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010년10월17일, 예레미야10:17-25(성숙한 신앙인의 고난 征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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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계신 지체들을 이렇게 축복합시다.
하나님 교회의 부흥을 위해, 크게 쓰임 받는 당신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한 신앙인(信仰人)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 우리 인간들이, 가장 진실해 질 때가 언제일까요 ?
사랑할 때일까요 ?
아니면 기도할 때일까요 ?
혹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일까요 ?
혹 눈물을 흘릴 때일까요 ?
혹 웃을 때일까요 ? .......
아니요. 이럴 때보다 더욱 진실해 질 때는, 죽음을 앞둔 때라고 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비로소 죽음을 앞두고 진실함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면,
자신이 살아 온 삶을 돌아보면서 세 가지 정도의 후회(後悔)를 한다고 합니다.
첫째, 나누며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그때 좀 더 베풀 수 있었는데, 좀 더 나누어 줄 수 있었는데,
좀 더 헌신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후회된다고 합니다.
또한 '이렇게 쥐고, 모아봐도 먹고도 쓰지도 못하고 가는 것을,
좀 더 좋은 일하면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하며 후회한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죽음의 문턱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몇 해 전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이러한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좀 더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는데, 좀 더 사랑한다 말할 수 있었는데 !'
그것이 지금도 제 마음 속에 깊은 후회로 남습니다.
둘째,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그때 조금만 더 참을 것을, 그때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불가피하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까 그때 좀 더 참을 수 있었는데,
그걸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 너무나 후회가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혹시 참지 못한 것 때문에 후회하는 것 없습니까 ?
두 번 다시, 그런 후회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성장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즐기며, 행복하게 살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좀 더 행복하게 살수도 있었는데, 좀 더 즐길 수 있었는데,
그렇게 다투고, 울고불고 할 필요 없었는데, 얼마든지 즐겁게 살수 있었는데'
'어찌 그토록 어리석어서, 나 자신을 괴롭히고, 또 남까지 괴롭히며 살았던고 !?'
'왜 그토록 불평하며, 짜증내고, 원망하며 살았던고 !?'하며 후회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먼 훗날, 하나님께서 하늘로 우리를 부르실 때, 이러한 후회를 하지 않도록,
아름다운 삶을 사는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
우리가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지금의 삶이 중요합니다.
지금 베풀어야 하고, 지금 참아야 하며, 또한 지금 즐겨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눈앞의 삶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힘겹습니다.
그래서 볼테르라고 하는 프랑스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참으로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정말 어려운 일은, 비밀을 지키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참 묘하게도, 무슨 비밀을 알고 나면,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견디지를 못합니다.
결국, 나도 지키기 어려운 그 비밀을, 남에게는 꼭 지키라고 다짐받으면서,
굳이 이야기를 해서 다른 사람까지 괴로움에 빠지게 합니다.
여러분, 비밀은 꼭 지켜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비밀을 남에게 말하는 것은, 그에게까지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다른 사람의 비밀을 알았다면,
하나님께만 간절한 기도로 아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볼테르는 또 하나의 어려운 일로 '고난을 견디는 일'을 말했습니다.
사실, 억울한 고통을 당하거나, 전혀 원치 않는 고난이 내게 찾아왔을 때,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정체를 온전히 바라보고, 그 정체를 간파(看破)하면
우리 앞에 어떤 고난이 와도 결코 낙심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지금 힘드십니까 ? 지금 답답하십니까 ? 지금 괴로우십니까 ?
오늘 제목처럼,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완전히 정복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성숙한 사람, 어른스러운 사람,
그 그릇이 크고 위대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본 받기 원하고 존경합니다.
그런데 그 성숙과 위대함의 척도가 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지식, 그들이 가진 많은 능력들, 그들이 가진 많은 소유가 아닙니다.
사람의 크기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으로 가름합니다.
그런데 그 인격이라 함은 대부분의 경우, '큰 어려움 중에도 얼마나 넉넉하게 참는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로 판단합니다.
지난 10월14일 목요일, 남미 칠레에서 70여일 동안
지하 700m 깊이에 갇혀있던 33명의 광부들이 드디어 구출되었습니다.
구출되는 장면은 세계 각 국의 미디어를 통해 온 세계에 생중계 되었습니다.
