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010년12월25일, 누가복음2:1-7(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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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옆에 계신 복스러운 지체들을 축복합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 기쁜 성탄절입니다.
행복이 가득한 성탄과, 감사가 넘치는 새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즈음에는 별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은 적이 없지만,
청년 학생i때에는 꽤 많은 성탄 카드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지금도 성탄 카드를 보면,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모습과 풍경이 그 속에 다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눈이 하얗게 쌓인 시골 교회라든가,
금빛 은빛 테두리 안에 있는 정겨운 가족들,
또는 멋있는 모자를 쓴 동방박사, 후광을 입고 있는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너무나 성스런 모습을 가진 천사들,
심지어 각종 귀여운 동물과 산타클로스와 썰매까지,
예쁘고 낭만적인 것들이라면 남김없이 카드 속에 담겨졌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전하는 성탄의 메시지는,
축하, 평화, 따뜻함, 기쁨, 축제, 즐거움 등이었습니다.
우리는 방금 서로 즐겁게 웃으면서 성탄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첫 번째 성탄도 이렇게 즐겁기만 했을까요 ?
누가복음의 서론 부분에는 두 사람의 수태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마리아이고, 또 한 사람은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입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천사가 나타나 남편 사가랴에게 수태를 예고한 후,
기적적으로 회임(懷妊)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엘리사벳은 남편과 상의하여, 노산(老産)이므로 5개월 간 숨어 안정을 취한 후,
임신 사실을 가족과 온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고,
많은 축하와 경하의 말을 듣습니다.
마리아에게까지 축하를 받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어떠했습니까 ?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릴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정혼한 요셉에게만은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 파혼을 당할 뻔합니다.
당시 마리아의 마음이 기쁘고, 요셉에게 평화가 넘쳤을까요 ?
그리고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출산할 때는,
산파가 동원되었고, 친척들이 달려왔으며,
온 동네는 전통에 따라 노래를 부르며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했습니다.
누가복음1:57-58,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 함께 즐거워하더라"
하지만 여섯 달 후, 마리아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他地)에서,
산파도 없이, 가족들의 축하도 받지 못하며, 아기를 출산했습니다.
더구나 그 아기를 누일 곳이 없어, 말구유에 누였습니다.
우리 중에 아무리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병원이나 조산소,
집에서 태어났지, 마구간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하질 못하셨습니다.
여러분 ! 마리아와 요셉의 마음에 기쁨이 넘쳤을까요 ?
아니요. 오히려 서글픔과 안타까움, 속상함만 가득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러한 서글픔과 안타까움도 잠시,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애굽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첫 번째 성탄의 주인공들의 모습은 결코 평화롭지도, 기쁘지도, 즐겁지도 못했습니다.
금년에 태어난 우리 본향의 새 식구, 여진이와 사랑이가 참 예쁘게 자랐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진이와 사랑이는 아직도 아기입니다.
아기는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못 합니다.
불편하고 배고파도, 오줌을 눠서 엉덩이가 차게 되도 그것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는 것말고는 자기 의사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부모들이 알아서 모든 것을 해 주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기들은, 어떤 면에서는 동물보다도 무력한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바로 그런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성탄의 진정한 의미가, 즐거운 캐럴로 가려지고,
각종 파티와 선물, 그리고 카드들의 뒤로 숨겨지고 있지만,
우리는 첫 성탄의 모습과 그 의미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 ! 그렇다면,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중요한 메시지들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
첫째, 낮아지심, 즉 겸손입니다.
신화에서든 전설에서든 신(神)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거기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聖子 하나님은 세상에 오실 때,
급한 회오리바람이나 삼킬 듯한 불의 세력처럼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그 분께서는 작아지고,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습니다.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한 수정란으로 오신 것입니다.
온 우주를 호령하시던 하나님이셨고,
세상의 모든 군대와 제국을 자신의 뜻대로 이끄시던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이 땅에 오실 때는 말도 못하고, 딱딱한 음식을 못 먹으며,
대 소변도 못 가리고, 마리아라는 처녀의 품을 유일한 피난처로 삼고,
그 처녀에게서 음식과 사랑을 공급받아야 하는 연약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가끔 이 세상의 권세를 가진 이들이,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을 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모습이던가요 ?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웅장한 팡파르에 맞춰서,
온갖 치장을 하고 호사스런 의복을 걸치고 등장합니다.
지난 번, 한국에서 열린 G-20 수뇌 회담 때,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이번 한국과 아시아 3개국 방문을 위해 쓴 비용이
수십 억 달러(수천 억 엔)에 달했다고 합니다.
