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010년9월12일, 이사야53:1-6(참된 치유자이신 그리스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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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계신 지체들을 이렇게 축복합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비전(꿈)으로 삼고 사는 당신,
하나님은 당신을 갈렙처럼 크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갈렙의 강건함의 복과, 산지를 차지한 복이,
당신에게도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이태리의 유명한 한 연예인(藝能人)이 심한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정신과를 찾았는데 의사가 진찰 후 이러한 처방을 내렸습니다.
"당신의 증세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요즘 한창 유행하는 가리말디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자주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이 환자가 더욱 더 우울한 얼굴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바로 그 가리말디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웃기고,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그 사람이
사실은 가장 우울한 문제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늘 행복해 보이고, 즐거워 보이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문제투성이요,
상처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두에게 존경받고 인정받으며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여기저기 문제와 상처가 가득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치유 받아야만 하는 상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오래 전, '전원일기'라는 드라마에 이런 내용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 속 귀동이의 색시가 몇 해 동안 가출을 했다가,
추운 겨울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였습니다.
자식도 남편도 팽개치고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 모양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몇 년이나 지난 후 마을로 숨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겠습니까 ?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럴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자기가 난 아들(노마)은 엄마 얼굴도 기억 못합니다.
엄마는 먼저 길에서 노는 아들에게 다가가 따뜻한 털스웨터를 선물로 줍니다.
노마가 그것을 입고 집에 들어오니까 귀동이는 모든 것을 짐작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납니다.
그래서 그 옷을 발기발기 찢어서 마을 사람들이 다 보도록 장대에 높이 매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마을 구석에 몰래 숨어있던 귀동이 색시를
복길이 엄마가 발견합니다. 매우 놀랍니다. 그리고 곧 모든 사정을 짐작합니다.
엄동설한에 얇은 옷 하나만 걸친 노마 엄마를 그냥 놔둘 복길 엄마가 아닙니다.
자기 집으로 들입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서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게 됩니다.
온 관심이 복길이네 집으로 쏠립니다.
마을 사람들은 노마 아빠가 모든 걸 용서하고,
노마 엄마를 집으로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모두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노마 아빠 귀동이는 그 동안의 세월을 한으로 살았습니다.
절대로 용서 못합니다. 오히려 더욱 화를 내고 더욱 흥분합니다.
그런 귀동이를 마을의 형과 친구들이 설득합니다. 용서해 주라고요.
귀동이는 한참을 엉엉 웁니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벌떡 일어나 노마 엄마가 있는 복길이네로 갑니다.
마을사람들도 뒤따릅니다.
온 마을사람들이 복길이네 마당에 모였습니다.
바로 그 때, 방안으로부터 일용엄니가 귀동이 색시를 심하게 꾸짖는 소리가
들려 나옵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니, 귀동이 색시 아니냐 ! 아이고 이게 웬일이냐 !
그래, 니 서방, 니 사ㅣ끼를 팽개쳐불고 웬 놈팽이 따라나가더니 .......
한 두 해도 아니고, 몇 해만에 이리 기어들어 왔다냐 !
그래 그 멀쑥한 놈하고 서울서 사니 좋드냐 ?
김 안매고 뜨듯한 아파트에서 사니 등 따숩드냐 ?"
"그 어린 젖먹이 사ㅣ끼를 두고,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지 서방을 두고 뛰쳐나가더니,
요 모양 요꼴이드냐, 이 모진 예편네야 !"
"니가 싫으면 나가고 오갈 데 없으면 들어오는 곳이 집이드냐 ?"
"니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다시 들어 올 생각을 했다냐 !"
"우리 양촌리 사람 아무도 너 안 반긴다. 썩 나가거라 !"
그러면서 일용엄니도 눈물을 훔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다시 조용히 말을 계속합니다.
"딴 사내 품이 아무리 좋더라도 사람에게는 도리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촌 동네 살림이 구차스러워도 그러는 게 아니다.
귀동이가 배운 건 좀 없고, 재주는 없지만 걔는 지 분수를 아는 애여.
지 각시와 지 사ㅣ끼 위할 줄 알고, 농사 일 말고는 딴 데 눈파는 법을 모르는 애여.