저도 한 참을 지켜보았는데 얼마나 감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갱도에서, 30도가 훨씬 넘는 더위를 견디며,
3일분의 작은 식량으로 20여 일을 견딘 그들의 인내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더구나 자신들의 생사가 확인된 후에도 약 2개월이나 지나 구출되었지만,
그들은 마지막까지 인내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엄청난 불안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지상에서도 알고 있을까 ?"
"우리들의 상황을 지상에서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 지하 700m 깊이에 갇혀 있는 우리들을 쉽게 구출할 수 있을까 ?"
"우리들의 경험을 보아서는, 이곳까지 굴을 파 오려면 수개월, 혹은 1년 이상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그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 ?"
"우리에게 있는 음식은 겨우 3일분뿐인데 !"
33명의 그들은 너무나 적은 음식량으로 서로 싸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극한 분노와 불안으로 책임을 남에게 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며, 하나되어, 인내했습니다.
구출 된 33명이 너무나 성숙하고, 너무나 멋있게 보이는 것은,
그들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신뢰하며, 인내로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성숙한 사람은 인내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영적 고난 앞에서, 신앙적으로 얼마나 그 고난을 이기고 견뎌내느냐가
그 사람의 영적 성숙도를 나타냅니다.
성숙한 신앙인에게나 비 성숙한 신앙인에게나 고난은 찾아옵니다.
그런데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그 고난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겨내지도 못해서 쉽게 무너지고 말지만,
성숙한 신앙인은 그 고난을 인내와 믿음으로 이겨냅니다.
이런 사람을 인격적이라 말하며 위대한 신앙인이라 말합니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고통스러운 큰 사건에 접하게 되었을 때,
보이는 반응에는 대체로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기피형의 사람입니다.
현실에서 도망쳐서 숨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가족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무조건 도망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 절망형의 사람입니다.
다 망해 버렸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절망하고 자살까지 서슴없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책임전가형의 사람입니다.
잘못 된 책임을 남에게 넘겨서라도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이 고난은 누구 때문이요,
저 고통은 누구 때문이라고 돌리고 자기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넷째, 원망형의 사람입니다.
잘못을 회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욕과 원망이 충만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닥치는 대로 다 원망하고 욕을 하면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다섯째, 무장형 혹은 전투형의 사람입니다.
원망이 지나쳐서, 몸으로 행동하여 싸우려 드는 것입니다.
내 고통과 속상함을 다른 사람과의 싸움에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무조건 싸우려 드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여섯째, 성숙형의 사람입니다.
억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요, 원망하는 것도 아니요,
절망하고 앉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말없이 생각을 합니다.
'이 일에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넉넉하고 성숙된 인격으로 깊이 있게 살펴봅니다.
성숙된 사람은 성숙한 자세로 고난을 보고, 문제를 보고, 사건을 봅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힘든 일이지만, 가장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런 사람을 만납니다.
눈물의 선지자라 불리는 예레미야입니다.
지금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눈앞에 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수많은 죄를 반복하여 짓고,
또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수없이 들으면서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루살렘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예레미야는 바라봅니다.
고국의 멸망을 내다보며 안타까워합니다.
민족이 당할 고난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너무나 괴롭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본문19절,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重傷)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이 고백을 잘 보면 예레미야에게는 두 가지 깨달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당연히 당해야 할 것을, 지금 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게 있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 !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 범죄 하는 백성들과 이스라엘을 향해
수없이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목숨도 걸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했고,
이스라엘을 향해 권고했으며, 이스라엘을 위해 모든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가 산 인생은 결코 범죄의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각합니다.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
내 잘못이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
고난과 어려움과 슬픔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않습니까 ?
직장 상사에게 돌리고, 부하에게 돌리며,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모에게, 자식에게
그 책임을 돌리지는 않습니까 ?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커다란 고통과 엄청난 고난보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실패보다, 멸망보다도 더 중한 것입니다.
질병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깨달음입니다.
사람은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성숙한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죽고 사는 것은 사람도 짐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짐승은 끝까지 깨닫지 못하고 죽지만, 사람은 깨닫습니다.
또한 의인과 죄인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의인에게는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지금 혹 고난 중에 있습니까 ?
그렇다면 그 고난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기 위해 하나님 앞에 무릎꿇기 바랍니다.
"이 고난을 빨리 지나게 하옵소서" "이 고난을 이기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보다
더욱 중요한 기도는 "이 고난의 의미를 알게 하옵소서"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는 고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이것은, 남을 향한 판단과 비판을 멈추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을 놓고 내가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겠단 말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사실 판단과 비판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얼마 전, 尖閣諸島와 관련된 문제로 일본이 큰 곤경을 치렀습니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 일본이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서, 제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중국의 단결력과 일본의 하나되지 못함입니다.
