, 자기 자신의 공간으로 받아들입니다.
둘째,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공감의 마음이 있으면,
나의 나귀에 어려운 이웃을 태워줍니다. 나는 나귀에서 내리고 말입니다.
예 ! 나귀는 작은 동물이어서 누군가를 태우면 나는 거기에 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태우면 나는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함께 아파하고, 함께 느끼면 우리는 나귀에서 내려와 즐겁게 걸을 수 있습니다.
셋째, 공감의 마음이 있으면, 상처 입은 사람을 끝까지 책임집니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자신의 나귀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려가 완전히 회복될 때가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습니다.
대충 하는 척만 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책임졌습니다.
비용도 충분히 지불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 어떻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 수 있었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그것은 강도 만난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함께 힘들어했기 때문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인도 사람들의 가난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나귀에서 내렸고,
자기 삶이라고 하는 나귀에 그들을 태웠으며, 끝까지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한국의 손양원목사님도 한센병자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즉시 버렸습니다. 나귀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 역시 한센병자가 되어 평생동안 그들을 섬겼습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
그 분은 죄와 절망의 사슬에서 헤매는 모든 인류의 불행한 삶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 보좌라는 나귀에서 뛰어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사랑의 나귀에 태우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를 향한 깊은 공감(compassion)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들도 이 땅의 이웃들을 향해, 예수님이 가지신 그 공감의 마음,
즉 compassion의 마음을 가집시다. 그 마음 갖기를 간절히 구합시다.
그들과 같은 입장이 되어,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합시다.
사실 누군가의 아픔과 상처, 외로움을 진실로 공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공감일 때,
그 공감의 마음은 나 자신을 바꾸고,
네 주위를 바꾸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감의 마음을 방해하는 큰 장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은밀한 함정 같아서 처리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 장애물은 바로 '동정과 연민'입니다.
동정이나 연민은 공감과 겉모습이 아주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동정이나 연민은 불쌍한 마음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공감과 비슷하지만,
사실은 불쌍한 마음 저변엔 그들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교만한 우리의 눈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감은 나도 그도 모두다 연약하다는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결코 그 대상을 열등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하게 여깁니다.
훼더릭 펄스라는 심리학자는,
동정이나 연민은 자신을 드러내는 생색내기의 일종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낌으로써,
자신과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심리적으로 강조하며,
자기 우월감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이들이 행하는 자선사업의 심리적 동기가 여기에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아무리 못된 자식일지라도 끝까지 사랑합니다.
자기 몸에서 난 자식에 대한 끊을 수 없는 공감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형수 아들을 둔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절대 사형수로 여기지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 마음이 동정이나 연민이겠습니까 ?
아닙니다. 세상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아들에 대한 깊은 공감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 모두에게는 다 이런 공감의 능력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내 아들 딸 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들과 딸에게도,
또한 내 부모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부모에게도
이런 깊은 공감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기적이 일어날까요 ?
그리고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게 변해갈까요 ?
귀하신 성도여러분 !
가볍고 이기적인, 그리고 피상적인 동정과 연민을 버리고,
진실하고 사려 깊고 자기를 다 주는 사랑 깊은 공감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동경에는 참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이곳 긴시쵸에도 여러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마다 특성이 다 있는데,
저는 우리 교회가 크지 않지만 우리 모든 지체들이 누구에게나 공감해 줄줄 하는,
진실된 사랑의 사람들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선교나 구제까지 다 잘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먼저는 무엇보다 공감의 영성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공감은 착한 사람들, 섬세한 사람들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의 능력입니다.
이 공감의 영성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해야 합니다.
테니스 선수 노박 조코비치에게 그 공감의 영성이 충만한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우리들의 삶의 구석구석에서도, 공감의 영성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녀가,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교회 안에서,
회사 안에서,
기업에서,
채권자와 채무자가,
부자와 가난한 자가,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이,
바로 나와 너 사이에 공감의 은혜가 나타날 때,
우리 하나님은 정말 기뻐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거기서,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던 태초의 인간의 모습이,
우리 속에서 회복되어 가는 것을, 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우리의 삶은 더더욱 아름답고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공감의 능력을 우리들의 삶에 가득 채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