그래 그런 서방과 사ㅣ끼가 눈에 안 밟히더냐 ?"
"그랬다면 너는 인간이 아닌기라. 내가 니를 용서 못혀 !"
이야기를 듣던 마당에 모인 마을 사람들이 모두 눈시울을 붉힙니다.
노마 아버지 귀동이도 눈물을 흘립니다.
결국 그들은 다시금 하나 되어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일용엄마는 귀동이가 하고 싶었던 말, 귀동이 색시가 하고 싶었던 말,
또 마을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꾸짖음으로 귀동이 마음, 색시의 마음,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모두 후련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각자의 마음 속에 숨어 있던 상처를 밖으로 끄집어내고, 수술을 해서,
그 상처를 깔끔하게 치유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다시 합치는데 까지는
더욱 더 많은 아픔과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상처는 밖으로 드러낼 때, 치유함을 받습니다.
육신의 상처든, 마음의 상처든, 모든 상처는 겉으로 들어낼 때
비로소 치유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 많은 사람이 제일 먼저 할 일은 자기 상처를 드러내 놓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들의 곪은 상처들을 밖으로 드러내어,
완전한 치유함을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 ! 그렇다면, 우리의 상처를 누구 앞에 드러내야 할까요 ?
드라마이긴 하지만, 일용엄마의 말이 왜 그토록 큰 호소력이 있었을까요 ?
그것은 그에게도 아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되어, 인생의 온갖 풍파를 다 겪었습니다.
그녀는 가난이 뭔지, 고통이 뭔지, 피붙이(자식)가 뭔지, 배신이 뭔지를 다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아픔을 당한 사람을 이해해 줄 수 있고,
감싸줄 수 있고, 또 야단도 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치유자는 상처받은 그 사람이 겪었던 아픔을 자신도 당해 본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치유자가 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자기의 문제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었고, 부족함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치유하시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고통을 취하셨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큰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그 분은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 오셨고,
가장 심각한 인간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이들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모든 종류의 상처를 온전히 치료해 주셨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 분을 가리켜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우리를 지금 여기에 있게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그 분이 우리의 진정한 치유자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은 그야말로 상처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탄생부터가 상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께서 친히 피조물 속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 우리가 지금 이 마음과 지혜, 생각, 인격을 모두 가지고
개미나 지렁이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삶이 편안하겠습니까 ?
그러나 예수님은 어느 곳, 어느 시대를 초월하실 수 있는
자유로운 본체(本體)를 버리시고, 하나의 작은 몸에 구속(拘束)되셨습니다.
냄새나는 말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피난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애굽으로 도망했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려서부터 생업에 힘써야 했습니다.
복음사역을 시작했을 때는, 고향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동족들도 비방했습니다. 가족들까지 반대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여러분 ! 예수님의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겠습니까 ?!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손과 발과 머리와 옆구리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육체적인 상처도 입으신 분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에게서까지 버림받는 최고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마태복음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랑하는 여러분 !
몸도 마음도 영혼도 온통 상처투성이였던 그 분이 우리의 주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본문3절은 바로 그런 상처받은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더라"
우리 사람들은 어리석고 미련한 자신으로 인해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상처를 받으신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받으신 모든 상처는, 당신께서 스스로 원하셔서 받은 상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달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실 때,
사람들이 마취제(혹은 진통제)를 주었습니다. 쓸개 탄 포도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것마저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더욱 더 큰 고통과 상처를 받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렇게 더 큰 고통을 원하셨을까요 ?
그 모두가 우리를 치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갖 상처를 입은 우리들, 온갖 상처 가운데 괴로워하는 우리들을
뜨거운 가슴으로 치료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상처를 받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그 분은 상처받은 그 가슴으로,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상처를 온전히 치유해 주십니다.
버림받고 멸시받아 촛농처럼 고통하며 타 내려가는 그 상처난 마음으로
우리 마음에 난 상처를 따뜻하게 치료해 주십니다.
하염없이 흘리시던 그 눈물로 가지고, 우리 슬픔을 치료해 주십니다.