지난 몇 년 간의 일본정치를 보면, 비판과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대개의 경우는, 집안에서 싸우다가도 밖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잠깐 집안 싸움을 멈추고,
한 마음이 되어 외부와의 싸움에 나서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요사이 일본은 그렇지 못합니다.
집안에 있는 비판과 판단 그리고 싸움으로 인해,
외부와의 싸움에는 나서지도 못합니다.
힘 한 번 못쓰고 지고 맙니다.
어떤 가정을 보면, 부부싸움을 자주 합니다. 쉬는 날도 없이 싸웁니다.
왜 그러는지 아십니까 ? 둘 다 너무 똑똑합니다.
상대에 대해서 눈에 보이는 족족 판단하고, 심지어 어떤 것은 보지도 않고 판단합니다.
어떤 것은 꿈으로 판단하고, 어떤 때는 그저 생각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서로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내 말만하고 내 말만 옳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 모두 덕(德)있는 신앙인이 됩시다.
덕(德)이 무엇일까요 ?
그것은, 때로는 알고도 모르는 척 해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가만히 있는 것이 덕(德)입니다. 기다려 주는 것이 덕입니다.
우리는 좀처럼 기다리지 못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일단 말로 뱉어 버립니다.
판단이 너무 빠릅니다.
그러나 지나보면 그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자신도 압니다.
그러나 이미 늦습니다.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 예레미야를 통해 두 가지를 배웁시다.
첫째,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
이 모든 것이 내 탓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이 고난을 통해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실까 ?
둘째,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여러분, 내가 참으면 될 것을, 오히려 남에게 인내하기를 요구하지 말기 바랍니다.
서양 속담에
"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역경과 고난의 돌을 치워버리면 일시적으로는 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고난의 때에 위를 바라보는 믿음과 인내입니다.
우리 본향교회는 이제 12살이 되었습니다.
이미 햇수로는 성숙한 교회입니다.
이제 신앙에 있어서도, 고난과 역경에 있어서도 성숙한 우리들이 되어,
성숙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넉넉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교회의 부흥을 위해, 크게 쓰임 받는 당신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한 신앙인(信仰人)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 우리 인간들이, 가장 진실해 질 때가 언제일까요 ?
사랑할 때일까요 ?
아니면 기도할 때일까요 ?
혹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일까요 ?
혹 눈물을 흘릴 때일까요 ?
혹 웃을 때일까요 ? .......
아니요. 이럴 때보다 더욱 진실해 질 때는, 죽음을 앞둔 때라고 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비로소 죽음을 앞두고 진실함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면,
자신이 살아 온 삶을 돌아보면서 세 가지 정도의 후회(後悔)를 한다고 합니다.
첫째, 나누며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그때 좀 더 베풀 수 있었는데, 좀 더 나누어 줄 수 있었는데,
좀 더 헌신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후회된다고 합니다.
또한 '이렇게 쥐고, 모아봐도 먹고도 쓰지도 못하고 가는 것을,
좀 더 좋은 일하면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하며 후회한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죽음의 문턱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몇 해 전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이러한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좀 더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는데, 좀 더 사랑한다 말할 수 있었는데 !'
그것이 지금도 제 마음 속에 깊은 후회로 남습니다.
둘째,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그때 조금만 더 참을 것을, 그때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불가피하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까 그때 좀 더 참을 수 있었는데,
그걸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 너무나 후회가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혹시 참지 못한 것 때문에 후회하는 것 없습니까 ?
두 번 다시, 그런 후회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성장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즐기며, 행복하게 살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좀 더 행복하게 살수도 있었는데, 좀 더 즐길 수 있었는데,
그렇게 다투고, 울고불고 할 필요 없었는데, 얼마든지 즐겁게 살수 있었는데'
'어찌 그토록 어리석어서, 나 자신을 괴롭히고, 또 남까지 괴롭히며 살았던고 !?'
'왜 그토록 불평하며, 짜증내고, 원망하며 살았던고 !?'하며 후회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먼 훗날, 하나님께서 하늘로 우리를 부르실 때, 이러한 후회를 하지 않도록,
아름다운 삶을 사는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
우리가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지금의 삶이 중요합니다.