특히, 인도에서는 하루 2억 달러(170억엔)를 썼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천문학적인 비용은 수행원이 3천명을 넘고,
신변 안전을 위해 호텔을 통째로 빌리는 데 따른 것이라고
인도의 PTI통신이 인도정부 관리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미국 ABC방송도 대통령의 안전을 고려해,
백악관이 5성 호텔인 타지마할 팰리스 호텔의 일반 객실 560개와 스위트룸 44개를
통째로 빌렸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대조적으로 우리 主님의 지상방문은 어떠했습니까 ?
말구유에 어떤 수행원도 없이, 가장 비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하늘은 천사들로 인해서 잠깐 광채를 발했지만,
그것을 보고 영광을 돌린 사람들은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듯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것은,
우리 모두에게 분명히 자신의 의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아 ! 끝없이 낮아져라 !"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모습은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더욱 낮아지는 것입니다.
겸손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우리 인간은 조그만 것 하나라도 해내면, 그것을 자기가 한 줄 알고 금방 우쭐댑니다.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한없이 높아지려 합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무엇인가를 이루셨다고, 혹 해냈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
그렇다면, 반드시 말 밥통에 누워 계신 우리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뭔가 대접받고 싶고, 높임 받고 싶으십니까 ?
우리 주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사셨는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둘째, 성탄을 통해 배울 또 한 가지는, 친근함입니다.
세상의 종교들을 보면, 자기 신(神)에게 나아가는 길이 참으로 험난합니다.
힌두교는 신전에서 희생제물을 드려야 하고,
이슬람교도들은 이마가 땅에 닿는 정도의 기도를 수없이 반복하며,
불교도들은 삼천 배의 절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의 종교행위를 통해 느끼는 것은, 神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실, 구약의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유대 어린이들은,
접근하기만 하면 누구나 죽는 거룩한 시내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났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언약궤를 잘못 만져 죽은 이야기,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가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시무시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하나님께서,
말구유의 아기라는 놀라운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 말구유에 누워있는 신생아에게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요 ?
방긋 웃는 아기에게서 두려움을 느끼느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탄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친근감을 가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필립 얀시는 그가 쓴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라는 책에서,
자신이 수족관을 가지고 있을 때의 얘기를 이렇게 썼습니다.
"해수 수족관을 가지고 있을 때, 나는 성육신에 대해 배운 바가 있었다.
사실, 해수 수족관을 관리하기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중략)
수족관의 물고기를 위해 그토록 애를 썼으니,
미물에 불과할지라도 고기들이 최소한 고마워할 것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수족관 근처에 내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마다
고기들은 늘 가까운 조개 껍데기 속으로 숨곤 했다.
고기들은 내게 두려움이라는 단 하나의 감정만을 표출했다.
하루에 세 차례씩 수족관 덮개를 열고 먹이를 뿌려줄 때조차,
고기들은 나의 행동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신호로만 받아들였다.
나는 고기들에게 진정한 나의 관심을 전달할 수 없었다."
"고기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신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나는 너무나 컸으며, 나의 행동은 이해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의 자비로운 행동을 고기들은 만행으로 여겼다.
내 치유의 손길은 파괴의 마수로 비쳤다.
그래서 나는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고기들의 생각을 바꾸려면 내 자신이 고기가 되는 화육적(化育的) 결단이 필요함을.
진정 나는 고기가 되어 고기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들에게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인간이 고기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기가 된다는 그 엄청난 현상과 비교할 차원이 못 된다.
그럼에도 복음서는 베들레헴에서 그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고 이야기한다.
물질을 만드신 그 하나님이 물질의 형태를 취하셨다고 ......."
사랑하는 여러분 !
이토록 우리와의 거리를 줄이신 하나님께,
이토록 두꺼운 장벽을 깨신 하나님께, 이제는 편안하게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인자(仁慈)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친근히 하십시오.
여호수아23:8,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매년 성탄을 맞이해도 여전히 많은 크리스천들은
성탄에 담긴 이 하나님의 뜻을 크게 생각하지 않고 지내버립니다.
이 광활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참으로 작은 지구,
그것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셨다는 것을 그저 평범한 일로만 생각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성탄을 맞아, 하나님의 뜻을 다시 되새겨 봅니다.
성탄의 가장 큰 메시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낮아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친근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1:23,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
이 성탄에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친근하신 하나님, 따뜻하신 하나님을 느껴봅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이제는 그 하나님을 느끼며, 한없는 평안가운데 하루 하루의 삶을 살아갑시다.