못 박히신 두 손과 발을 가지고,
이런 저런 육신의 병으로 고통하는 우리들을 치유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들이 우리들의 상처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하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의 깊은 상처들을 주님 앞에 나와서
부끄럼 없이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께 아뢰십시오.
"주님 ! 저 정말로 아픕니다. 견디기 어렵습니다. 어서 치료해 주세요"
분명,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치유가 있을 것을 믿습니다.
이번 한 주간, 여러분 모두에게 큰 치유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느니라"
(十字架にかかって, 自らその身にわたしたちの罪を擔ってくださいました.
わたしたちが, 罪に對して死んで, 義によって生き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そのお受けになった傷によって, あなたがたはいやされました.)
본문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彼が刺し貫かれたのは, わたしたちの背きのためであり,
彼が打ち碎かれたのは, わたしたちの咎のためであった.
彼の受けた懲らしめによって, わたしたちに平和が與えられ,
彼の受けた傷によって, わたしたちはいやされた.)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분의 상처로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아직도 왜 상처가 남아 있고,
또 새로운 아픔들이 자꾸만 생겨날까요 ?
그것은,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치유자로 나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들도 '상처 입은 치유자'로 나섭시다.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상처 입은 지체들을 향해 치유자로 나아갑시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상처를 치유 받은 이유요,
또 지금 우리들이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인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의 저자 헨리 나우웬은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상처를 받음으로 죄 많은 우리들을 구원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신 것처럼, 우리들도 내가 받은 상처 때문에 고민하지 말고,
내가 받은 상처 때문에 우울해 하지 말고, 내가 받은 상처 때문에 절망하지 말고,
이 시대의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기 위해 나아갑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결심합시다.
나도 치유자의 사명을 감당하자. 상처 입은 치유자로 나서자.
자 !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의 상처에 대해 벌벌 떠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포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상처들을 숨기려 하지말고 그대로 용납해야 합니다.
상처를 숨기려고 하면 그 상처는 더욱 나를 공격합니다.
나에게 상처가 있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살피며 견뎌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면, 그것은 내 속에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됩니다.
그런 상처는 우리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성도여러분 ! 지금의 상처를 견디어 이겨내기 바랍니다.
분명,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 경험과 면역력으로 다른 이를 위로하며, 고치실 것입니다.
한국의 교계와 학계에서 치유상담학으로 아주 독보적인 사역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정태기 교수인데 그는 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많은 상처를 받고 자랐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는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상담치유 공부를 하면서 6년 동안 아주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구실을 찾아갔을 때, 그의 지도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태기 ! 나는 더 이상 자네를 지도할 수 없네. 포기했네. 고국으로 돌아가게 !"
그 순간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한 배신감에 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 온 공부인데, 내가 교수님을 얼마나 섬겼는데, 얼마나 참아 주었는데 ....."
분노에 떨면서 그 교수의 연구실 문을 나오면서 문을 세차게 닫았습니다.
얼마나 세차게 닫았든지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계단의 난간을 붙들고 엉엉 울었습니다. 억울하고 속상하고 그랬습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등뒤에서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안아 주었습니다.
뒤돌아보니 방금 자기에게 그런 엄청난 선언을 했던 그 지도교수였습니다.
"태기, 자네 ! 이제 겨우 나와 함께 공부할 자세가 보이는 구만 !"
정태기는 그 말을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착실히 할 때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고,
이제 불손한 반응을 보이니까 다시 하자 그러고,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다시 그 지도교수가 말을 이었습니다.
"자네가 미국에 온 것은 상담기술을 배우러 온 것도 아니라,
온전한 치유를 배우러 온 줄로 아네.
나는 그래서 그 동안 자네의 진실된 모습을 끄집어내려고 많이 애써보았지만
자네는 꼼짝도 않더군.
하지만 자네는 내가 자네의 상처들을 건드리는 것을 알고는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지.
그런데도 자네는 나를 볼 때마다 공손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네.
마음속엔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도 말이야"
"6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겉 다르고 속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겠나 ?
그런데 오늘 비록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자네는 겉과 속이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네."