지금 베풀어야 하고, 지금 참아야 하며, 또한 지금 즐겨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눈앞의 삶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힘겹습니다.
그래서 볼테르라고 하는 프랑스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참으로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정말 어려운 일은, 비밀을 지키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참 묘하게도, 무슨 비밀을 알고 나면,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견디지를 못합니다.
결국, 나도 지키기 어려운 그 비밀을, 남에게는 꼭 지키라고 다짐받으면서,
굳이 이야기를 해서 다른 사람까지 괴로움에 빠지게 합니다.
여러분, 비밀은 꼭 지켜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비밀을 남에게 말하는 것은, 그에게까지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다른 사람의 비밀을 알았다면,
하나님께만 간절한 기도로 아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볼테르는 또 하나의 어려운 일로 '고난을 견디는 일'을 말했습니다.
사실, 억울한 고통을 당하거나, 전혀 원치 않는 고난이 내게 찾아왔을 때,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정체를 온전히 바라보고, 그 정체를 간파(看破)하면
우리 앞에 어떤 고난이 와도 결코 낙심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지금 힘드십니까 ? 지금 답답하십니까 ? 지금 괴로우십니까 ?
오늘 제목처럼,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완전히 정복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성숙한 사람, 어른스러운 사람,
그 그릇이 크고 위대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본 받기 원하고 존경합니다.
그런데 그 성숙과 위대함의 척도가 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지식, 그들이 가진 많은 능력들, 그들이 가진 많은 소유가 아닙니다.
사람의 크기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으로 가름합니다.
그런데 그 인격이라 함은 대부분의 경우, '큰 어려움 중에도 얼마나 넉넉하게 참는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로 판단합니다.
지난 10월14일 목요일, 남미 칠레에서 70여일 동안
지하 700m 깊이에 갇혀있던 33명의 광부들이 드디어 구출되었습니다.
구출되는 장면은 세계 각 국의 미디어를 통해 온 세계에 생중계 되었습니다.
저도 한 참을 지켜보았는데 얼마나 감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갱도에서, 30도가 훨씬 넘는 더위를 견디며,
3일분의 작은 식량으로 20여 일을 견딘 그들의 인내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더구나 자신들의 생사가 확인된 후에도 약 2개월이나 지나 구출되었지만,
그들은 마지막까지 인내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엄청난 불안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지상에서도 알고 있을까 ?"
"우리들의 상황을 지상에서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 지하 700m 깊이에 갇혀 있는 우리들을 쉽게 구출할 수 있을까 ?"
"우리들의 경험을 보아서는, 이곳까지 굴을 파 오려면 수개월, 혹은 1년 이상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그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 ?"
"우리에게 있는 음식은 겨우 3일분뿐인데 !"
33명의 그들은 너무나 적은 음식량으로 서로 싸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극한 분노와 불안으로 책임을 남에게 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며, 하나되어, 인내했습니다.
구출 된 33명이 너무나 성숙하고, 너무나 멋있게 보이는 것은,
그들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신뢰하며, 인내로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성숙한 사람은 인내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영적 고난 앞에서, 신앙적으로 얼마나 그 고난을 이기고 견뎌내느냐가
그 사람의 영적 성숙도를 나타냅니다.
성숙한 신앙인에게나 비 성숙한 신앙인에게나 고난은 찾아옵니다.
그런데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그 고난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겨내지도 못해서 쉽게 무너지고 말지만,
성숙한 신앙인은 그 고난을 인내와 믿음으로 이겨냅니다.
이런 사람을 인격적이라 말하며 위대한 신앙인이라 말합니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고통스러운 큰 사건에 접하게 되었을 때,
보이는 반응에는 대체로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기피형의 사람입니다.
현실에서 도망쳐서 숨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가족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무조건 도망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 절망형의 사람입니다.
다 망해 버렸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절망하고 자살까지 서슴없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책임전가형의 사람입니다.
잘못 된 책임을 남에게 넘겨서라도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이 고난은 누구 때문이요,
저 고통은 누구 때문이라고 돌리고 자기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넷째, 원망형의 사람입니다.
잘못을 회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욕과 원망이 충만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닥치는 대로 다 원망하고 욕을 하면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다섯째, 무장형 혹은 전투형의 사람입니다.
원망이 지나쳐서, 몸으로 행동하여 싸우려 드는 것입니다.