이 큰 은혜가 오늘부터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메리 크리스마스 ! 기쁜 성탄절입니다.
행복이 가득한 성탄과, 감사가 넘치는 새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즈음에는 별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은 적이 없지만,
청년 학생i때에는 꽤 많은 성탄 카드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지금도 성탄 카드를 보면,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모습과 풍경이 그 속에 다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눈이 하얗게 쌓인 시골 교회라든가,
금빛 은빛 테두리 안에 있는 정겨운 가족들,
또는 멋있는 모자를 쓴 동방박사, 후광을 입고 있는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너무나 성스런 모습을 가진 천사들,
심지어 각종 귀여운 동물과 산타클로스와 썰매까지,
예쁘고 낭만적인 것들이라면 남김없이 카드 속에 담겨졌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전하는 성탄의 메시지는,
축하, 평화, 따뜻함, 기쁨, 축제, 즐거움 등이었습니다.
우리는 방금 서로 즐겁게 웃으면서 성탄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첫 번째 성탄도 이렇게 즐겁기만 했을까요 ?
누가복음의 서론 부분에는 두 사람의 수태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마리아이고, 또 한 사람은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입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천사가 나타나 남편 사가랴에게 수태를 예고한 후,
기적적으로 회임(懷妊)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엘리사벳은 남편과 상의하여, 노산(老産)이므로 5개월 간 숨어 안정을 취한 후,
임신 사실을 가족과 온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고,
많은 축하와 경하의 말을 듣습니다.
마리아에게까지 축하를 받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어떠했습니까 ?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릴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정혼한 요셉에게만은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 파혼을 당할 뻔합니다.
당시 마리아의 마음이 기쁘고, 요셉에게 평화가 넘쳤을까요 ?
그리고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출산할 때는,
산파가 동원되었고, 친척들이 달려왔으며,
온 동네는 전통에 따라 노래를 부르며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했습니다.
누가복음1:57-58,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 함께 즐거워하더라"
하지만 여섯 달 후, 마리아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他地)에서,
산파도 없이, 가족들의 축하도 받지 못하며, 아기를 출산했습니다.
더구나 그 아기를 누일 곳이 없어, 말구유에 누였습니다.
우리 중에 아무리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병원이나 조산소,
집에서 태어났지, 마구간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하질 못하셨습니다.
여러분 ! 마리아와 요셉의 마음에 기쁨이 넘쳤을까요 ?
아니요. 오히려 서글픔과 안타까움, 속상함만 가득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러한 서글픔과 안타까움도 잠시,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애굽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첫 번째 성탄의 주인공들의 모습은 결코 평화롭지도, 기쁘지도, 즐겁지도 못했습니다.
금년에 태어난 우리 본향의 새 식구, 여진이와 사랑이가 참 예쁘게 자랐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진이와 사랑이는 아직도 아기입니다.
아기는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못 합니다.
불편하고 배고파도, 오줌을 눠서 엉덩이가 차게 되도 그것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는 것말고는 자기 의사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부모들이 알아서 모든 것을 해 주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기들은, 어떤 면에서는 동물보다도 무력한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바로 그런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성탄의 진정한 의미가, 즐거운 캐럴로 가려지고,
각종 파티와 선물, 그리고 카드들의 뒤로 숨겨지고 있지만,
우리는 첫 성탄의 모습과 그 의미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 ! 그렇다면,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중요한 메시지들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
첫째, 낮아지심, 즉 겸손입니다.
신화에서든 전설에서든 신(神)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거기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聖子 하나님은 세상에 오실 때,
급한 회오리바람이나 삼킬 듯한 불의 세력처럼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그 분께서는 작아지고,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습니다.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한 수정란으로 오신 것입니다.
온 우주를 호령하시던 하나님이셨고,
세상의 모든 군대와 제국을 자신의 뜻대로 이끄시던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이 땅에 오실 때는 말도 못하고, 딱딱한 음식을 못 먹으며,
대 소변도 못 가리고, 마리아라는 처녀의 품을 유일한 피난처로 삼고,
그 처녀에게서 음식과 사랑을 공급받아야 하는 연약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가끔 이 세상의 권세를 가진 이들이,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을 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모습이던가요 ?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웅장한 팡파르에 맞춰서,
온갖 치장을 하고 호사스런 의복을 걸치고 등장합니다.
지난 번, 한국에서 열린 G-20 수뇌 회담 때,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이번 한국과 아시아 3개국 방문을 위해 쓴 비용이
수십 억 달러(수천 억 엔)에 달했다고 합니다.