"이제 비로소 자네가 치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자세가 된 것이지 !"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 놓을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되고,
그것이 또한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첫 걸음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성도여러분 !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약점을 꾸중하지 않으셨습니다. 지적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제자들의 흠과 잘못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용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방법은 용납하시는 것이 첫 걸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주위에는 강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강도를 꾸짖지 않으시고 그대로 용납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강도를 향해서
예수님은 그가 천국의 주인이 될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강도를 그대로 받아들이심으로 예수님은 그의 치유자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 주위에는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세리들도 있었고 창기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상처를 캐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 중에서 예수님의 진실한 제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용납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치유된 것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항상 병자들이 많았습니다.
당시의 장로, 서기관, 제사장들은 그들의 병의 원인을 따졌습니다.
이 사람의 병은 누구 때문에 생겨난 병이냐 ?
그러나 예수님은 있는 그대로 용납하셨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하나님의 계획하심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간음한 여인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돌을 던지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냥 그 모습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돌아가서 다시는 이런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심으로
죄에 대한 심판을 분명히 하셨을 뿐, 그에게 어떤 책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8: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예수님은 내가 가난할 때 도와주려고 돈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주님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할 때 주님은 그 가난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하십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주님은 함께 병상에서 고통하십니다.
내가 억울하게 한 맺혀 있을 때, 주님은 옆에서 함께 울어주십니다.
내가 죄지었을 때, 주님은 그 죄의 아픔을 함께 느끼시면서
내 죄의 고통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아주십니다.
그분이 상처 입은 치유자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온갖 상처들로 인해 지금 너무나 아프십니까 ?
이 시간 그분께 나아가서, 우리의 모든 상처와 아픔과 고통과 괴로움을
완전히 내려놓고 치유 받으십시다. 체면을 포기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처럼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모든 아픈 이들에게로 나아갑시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를 치유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치유자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또한 혹, 좀처럼 치유되지 않는 상처가 있습니까 ?
그것은 우리들을 더욱 더 큰 치유자로 삼으시기 위한 훈련이며, 경험입니다.
우리들의 겪는 그 고통과, 함께 고통하시는 주님을 느낍시다.
그리하여, 이 땅의 최고로 상처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특별한 치유자가 됩시다.
이런 아름다운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 평생에 함께 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비전(꿈)으로 삼고 사는 당신,
하나님은 당신을 갈렙처럼 크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갈렙의 강건함의 복과, 산지를 차지한 복이,
당신에게도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이태리의 유명한 한 연예인(藝能人)이 심한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정신과를 찾았는데 의사가 진찰 후 이러한 처방을 내렸습니다.
"당신의 증세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요즘 한창 유행하는 가리말디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자주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이 환자가 더욱 더 우울한 얼굴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바로 그 가리말디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웃기고,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그 사람이
사실은 가장 우울한 문제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늘 행복해 보이고, 즐거워 보이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문제투성이요,
상처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두에게 존경받고 인정받으며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여기저기 문제와 상처가 가득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치유 받아야만 하는 상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오래 전, '전원일기'라는 드라마에 이런 내용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 속 귀동이의 색시가 몇 해 동안 가출을 했다가,
추운 겨울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였습니다.
자식도 남편도 팽개치고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 모양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몇 년이나 지난 후 마을로 숨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겠습니까 ?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럴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자기가 난 아들(노마)은 엄마 얼굴도 기억 못합니다.
엄마는 먼저 길에서 노는 아들에게 다가가 따뜻한 털스웨터를 선물로 줍니다.
노마가 그것을 입고 집에 들어오니까 귀동이는 모든 것을 짐작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납니다.
그래서 그 옷을 발기발기 찢어서 마을 사람들이 다 보도록 장대에 높이 매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마을 구석에 몰래 숨어있던 귀동이 색시를
복길이 엄마가 발견합니다. 매우 놀랍니다. 그리고 곧 모든 사정을 짐작합니다.
엄동설한에 얇은 옷 하나만 걸친 노마 엄마를 그냥 놔둘 복길 엄마가 아닙니다.
자기 집으로 들입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서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게 됩니다.
온 관심이 복길이네 집으로 쏠립니다.
마을 사람들은 노마 아빠가 모든 걸 용서하고,
노마 엄마를 집으로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모두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노마 아빠 귀동이는 그 동안의 세월을 한으로 살았습니다.