내 고통과 속상함을 다른 사람과의 싸움에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무조건 싸우려 드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여섯째, 성숙형의 사람입니다.
억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요, 원망하는 것도 아니요,
절망하고 앉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말없이 생각을 합니다.
'이 일에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넉넉하고 성숙된 인격으로 깊이 있게 살펴봅니다.
성숙된 사람은 성숙한 자세로 고난을 보고, 문제를 보고, 사건을 봅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힘든 일이지만, 가장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런 사람을 만납니다.
눈물의 선지자라 불리는 예레미야입니다.
지금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눈앞에 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수많은 죄를 반복하여 짓고,
또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수없이 들으면서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루살렘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예레미야는 바라봅니다.
고국의 멸망을 내다보며 안타까워합니다.
민족이 당할 고난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너무나 괴롭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본문19절,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重傷)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이 고백을 잘 보면 예레미야에게는 두 가지 깨달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당연히 당해야 할 것을, 지금 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게 있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 !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 범죄 하는 백성들과 이스라엘을 향해
수없이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목숨도 걸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했고,
이스라엘을 향해 권고했으며, 이스라엘을 위해 모든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가 산 인생은 결코 범죄의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각합니다.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
내 잘못이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
고난과 어려움과 슬픔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않습니까 ?
직장 상사에게 돌리고, 부하에게 돌리며,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모에게, 자식에게
그 책임을 돌리지는 않습니까 ?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커다란 고통과 엄청난 고난보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실패보다, 멸망보다도 더 중한 것입니다.
질병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깨달음입니다.
사람은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성숙한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죽고 사는 것은 사람도 짐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짐승은 끝까지 깨닫지 못하고 죽지만, 사람은 깨닫습니다.
또한 의인과 죄인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의인에게는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지금 혹 고난 중에 있습니까 ?
그렇다면 그 고난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기 위해 하나님 앞에 무릎꿇기 바랍니다.
"이 고난을 빨리 지나게 하옵소서" "이 고난을 이기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보다
더욱 중요한 기도는 "이 고난의 의미를 알게 하옵소서"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는 고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이것은, 남을 향한 판단과 비판을 멈추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을 놓고 내가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겠단 말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사실 판단과 비판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얼마 전, 尖閣諸島와 관련된 문제로 일본이 큰 곤경을 치렀습니다.
외교적인 부분에 있어서 일본이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서, 제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중국의 단결력과 일본의 하나되지 못함입니다.
지난 몇 년 간의 일본정치를 보면, 비판과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대개의 경우는, 집안에서 싸우다가도 밖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잠깐 집안 싸움을 멈추고,
한 마음이 되어 외부와의 싸움에 나서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요사이 일본은 그렇지 못합니다.
집안에 있는 비판과 판단 그리고 싸움으로 인해,
외부와의 싸움에는 나서지도 못합니다.
힘 한 번 못쓰고 지고 맙니다.
어떤 가정을 보면, 부부싸움을 자주 합니다. 쉬는 날도 없이 싸웁니다.
왜 그러는지 아십니까 ? 둘 다 너무 똑똑합니다.
상대에 대해서 눈에 보이는 족족 판단하고, 심지어 어떤 것은 보지도 않고 판단합니다.
어떤 것은 꿈으로 판단하고, 어떤 때는 그저 생각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서로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내 말만하고 내 말만 옳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 모두 덕(德)있는 신앙인이 됩시다.
덕(德)이 무엇일까요 ?
그것은, 때로는 알고도 모르는 척 해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가만히 있는 것이 덕(德)입니다. 기다려 주는 것이 덕입니다.
우리는 좀처럼 기다리지 못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일단 말로 뱉어 버립니다.
판단이 너무 빠릅니다.
그러나 지나보면 그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자신도 압니다.
그러나 이미 늦습니다.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 예레미야를 통해 두 가지를 배웁시다.
첫째,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
이 모든 것이 내 탓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이 고난을 통해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실까 ?
둘째,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여러분, 내가 참으면 될 것을, 오히려 남에게 인내하기를 요구하지 말기 바랍니다.
서양 속담에
"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역경과 고난의 돌을 치워버리면 일시적으로는 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고난의 때에 위를 바라보는 믿음과 인내입니다.
우리 본향교회는 이제 12살이 되었습니다.
이미 햇수로는 성숙한 교회입니다.
이제 신앙에 있어서도, 고난과 역경에 있어서도 성숙한 우리들이 되어,
성숙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넉넉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