특히, 인도에서는 하루 2억 달러(170억엔)를 썼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천문학적인 비용은 수행원이 3천명을 넘고,
신변 안전을 위해 호텔을 통째로 빌리는 데 따른 것이라고
인도의 PTI통신이 인도정부 관리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미국 ABC방송도 대통령의 안전을 고려해,
백악관이 5성 호텔인 타지마할 팰리스 호텔의 일반 객실 560개와 스위트룸 44개를
통째로 빌렸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대조적으로 우리 主님의 지상방문은 어떠했습니까 ?
말구유에 어떤 수행원도 없이, 가장 비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하늘은 천사들로 인해서 잠깐 광채를 발했지만,
그것을 보고 영광을 돌린 사람들은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듯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것은,
우리 모두에게 분명히 자신의 의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아 ! 끝없이 낮아져라 !"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모습은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더욱 낮아지는 것입니다.
겸손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우리 인간은 조그만 것 하나라도 해내면, 그것을 자기가 한 줄 알고 금방 우쭐댑니다.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한없이 높아지려 합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무엇인가를 이루셨다고, 혹 해냈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
그렇다면, 반드시 말 밥통에 누워 계신 우리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뭔가 대접받고 싶고, 높임 받고 싶으십니까 ?
우리 주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사셨는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둘째, 성탄을 통해 배울 또 한 가지는, 친근함입니다.
세상의 종교들을 보면, 자기 신(神)에게 나아가는 길이 참으로 험난합니다.
힌두교는 신전에서 희생제물을 드려야 하고,
이슬람교도들은 이마가 땅에 닿는 정도의 기도를 수없이 반복하며,
불교도들은 삼천 배의 절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의 종교행위를 통해 느끼는 것은, 神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실, 구약의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유대 어린이들은,
접근하기만 하면 누구나 죽는 거룩한 시내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났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언약궤를 잘못 만져 죽은 이야기,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가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시무시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하나님께서,
말구유의 아기라는 놀라운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 말구유에 누워있는 신생아에게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요 ?
방긋 웃는 아기에게서 두려움을 느끼느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탄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친근감을 가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필립 얀시는 그가 쓴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라는 책에서,
자신이 수족관을 가지고 있을 때의 얘기를 이렇게 썼습니다.
"해수 수족관을 가지고 있을 때, 나는 성육신에 대해 배운 바가 있었다.
사실, 해수 수족관을 관리하기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중략)
수족관의 물고기를 위해 그토록 애를 썼으니,
미물에 불과할지라도 고기들이 최소한 고마워할 것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수족관 근처에 내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마다
고기들은 늘 가까운 조개 껍데기 속으로 숨곤 했다.
고기들은 내게 두려움이라는 단 하나의 감정만을 표출했다.
하루에 세 차례씩 수족관 덮개를 열고 먹이를 뿌려줄 때조차,
고기들은 나의 행동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신호로만 받아들였다.
나는 고기들에게 진정한 나의 관심을 전달할 수 없었다."
"고기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신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나는 너무나 컸으며, 나의 행동은 이해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의 자비로운 행동을 고기들은 만행으로 여겼다.
내 치유의 손길은 파괴의 마수로 비쳤다.
그래서 나는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고기들의 생각을 바꾸려면 내 자신이 고기가 되는 화육적(化育的) 결단이 필요함을.
진정 나는 고기가 되어 고기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들에게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인간이 고기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기가 된다는 그 엄청난 현상과 비교할 차원이 못 된다.
그럼에도 복음서는 베들레헴에서 그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고 이야기한다.
물질을 만드신 그 하나님이 물질의 형태를 취하셨다고 ......."
사랑하는 여러분 !
이토록 우리와의 거리를 줄이신 하나님께,
이토록 두꺼운 장벽을 깨신 하나님께, 이제는 편안하게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인자(仁慈)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친근히 하십시오.
여호수아23:8,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매년 성탄을 맞이해도 여전히 많은 크리스천들은
성탄에 담긴 이 하나님의 뜻을 크게 생각하지 않고 지내버립니다.
이 광활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참으로 작은 지구,
그것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셨다는 것을 그저 평범한 일로만 생각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성탄을 맞아, 하나님의 뜻을 다시 되새겨 봅니다.
성탄의 가장 큰 메시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낮아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친근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1:23,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
이 성탄에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친근하신 하나님, 따뜻하신 하나님을 느껴봅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이제는 그 하나님을 느끼며, 한없는 평안가운데 하루 하루의 삶을 살아갑시다.
이 큰 은혜가 오늘부터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