절대로 용서 못합니다. 오히려 더욱 화를 내고 더욱 흥분합니다.
그런 귀동이를 마을의 형과 친구들이 설득합니다. 용서해 주라고요.
귀동이는 한참을 엉엉 웁니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벌떡 일어나 노마 엄마가 있는 복길이네로 갑니다.
마을사람들도 뒤따릅니다.
온 마을사람들이 복길이네 마당에 모였습니다.
바로 그 때, 방안으로부터 일용엄니가 귀동이 색시를 심하게 꾸짖는 소리가
들려 나옵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니, 귀동이 색시 아니냐 ! 아이고 이게 웬일이냐 !
그래, 니 서방, 니 사ㅣ끼를 팽개쳐불고 웬 놈팽이 따라나가더니 .......
한 두 해도 아니고, 몇 해만에 이리 기어들어 왔다냐 !
그래 그 멀쑥한 놈하고 서울서 사니 좋드냐 ?
김 안매고 뜨듯한 아파트에서 사니 등 따숩드냐 ?"
"그 어린 젖먹이 사ㅣ끼를 두고,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지 서방을 두고 뛰쳐나가더니,
요 모양 요꼴이드냐, 이 모진 예편네야 !"
"니가 싫으면 나가고 오갈 데 없으면 들어오는 곳이 집이드냐 ?"
"니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다시 들어 올 생각을 했다냐 !"
"우리 양촌리 사람 아무도 너 안 반긴다. 썩 나가거라 !"
그러면서 일용엄니도 눈물을 훔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다시 조용히 말을 계속합니다.
"딴 사내 품이 아무리 좋더라도 사람에게는 도리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촌 동네 살림이 구차스러워도 그러는 게 아니다.
귀동이가 배운 건 좀 없고, 재주는 없지만 걔는 지 분수를 아는 애여.
지 각시와 지 사ㅣ끼 위할 줄 알고, 농사 일 말고는 딴 데 눈파는 법을 모르는 애여.
그래 그런 서방과 사ㅣ끼가 눈에 안 밟히더냐 ?"
"그랬다면 너는 인간이 아닌기라. 내가 니를 용서 못혀 !"
이야기를 듣던 마당에 모인 마을 사람들이 모두 눈시울을 붉힙니다.
노마 아버지 귀동이도 눈물을 흘립니다.
결국 그들은 다시금 하나 되어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일용엄마는 귀동이가 하고 싶었던 말, 귀동이 색시가 하고 싶었던 말,
또 마을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꾸짖음으로 귀동이 마음, 색시의 마음,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모두 후련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각자의 마음 속에 숨어 있던 상처를 밖으로 끄집어내고, 수술을 해서,
그 상처를 깔끔하게 치유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다시 합치는데 까지는
더욱 더 많은 아픔과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상처는 밖으로 드러낼 때, 치유함을 받습니다.
육신의 상처든, 마음의 상처든, 모든 상처는 겉으로 들어낼 때
비로소 치유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 많은 사람이 제일 먼저 할 일은 자기 상처를 드러내 놓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들의 곪은 상처들을 밖으로 드러내어,
완전한 치유함을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 ! 그렇다면, 우리의 상처를 누구 앞에 드러내야 할까요 ?
드라마이긴 하지만, 일용엄마의 말이 왜 그토록 큰 호소력이 있었을까요 ?
그것은 그에게도 아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되어, 인생의 온갖 풍파를 다 겪었습니다.
그녀는 가난이 뭔지, 고통이 뭔지, 피붙이(자식)가 뭔지, 배신이 뭔지를 다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아픔을 당한 사람을 이해해 줄 수 있고,
감싸줄 수 있고, 또 야단도 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치유자는 상처받은 그 사람이 겪었던 아픔을 자신도 당해 본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치유자가 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자기의 문제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었고, 부족함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치유하시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고통을 취하셨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큰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그 분은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 오셨고,
가장 심각한 인간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이들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모든 종류의 상처를 온전히 치료해 주셨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 분을 가리켜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우리를 지금 여기에 있게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그 분이 우리의 진정한 치유자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은 그야말로 상처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탄생부터가 상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께서 친히 피조물 속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 우리가 지금 이 마음과 지혜, 생각, 인격을 모두 가지고
개미나 지렁이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삶이 편안하겠습니까 ?
그러나 예수님은 어느 곳, 어느 시대를 초월하실 수 있는
자유로운 본체(本體)를 버리시고, 하나의 작은 몸에 구속(拘束)되셨습니다.
냄새나는 말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피난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애굽으로 도망했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려서부터 생업에 힘써야 했습니다.
복음사역을 시작했을 때는, 고향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동족들도 비방했습니다. 가족들까지 반대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여러분 ! 예수님의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겠습니까 ?!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손과 발과 머리와 옆구리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육체적인 상처도 입으신 분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에게서까지 버림받는 최고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마태복음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랑하는 여러분 !
몸도 마음도 영혼도 온통 상처투성이였던 그 분이 우리의 주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본문3절은 바로 그런 상처받은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더라"
우리 사람들은 어리석고 미련한 자신으로 인해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상처를 받으신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받으신 모든 상처는, 당신께서 스스로 원하셔서 받은 상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달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실 때,
사람들이 마취제(혹은 진통제)를 주었습니다. 쓸개 탄 포도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것마저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더욱 더 큰 고통과 상처를 받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렇게 더 큰 고통을 원하셨을까요 ?
그 모두가 우리를 치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갖 상처를 입은 우리들, 온갖 상처 가운데 괴로워하는 우리들을
뜨거운 가슴으로 치료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상처를 받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그 분은 상처받은 그 가슴으로,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상처를 온전히 치유해 주십니다.
버림받고 멸시받아 촛농처럼 고통하며 타 내려가는 그 상처난 마음으로
우리 마음에 난 상처를 따뜻하게 치료해 주십니다.
하염없이 흘리시던 그 눈물로 가지고, 우리 슬픔을 치료해 주십니다.
못 박히신 두 손과 발을 가지고,
이런 저런 육신의 병으로 고통하는 우리들을 치유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들이 우리들의 상처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하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의 깊은 상처들을 주님 앞에 나와서
부끄럼 없이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께 아뢰십시오.
"주님 ! 저 정말로 아픕니다. 견디기 어렵습니다. 어서 치료해 주세요"
분명,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치유가 있을 것을 믿습니다.
이번 한 주간, 여러분 모두에게 큰 치유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느니라"
(十字架にかかって, 自らその身にわたしたちの罪を擔ってくださいました.
わたしたちが, 罪に對して死んで, 義によって生き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そのお受けになった傷によって, あなたがたはいやされました.)
본문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彼が刺し貫かれたのは, わたしたちの背きのためであり,
彼が打ち碎かれたのは, わたしたちの咎のためであった.
彼の受けた懲らしめによって, わたしたちに平和が與えられ,
彼の受けた傷によって, わたしたちはいやされた.)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분의 상처로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아직도 왜 상처가 남아 있고,
또 새로운 아픔들이 자꾸만 생겨날까요 ?
그것은,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치유자로 나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본향성도여러분 ! 우리들도 '상처 입은 치유자'로 나섭시다.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상처 입은 지체들을 향해 치유자로 나아갑시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상처를 치유 받은 이유요,
또 지금 우리들이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인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의 저자 헨리 나우웬은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상처를 받음으로 죄 많은 우리들을 구원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신 것처럼, 우리들도 내가 받은 상처 때문에 고민하지 말고,
내가 받은 상처 때문에 우울해 하지 말고, 내가 받은 상처 때문에 절망하지 말고,
이 시대의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기 위해 나아갑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결심합시다.
나도 치유자의 사명을 감당하자. 상처 입은 치유자로 나서자.
자 !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의 상처에 대해 벌벌 떠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포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상처들을 숨기려 하지말고 그대로 용납해야 합니다.
상처를 숨기려고 하면 그 상처는 더욱 나를 공격합니다.
나에게 상처가 있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살피며 견뎌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면, 그것은 내 속에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됩니다.
그런 상처는 우리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성도여러분 ! 지금의 상처를 견디어 이겨내기 바랍니다.
분명,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 경험과 면역력으로 다른 이를 위로하며, 고치실 것입니다.
한국의 교계와 학계에서 치유상담학으로 아주 독보적인 사역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정태기 교수인데 그는 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많은 상처를 받고 자랐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는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상담치유 공부를 하면서 6년 동안 아주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구실을 찾아갔을 때, 그의 지도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태기 ! 나는 더 이상 자네를 지도할 수 없네. 포기했네. 고국으로 돌아가게 !"
그 순간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한 배신감에 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 온 공부인데, 내가 교수님을 얼마나 섬겼는데, 얼마나 참아 주었는데 ....."
분노에 떨면서 그 교수의 연구실 문을 나오면서 문을 세차게 닫았습니다.
얼마나 세차게 닫았든지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계단의 난간을 붙들고 엉엉 울었습니다. 억울하고 속상하고 그랬습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등뒤에서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안아 주었습니다.
뒤돌아보니 방금 자기에게 그런 엄청난 선언을 했던 그 지도교수였습니다.
"태기, 자네 ! 이제 겨우 나와 함께 공부할 자세가 보이는 구만 !"
정태기는 그 말을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착실히 할 때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고,
이제 불손한 반응을 보이니까 다시 하자 그러고,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다시 그 지도교수가 말을 이었습니다.
"자네가 미국에 온 것은 상담기술을 배우러 온 것도 아니라,
온전한 치유를 배우러 온 줄로 아네.
나는 그래서 그 동안 자네의 진실된 모습을 끄집어내려고 많이 애써보았지만
자네는 꼼짝도 않더군.
하지만 자네는 내가 자네의 상처들을 건드리는 것을 알고는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지.
그런데도 자네는 나를 볼 때마다 공손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네.
마음속엔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도 말이야"
"6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겉 다르고 속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겠나 ?
그런데 오늘 비록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자네는 겉과 속이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네."
"이제 비로소 자네가 치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자세가 된 것이지 !"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 놓을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되고,
그것이 또한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첫 걸음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성도여러분 !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약점을 꾸중하지 않으셨습니다. 지적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제자들의 흠과 잘못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용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방법은 용납하시는 것이 첫 걸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주위에는 강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강도를 꾸짖지 않으시고 그대로 용납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강도를 향해서
예수님은 그가 천국의 주인이 될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강도를 그대로 받아들이심으로 예수님은 그의 치유자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 주위에는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세리들도 있었고 창기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상처를 캐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 중에서 예수님의 진실한 제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용납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치유된 것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항상 병자들이 많았습니다.
당시의 장로, 서기관, 제사장들은 그들의 병의 원인을 따졌습니다.
이 사람의 병은 누구 때문에 생겨난 병이냐 ?
그러나 예수님은 있는 그대로 용납하셨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하나님의 계획하심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간음한 여인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돌을 던지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냥 그 모습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돌아가서 다시는 이런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심으로
죄에 대한 심판을 분명히 하셨을 뿐, 그에게 어떤 책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8: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예수님은 내가 가난할 때 도와주려고 돈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주님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할 때 주님은 그 가난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하십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주님은 함께 병상에서 고통하십니다.
내가 억울하게 한 맺혀 있을 때, 주님은 옆에서 함께 울어주십니다.
내가 죄지었을 때, 주님은 그 죄의 아픔을 함께 느끼시면서
내 죄의 고통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아주십니다.
그분이 상처 입은 치유자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온갖 상처들로 인해 지금 너무나 아프십니까 ?
이 시간 그분께 나아가서, 우리의 모든 상처와 아픔과 고통과 괴로움을
완전히 내려놓고 치유 받으십시다. 체면을 포기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처럼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모든 아픈 이들에게로 나아갑시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를 치유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치유자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또한 혹, 좀처럼 치유되지 않는 상처가 있습니까 ?
그것은 우리들을 더욱 더 큰 치유자로 삼으시기 위한 훈련이며, 경험입니다.
우리들의 겪는 그 고통과, 함께 고통하시는 주님을 느낍시다.
그리하여, 이 땅의 최고로 상처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특별한 치유자가 됩시다.
이런 아름다운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 평생에 함께 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